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논어』, 절대언어와 역사화 사이(4) - 절대언어

『논어』, 절대언어와 역사화 사이(4)

- 절대언어



경전과 절대언어


유학에서는 중심이 되는 주요 텍스트를 경전(經典)이라 부른다. 경학을 연구하는 학문을 경학(經學)이라 한다. 경전과 경학의 성립은 한(漢)제국의 발전과 나란히 진행되며 적어도 명분상으로 경전과 경학은 제국을 운영하는 기준으로 공고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경(經)이란 말은 기준·중심·표준이란 의미를 품고 있기에 경전은 참조하고 의지해야 하는 고귀한 텍스트였다. 정치뿐 아니라 문화, 역사 등 사회 전반에 중추기능을 하게 된다. ‘이데올로기화되었다’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간단하지 않은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전까지는 오래되었거나 훌륭한 책들로 전해진 존재들이 새롭게 권위를 입게 되어 상서(尙書)는 서경(書經)이 되고 구전가요 묶음이었던 시(詩)는 시경(詩經)이 되고 점술책이었던 주역(周易)은 역경(易經)이 되었다. 전통시대 중국에서는 도서를 분류할 때 경사자집(經史子集)을 가장 큰 카테고리로 하는데 경(經)이 도서 분류의 근간이 되었다는 사실도 경전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 책의 지위가 높아지고 일반 서적과 다른 고유의 아우라를 지니면서 정전화(正典化)되어 절대언어(the absolute language)를 담은 성스런 텍스트로 변한 것이다.     




절대언어란 무엇인가. 시공간을 초월해 누구에게든 보편타당하게 적용되고 고갈되지 않는 풍부한 의미로 가득 찬 언어를 말한다. 한 문명권의 특정한 역사와 사회문화를 뛰어넘어 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인정된다는 뜻이다. 서양에서는 『바이블』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문명의 토대를 이루어 오랜 시간 깊은 영향력을 발휘한 대상을 가리킨다. 어떤 텍스트인들 시작이 없겠는가마는 사회 전체에 완전히 스며들어 시원을 잃어버린, 역사성을 지워 버린/역사성이 지워진 존재라 하겠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모든 글과 말은 절대언어를 지향하는 성질 혹은 욕망을 지녔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거꾸로 사회가 자기들의 절대언어를 만들고자 갈망한다고 말하는 게 옳을지 모르겠다. 경전이나 바이블같이 체계화된 절대언어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회든 절대언어에 준하는, 절대언어에 근접하는 언어는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런 기름진 토대가 풍성하기에 시간의 테스트를 통과해 텍스트가 전해질 때 절대언어가 되는 것일까?



절대언어의 조건 - 불변의 구조


절대언어에 근접한 텍스트로는 가장 짧은 것으로 속담이나 격언, 금언을 들 수 있다. 속담은 발생을 거슬러 올라가면 시원을 잡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속담은 디테일이 빠지고 골격만 남아 단순함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라는 말에는 ‘중’이라는 역사언어가 포함되어 있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또 이 말이 한 나라의 국경을 넘을 경우 머리를 깎는다는 표현은 ‘중’이라는 종교언어와 결합을 전제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는 연쇄고리가 끊어져 다른 문화권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된다. 오래된 속담임에도 시간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국경도 건너지 못한다는 사실은 절대언어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예증이 된다. 하지만 ‘중’과 같은 사회문화적 코드가 완전히 소거된 속담일 때는 문제가 다르다. 그럴 경우 속담은 거의 절대언어에 근접할 수 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와 같은 것이 그러하다. 


