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mien Rice, 『O』
-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시절에 대하여
때는, 2000년대 중반, 나는 엉겁결에 취직을 했고, 회사에 적응을 못했다. 그러다가 대충 밥값은 할 수 있겠다 싶을 때쯤에는 연애에 실패했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너무 멀었다. 결국 자취를 하기로 하고, 방을 구하기는 했는데 역삼동의 월세는 너무 비싸서 룸메이트도 함께 구해야 했다. 어쨌든, 룸메이트도 방도 구하기는 구했다.
회사일이 손에 좀 붙었다고는 하지만,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고 별로 배우고 싶지 않은 것들을 계속 배워야 하는 삼중고는 끝나지 않았다. 와중에 당시 사귄 지 1년 좀 넘은 여자친구는 '안녕' 하고는 훌쩍 외국으로 떠나버렸고, 엄마나 대학시절의 선후배들과 통화라도 하고 나면 도무지 해소되지 않는 부채의식 같은 것에 휩싸이곤 했었다. 그런 날들이 쌓이면서 어쩐지 나는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이다. 계절은 겨울이었다. 분명 수요일에 출근을 한 것 같은데 퇴근은 금요일 밤이다. 흥청거리는 강남역 불빛을 바라보며 길을 따라 걷는다. 마침 길에는 진눈깨비마저 날린다. 룸메이트는 일주일 전쯤에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어딘가에서 술을 퍼마시고 있는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열 몇시간 만에 사람이 들어온 집은 썰렁하다. 의자에 가방을 던져놓고, 방바닥에 주저앉으면 방바닥에서 올리오는 냉기에 엉덩이가 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다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든다. 날이 밝아 뭐라도 사먹을까 싶어 밖으로 나가면 주말, '직장인'이 출근하지 않은 테헤란로는 황량하기 그지없다. 차도 안 다닌다. 쓸쓸하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한 것 같았다. 그 시절 내 인생의 OST가 바로 이것, 데이안 라이스의 『O』앨범이다.
대충 썼지만, 벌써 얼굴이 화끈거린다. 지금도 잔뜩 안고 사는 '자의식'이지만, 저때는 자의식을 빼고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자의식의 순도가 높았다.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너덜거릴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는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싶다. 정말이지 직장을 잡은 것은 '요행'에 가까운 일이었으니 사실상 공짜로 얻다시피한 '행운'이었고, 실패한 연애는 그 전에도 여러번이었다. 꿈에 그리던 독립마저 이루어냈으니 어느모로 보다 '불쌍할 리가' 없는 상태였는데……. 무엇보다 이제는 두번 다시 얻을 수 없는 '젊음'마저 있었다. 지금은 '청춘'이라는 말을 들으면 약간 민망한 기분이지만, 그 시절에는 '청춘은 단어가 조금 촌스럽지 않나'라고 느낄 정도로 젊었다. 뭐 그랬다.
Cold, cold water surrounds me now
And all I've got is your hand
Lord, can you hear me now?
- 데미안 라이스, 『O』, 「Cold water」가사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있듯이(?), 내가 그때 몹시 아팠던 것 같다. 짧디 짧은 영어듣기 능력으로 겨우겨우 알아들은 몇마디 가사들이 어찌나 가슴속을 심하게 후벼파는지, 자의식 과잉의 민망함과는 별개로 세게 느끼는 능력만큼은 절정이었던 것 같다. 이른바 '젊음의 특권'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낙엽 굴러가는 것만 보아도 웃음이 나는 시절' 같은 관용어는 그래서 생겨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길 정도니까, 반대로 낙엽 떨어지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나는 시절이다.
Stones taught me to fly
Love ‒ it taught me to lie
Life ‒ it taught me to die
So it's not hard to fall
When you float like a cannonball
- 데미안 라이스, 『O』, 「Cannonball」가사
1번부터 10번 트랙까지, 모두 그렇다.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 위로 진눈깨비 날리는 계절에, 젊은이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넘버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곡들을 지금 듣자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 여러 감정이 동시에 든다. 하나는 '지금 들어도 계절에 잘 어울리는 손색없이 멋진 음반이구나'류의 긍정적인 감정이고, 또 다른 한 종류는 '약간 아쉽다' 싶은 감정들이다. 이제는 막 쓸쓸하고, 가슴이 후벼파지고, 괜히 길바닥 눈물 뿌릴 것 같은 그런 기분은 전혀 들지 않는다. 외롭지도 않고, 쓸쓸하지도 않으며, 미래가 약간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 불안이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가버린 세월'이 못내 아쉽다. 지긋지긋한 감정의 과잉 상태였지만, 다시 그렇게 무언가 강렬하게 느낄 수 있겠느냐고 자문해 보면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로 돌아가겠느냐고 물으면 단호하게 거절할 것이다. 그 시절에는 그 세계를 가장 사랑했지만, 지금은 이 세계에서 사는 것이 가장 좋다.
음반이나 책이 아름다운 물건인 이유는 그런 식으로 한 시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데미안 라이스 본인도 앨범 부클릿에 인쇄된 리사 헤니건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면 '그 시절'이 떠오르지 않을까. 그 이유 때문에 본인의 1집 음반을 떠들춰보지도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영영 그럴 수는 없다는거, 우리 모두가 다 안다. 그 와중에 배우는 것이 있다면, '이불킥'을 할 정도로 민망한 일이건, 자랑스러운 일이건, 기쁘기 그지 없는 일이건 간에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면 저마다 다른 의미로 '괜찮은 일'이 된다는 진리다. 그런 '괜찮은 일'들이 가장 많은 시기는 역시 감정이 차고 흘러 넘쳐 터지던 시절이지 않을까? 아직 조금 민망하지만, 그건 시간이 덜 흘렀기 때문이리라. 앞서 말한 아쉬움마저 사라질 날이 오기를 바란다.
『O』 앨범이 '오!'한 이유는 b-side를 모은 CD 한 장이 더 끼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 음반을 사가지고, 포장을 뜯고 나는 '오!'했다. 정확하게는 '오얼~'했다. 요즘 나오는 음반에도 껴주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주지 않을까.
어쨌든, 앨범의 물리적 성질들만 놓고 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식의 구성이다. 언젠가는 규격화된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음반들을 좋아했는데, 이유는 그저 CD장에 정리하기가 편해서였다. 그러다가 문득, 점점 음반을 보고, 만지고, 펼쳐보는 재미가 사라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을 때부터 '종이 케이스' 음반들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아마 기계로 다 접겠지만, 종이를 접어서 만든 케이스에 든 음반들에는 세월의 흔적이 더 잘 남는다. 모서리가 닳은 정도를 보면 가방에 넣고 다닌 적이 있다는 이야기고, 낙서라도 있으면 조카놈이 만졌다는 이야기니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는 그렇게 남은 흔적들을 추적해보는 것도 재미난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요즘처럼 한번 들어온 CD를 밖에 가지고 나갈 일이 드문 세상에서는 요원한 일이지 않을까 싶지만 말이다.
여하간에, 청춘이든, 애매한 30대든, 어쩐지 걱정이 많은 40대든 '겨울'에 흠뻑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싶은 날 '앨범 전체'를 다 들어보시면 좋겠다.
유튜브 데미언 라이스 채널 바로가기 -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qPO7KIAdo5jgkXRJ1bag/featu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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