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2) - 노자는 누구인가

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2)

- 노자는 누구인가 



노자와 한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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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한비자


저자 노자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 「노자한비(老子韓非)열전」에 보인다. 제목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사마천은 노자와 한비자를 하나로 묶어 전을 지었다. 현재에는 「노장신한열전」으로 통용되는데 노자와 한비자 사이에 장자와 신불해(申不害, 원시법가라고 할 수 있을까. 법가의 원조 중에 한 인물)를 넣어 입전(立傳) 인물을 모두 제목에 올렸다.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노자한비열전」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현재 통용되는 제목은 후대에 수정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후대의 수정은 전 전체의 윤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색인 역할을 하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원제목이 가진 드라마틱한 성격이 흐려졌다. 노자는 무위(無爲)를 주로 하는 인물로 알려졌고 한비자는 법가(法家)라고 하는 유위(有爲)의 도를 주장했다. 두 사람을 양극단에 있는 사상가로 생각하도록 고대사상가들의 지도를 그리는 통념에 비추어 보면 사마천의 결합은 이게 뭐지, 하고 놀랄 수밖에 없도록 짜여진 것이다. 사마천은 왜 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었을까?답은 한비자가 『노자』 최초의 주석서라 할 「해로」(解老)와 「유로」(喩老)를 썼다는 데서 기인한다. 한비자는 법의 원천을 도(道)로 보았고 도(道)가 모든 존재와 상(像)의 뿌리라는 점을 간파했다. 『노자』를 읽고 배운 것이다. 법은 도구적 운용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사회의 근원적 토대라는 성격을 법에 부여하려 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언급했지만 한비자의 안목은 쉽게 요약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기에 한비자의 주석 작업에 대해서는 뒤에 상술하기로 한다. 사마천은 노자의 한 줄기가 한비자로 흘러들어갔기에 노자를 한비자의 근본으로 보고 동일선상에 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노자를 유위(有爲)의 방향에서 읽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암시로도 해석할 수 있다.



3명의 노자


노자 전기를 보더라도 놀랄 점이 있다. 노자의 전기를 읽고 나면 독자는 혼란스러워진다. 노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노자전’에서 3명의 노자를 기술한다. 정리된 정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비효율적인 작성방법일 뿐만 아니라 3명을 열거하고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황당한 전이다. 


3명의 기록을 보자. 한 사람은 이씨(李氏) 성(姓)에, 이(耳)라는 이름에다 담(聃)이라는 자(字)를 가진 초나라 사람. 이 인물은 공자를 만났다는 일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주(周)나라의 기록담당관이었다가 주나라가 쇠하자 서방으로 소를 타고 떠났는데 함곡관에서 윤희(尹喜)에게 글을 써주었다는 말도 보인다. 『노자』라는 텍스트의 탄생을 알려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여기서 『노자』는 단일저자에 의한 책이라는 환상이 생겼다. 또 한 사람은 공자와 동시대인으로 알려진 노래자(老萊子)를 짧게 기술한다. 마지막 인물은 진(秦)나라 헌공(獻公)을 만난 주나라 태사 담(儋). 태사 담은 통일을 예견하는 예언자로 그려졌다. 


사마천은 3명을 기록하면서 공자보다 연로한 스승의 모습으로, 공자와 동시대인으로서 또 다른 한 사람으로, 마지막으로 공자 사후 130년 지나 노자로 추정되는 인물까지 채록했다. 공자를 기준으로 노자를 기록했다는 점이 흥미를 끈다. 전기 마지막에는 노자의 자손을 기록해 실존성을 강조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우리가 노자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과 이미지가 모두 담겨 있는 기록이기는 하나 사마천 자신도 저자를 확정하지 못한 점이 호기심을 더 부추긴다. 