민담이나 전설의 경우도 사정은 이와 다르지 않다. 이야기의 편폭이 커지고 디테일이 풍부해질수록 언어에는 역사성과 사회성이 담길 수밖에 없다. 역사·사회적 지시물 때문에 민담과 전설이 민족·국경을 잘 통과할 수 없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역사·사회적 지시물을 디테일로 그대로 남겨둔 채 각 민족과 사회의 역사적 구성물임을 명확하게 인지한다 해도 민담과 전설이 지닌 공통적인 기호와 구조가 절대언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구조주의자들의 도움을 얻어 다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디테일과 사회·역사적 지시물이 읽기를 풍성하게 해주면서 절대언어의 고갱이(= 구조)를 유지한 채 다양한 변이체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이야기성(혹은 서사성)이라는 공통분모가, 이야기성에 내재하는 어떤 불변의 구조가 민담이나 전설이라는 소박한 서사물을 절대언어로 이끄는 것이다. 


절대언어를 확대해 나가면 또 다른 장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시(詩)다. 시가 자신의 언어를 넘어 번역어로 바뀌는 순간, 시의 고유성을 잃어버리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시가 지향하는 성질 자체를 완벽하게 지우지는 못한다. 언어라는 매개물 자체가 역사·사회와 한 몸뚱이로 뒤엉켜 존재할 수밖에 없기에 시가 아무리 언어 자체의 순수를 지향한다 해도 시어를 핥아 보면 시대의 피와 냄새가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피 냄새조차 시간의 빛에 바래고 세월의 물결에 씻기면, 혹은 시의 역사·사회성을 일부러 지우면 시의 절대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믿기 힘든 말이지만 민담이나 전설, 시 따위는 인류의 시원부터 인간과 함께했기에 인간의 DNA에 새겨졌다는 진술이 솔깃해질 지경이다. 민담·전설·시라는 유전설의 장르로 이야기를 풀기보다는 다른 개념을 들여와 보자. ‘양식’이라는 추상화된 말로 접근할 때 절대언어를 이해하기 더 수월할 것 같다. ‘양식’이란 동일한 형태로 되풀이되는 서술/구술 형태를 말한다. 범박하게 말해 민담·전설·시를 이야기의 양식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옛적에 어디어디에”라는 양식화된 서술/구술 방식이 있다. 이 양식은 지나치게 상투화되어 거의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 말은 단순한 투식에 멈추지 않는다. 정해진 표현이 발설되는 순간 발화자건 청중이건 어떤 마법에 걸린 듯이 약속을 하게 되고 심리적으로 준비를 한다. 새 이야기가 시작되겠구나, 재미나는 일화가 따라 나오겠지, 교훈을 주는 어떤 일이 던져지겠구나, 누구나 편안한 마음으로 들을 기대를 하고 발화자는 여기에 힘입어 이야기의 매력을 증폭시킨다. 이것은 강력한 양식이다. 



절대언어의 역할과 기능


절대언어는 강력한 형식이다. 한 사회와 문명의 토대를 결정하고 진로를 제시하며 구성원들의 사고와 심리에 안정된 틀을 제공한다. 그것은 사회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공통의 장(場)을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전통과 한 몸이며 의식 깊이 깃든 의지처이기도 하다. 절대언어가 과연 필요한가, 그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절대언어가 절대적인 역할과 기능을 해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서양과 대면하기 이전,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절대언어는 경전이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논어』였다. 『논어』를 주어로 해서 절대언어로서의 역할을 다시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논어』에 대해 품고 있는 대부분의 의견과 인식, 이미지들은 절대언어로서 작동했던 전통시대 『논어』의 위상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점은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다.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니 뭐니 하는 레토릭으로 통용되는 숱한 고전들에 대한 광고 카피 역시 절대언어라는 표준과 자장 안에서 작동한다는 점도 『논어』의 경우와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고전이 훌륭한 물건인 만큼 절대언어가 지고(至高)의 가치를 가졌다면 절대언어가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거 같다. 어떤 가치든 절대화하는 순간 마(魔)가 낀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은 정치학의 금언이지만 정치에만 해당되지 않기에 묘미가 있는 말이다. 고상한 가치에 어떻게 악마가 끼어들까. 절대화되었기 때문이다. 절대성이 고전에서 우러나오는 성격이든, 절대화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심성에서 빚어졌든, 아니면 절대적인 어떤 존재―돈이든 책이든 가치이든 종교이든 국가이든 이념이든―를 반드시 두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우리의 습속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절대화하는 모든 것은 절대라는 표식이 붙는 순간, 사고의 회로를 단순화시킨다. 절대 앞에서 사고는 정지한다. 절대화된 텍스트는 비판을 허용하지 않으며 독자는 비판하려 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질주하고 독자는 숭배한다. 텍스트를 절대화한 뛰어난 인물은 위대한 존재가 되고 독자는 그들을 경배한다. 독자는 마비된다. 


『논어』를 누가 비판하랴. 공자 말씀에 누가 토를 달랴. 인류의 스승에게 누가 의문을 제기할 것이며 만세의 사표(師表)에게 누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겠는가. 하물며 공자 비판이 가당키나 하며 공자에게 불경한 언사를 누가 내뱉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텍스트가 『논어』만큼 시간을 견뎌, 누구에게는 친밀감을 누구에게는 외경을 누구에게는 난해함을 누구에게는 삶의 진로를 보여 준 적이 있었던가. 또 『논어』를 한문으로 읽었을 때 보통의 독자 누군들 한문 원전을 읽은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절대언어를 간직했다고 상상하는 독자들의 환상이 만든 현상이다. 


『논어』가 태생부터 그러하지는 않았다. 『논어』가 절대언어가 된 데에는 연유가 있다. 『논어』 역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절대언어로 승격되었다. 간단히 살펴보자. 한(漢)나라 때 『논어』는 실제적인 지침서에 가까웠다. 주석가들은 『논어』를 실질적으로 이해했고 이런 방향에서 접근해 주석을 했다. 변화의 조짐은 한나라 이후 위진 남북조시대에 왔다. 하안의 『논어집해』는 소중한 주석서다. 이전 시대의 주석을 집대성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하안의 손에 의해 『논어』가 철학적으로 심화됐기 때문이다. 위진시대에는 삼현경(三玄經)이라 해서 세 가지 심오한 텍스트를 지식인들이 사고의 기준점으로 삼았다. 『주역』, 『노자』, 『장자』가 그것이다. 『주역』에 밝았던 하안은 『논어』 해석에 역학(易學)의 심오함을 가미해 『논어』가 철학적 깊이를 갖도록 했다. 이 작업은 후대 주자의 『논어』 해석을 예고하는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주자가 『논어』를 성리학으로 재해석하면서 『논어』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포괄적인 언어로 재탄생한다. 이후 주자학이 제국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주자의 『논어』 해석이 정전(正典)으로 재확인되고 공인되면서 『논어』는 절대언어가 된다. 조선시대는 이미 절대화된 주자의 언어 위에 구축된 국가이기에 절대성은 중국보다 더 강고했다. 

예를 들어 해석의 차이를 보자. 공자의 유명한 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이인(里仁)4~8장]. 공자의 말은 누구에게 언제 어디서 했는지 정보가 전혀 없는데다 말 자체가 추상적이라 해석의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다. 주자의 주는 이렇다. “도는 사물의 당연한 이치이니 진실로 도를 들으면(깨달으면) 살아서는 하늘을 섬겨 도리를 어기지 않을 뿐이나 죽어서는 편안하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어 다시는 여한이 없을 것이다. 조석(朝夕)은 시간의 가까움을 심하게 말한 방법이다”[道者, 事物當然之理. 苟得聞之, 則生順安死, 無復遺恨矣. 朝夕, 所以甚言其時之近]. 주자는 이 말에 이어 정자(程子)를 인용해, “사람이 도를 몰라서는 안 되니, 진실로 도를 들으면 죽어도 좋다고 말한 것이다”[言人不可以不知道, 苟得聞道, 則雖死可也]. 하안은 이 말을 어떻게 보았을까. “거의 죽을 때에 이르렀는데도 세상에 도가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言將至死, 不聞世之有道]. 황간은 하안의 주에 소를 붙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 도가 없음을 탄식했다. 그러므로 만약 아침에 세상에 도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러므로 ‘좋다’(可矣)라고 하신 것이다. 진(晉)의 난조(欒肇)가 말했다. ‘도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서고 성인이 몸을 보존하는 것은 도를 행하기 위해서다.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도를 행하는 것이지 자신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도가 세상에 알려지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고 말씀한 것이다.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상심하시고, 또 자신은 세상을 근심하지 자신을 근심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歎世無道. 故言設使朝聞世有道, 故云可矣. 欒肇曰“道所以濟民, 聖人存身, 爲行道也. 濟民以道, 非以濟身也. 故云誠令道朝聞於世, 雖夕死可也. 傷道不行, 且明己憂世, 不爲身也.”] 