한나라 사람들은 사마천의 기록을 읽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신비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지 않았을까. 사마천은 노자를 문서담당자로 기록했다. 한대에 오면 문서담당자(사마천 자신이 문서담당자였다)는 공적 서류와 문헌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천문(天文)과 역법에 관한 일도 하게 된다. 점성술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역법개정에 직접 관여한 사람이 사마천이었다. 한대에 문서담당자라는 말에는 천지의 운행과 질서를 파악하는 사람이라는 신비적 아우라가 덧붙어 에워싼다. 사마천은 예언자로서 노자의 모습을 마지막 인물을 통해 보여 주었는데 한나라 사람들이 품었던 신비주의자로서의 노자의 인상이 ‘문서담당자’라는 말을 통과하면서 더 한층 강화되었을 것이다. 신비주의자로 보는 착오는 사마천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독서행위에서 시대착오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현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바꿔 말해 보자. 주나라 때 문서담당자와 한나라 때 문서담당자는 맡은 임무가 달랐다. 한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품고 있던 한나라 당대의 문서담당자라는 인식을 품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주나라의 서류담당관 노자를 이해했고 그 이미지의 핵심은 신비주의였다. 『노자』라는 책에 신비주의적 면모가 강하다는 사실과도 잘 매치되는 양상이었던 거다.





『노자』라는 책과 저자의 문제


주나라 태사 담(儋)이라는 기록을 두고 다르게 주목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도 노자라는 인물로 거론된다는 자료로서 단순하게 올린 게 아니라 이 시기, 그러니까 기원전 240년경을 『노자』라는 책의 성서(成書) 시점으로 보고 그에 대한 표식으로 인물전을 삽입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노자라는 인물보다 책을 부각하기 위해 사람을 기록했다고 이해한 견해이다. 


사마천의 기록을 종합해 보자. 사마천은 세 사람을 기록했다.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인물이다. 그렇지만 공자를 중심으로 전후로 배치되었고 신비주의적인 면을 공통으로 지니면서 노자라는 한 이미지로 수렴된다. 다르면서도 하나를 이루는 기이한 일이다. 중요한 점은 노자라는 어떤 정체불명의 인물이 아니라 『노자』라는 책에 주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마천이 노자전을 쓴 것은 인물을 기록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노자』라는 책 때문에 저자를 재구성한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한비자의 경우에도 해당하고 장자에도 적용된다. 뛰어난 책의 존재가 저자를 상상하게 만들었고 저자를 탐색하게 이끈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저자가 궁금했던 것이지(당연한 질문이다) 저자를 확정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책이 선행하고 저자를 뒤쫓아 가는 여정이 사마천의 전기일 터, 그 흔적이 지금 우리가 읽는 전기다. 노자의 경우는 또 특수한 문제가 있다. 한비자나 장자에는 저자를 상상할 수 있는 자료들이 텍스트 안에 존재해 이를 전기화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만(이것도 단순하지 않다. 사마천이 전기자료로 쓴 텍스트 내 진술이 픽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는 추상적인 언술이 대부분이어서 저자가 오리무중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결국 여러 전승을 그러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공자와 노자의 만남 같은. 노자가 여럿이라는 사실 자체가 『노자』라는 책의 성질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강조하지만 사마천은 근대적 개념의 저자상을 추구해 작품의 소유권을 확정하려는 게 아니었다. 고대문헌의 전승과 발전, 가필, 개작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근대적 재산권과 밀접한 소유권과 저자귀속은 이상한 사고일 수 있다. 단일저자의 통일된 작품이라는 근대의 시대착오가 여기서도 발생한다. 여러 사람을 기록해서 노자라는 인물을 다양한 이미지로 분산(?)시킨 것이 『노자』라는 책의 성질을 더 잘 보여 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노자』를 균질한 단일저작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전승과정에서 다듬어지고 세련화된 공동의 저작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 변화가 노자읽기를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또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대 문헌이 대부분 저자가 분명하지 않거나 어떤 학파의 공통저작이라는 사실을 다시 환기할 필요가 있다. 고대를 읽을 땐 근대적 저자와 저작 관념을 내려놓는 것이 올바르다. 저자성(著者性)보다는 노자의 목소리에 더 집중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노자』는 저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저자가 없어도, 저자를 궁금해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개념으로 다져진 목소리를 가졌다. 『논어』를 읽으면 인간 공자를 떠올리지 않기란 불가능하지만 『노자』는 저자를 떠올리지 않아도 상관 없다. 두 텍스트는 이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논어』는 공자 없이는 존립하기 어려운 텍스트이지만 『노자』는 저자가 사라져도 무방한, 담론으로 가득한 텍스트다. 


그러나 『노자』를 읽기 전 통과해야 할 관문이 하나 더 있다. 『노자』의 텍스트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 『노자』의 판본을 훑어봐야 한다.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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