주자와 하안의 차이는 명백하다. 주자는 도를 추상적인 리(理)로 등치시켜 리를 깨달으면 죽을 수 있다는 갈망으로 이해했다. “살아서는 하늘을 섬겨 도리를 어기지 않을 뿐이나 죽어서는 편안하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다“(生順安死)라는 말도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서 가져온 관념성이 강한 말이다. 하안은 도를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알기 쉽게 정의했다. 공자가 말년이 되어 세상에 도가 실현된다는 말을 듣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발언이라고 했다. 도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공자가 발언을 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에 이르기까지 해석 차이는 뚜렷하다. 하안의 주가 이해하기 쉽다 해서 우수한 해석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 주자의 주가 관념적이어서 고원해 보여 철학적 심오함의 측면에서 무작정 높은 평가를 할 필요도 없다. 다만 주자 주(註)의 경우처럼 추상화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텍스트가 시공을 넘어 텍스트가 생산된 사회문화적 기원과 멀어진다는 점에서 절대언어를 추구하다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은 확실해 보인다. 주자는 『논어』 전체를 리(理)의 철학으로 일관되게 재해석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실질적인 말이었을 수도 있는 언어를 철학원리에 의해 추상화의 단계로 진입시켰다는 사실은 주자의 탁월함을 상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가치판단을 내려 주자의 옳고 그름을 따져보자는 게 아니다. 『논어』가 절대언어가 된 저변에는 주자의 해석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음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절대언어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절대언어화된 텍스트만큼 불행한 글도 없다. 심오한 혹은 위대한 가치라는 말에 눈이 멀어 숭상일변도로 읽기 때문이다. 그것은 올바른 읽기가 아니다. 지혜의 보고라는 휘황한 언사에 눈이 부셔 실상을 못 보는 위험성. 제대로 된 읽기일 리 없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논어』를 절대언어로 읽을 때 『논어』는 실천하는 책이 되지 못한다. 이 점 강조할 필요가 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는 비유가 『논어』만큼 절실한 경우도 없을 것이다. 공자는 말을 전한 게 아니다. 공자는 실행하라고 했다. 공자가 말을 잘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실행을 위한 최소한의 양식으로 발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죄다 공자의 말을 ‘읽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 공자의 말은 말로서만 존재하고 말에 갇히고 말았다. 내가 절대언어에서 가장 경계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사람들은 공자의 어록으로 『논어』를 읽고 언어는 도덕적 훈계로 땅에 떨어져 굴러다닌다. 언어가 체화됐다 한들 입에서 튀어나올 뿐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공자가 저술을 남기지 않은 까닭도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실행에 옮기는 언어가 되어야지 외우는 격언으로서, 그저 지혜의 말씀으로 후대에 전해져 영향력이 발휘되는 걸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저술을 남기지 않은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공자의 어떤 언어도 심지어 남에 대한 평가조차 좋은 경우는 그와 같이 행동하기를, 비판적인 때는 듣는 사람이 다르게 실천하기를 바라서였다. 공자의 말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실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공자가 말 잘하는 인간을 미워한 것도 언어와 삶(실행)이 분리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공자의 말은 수행적 언어(performative language)였다. 이 전제를 간과하고 잊는 순간 공자의 말은 귀양살이하는 언어일 뿐이다.   


그렇다면 절대언어가 된 『논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글_최경열(『기록자의 윤리 역사의 마음을 생각하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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