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렉스, [Electric Warrior]
- 들어본 적 없는 리듬, 걷기에 딱 좋은 리듬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의 제목 '20세기 소년'은 아시는 바와 같이 노래 제목이다. '20th century boy'라는 노래인데, 이 노래는 생각건대, 원곡보다 X-Japan이 부른 리메이크 버전이 한국에서 더 유명한 듯 하다. 그럼 원곡은 누구의 곡이냐, 오늘 소개할 티렉스의 곡이다. 만화가 자신이 '기타 연주'와 '밴드'에 도전하는 스토리를 그린 '논픽션'(?) 만화 『스트라토』에 따르면, 우라사와 나오키는 직접 밴드도 하는 등, 만화가들 중에서는 기타를 잘 치는 것으로 소문난 실력자라고 한다. 『20세기 소년』만 보더라도 '록덕후'들의 정서를 자극할 만한 코드들이 잔뜩 들어 있다. 우드스탁 라이브에 관한 켄지의 대사나, 밴드를 하다가 말아먹은 경험을 회상하는 에피소드나, 좋아하는 록넘버를 듣고 선 용기를 얻는 장면이라거나 그런 것들 말이다. 초반에 던진 떡밥들을 말끔하게 회수하지는 못했으니, '만화'로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록밴드의 생로병사를 그린 본격 밴드 만화 『beck』 만큼이나 훌륭한 '록' 만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이 참 길어졌는데, 그러니까 내가 티렉스를 듣게 된 계기가 『20세기 소년』 이었기 때문이다. 그 전에도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기는 하지만) '록의 역사'를 공부할 때 '데이비드 보위'와 함께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어서 '이름만'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걸 어디 '안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록 밴드'를 안다 함은 그 밴드의, 뭐랄까 '스타일'을 흡수하는 것이며, 어딘가 영혼 한쪽이 그 '스타일', 그러니까 음악과 외모와 제스쳐와 기타등등으로 적셔져야 하는 것이다.
티렉스는, 말하자면 마크 볼란의 프로젝트 밴드다. 마크 볼란은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리스트다. 그렇지만 사실 나에게 준 첫인상은 '답답함'이었다. 목소리도 웅얼거리고, 기타소리는 고장난 라디오에서 나오는 잡음 마냥 붕붕 날리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뭐, 일단 내가 '글램록'이라고 이름 붙은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이유도 큰 영향을 주기는 했다. 무언가 '록'은 원래 좀 '원초적'인 건데 '허식'이 많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다. 많은 친구들이 좋아하던 일본의 '비주얼 록'을 보면서도 '흥' 또는 '헐' 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뭐 지금은 어떤 록도 '허식'이 없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평상시의 보관 상태 그대로 찍은 재킷 사진이다. 요즘은 그러지 않지만, 예전에는 음반의 비닐포장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버릴 수가 없었다. 저런 식의 광고 문구가 프린트된 종이 쪼가리여도 '모두 보관'이 원칙이었던 셈인데, 도대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책에 둘러진 띠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계산 끝나면 그 즉시 가장 가까운 쓰레기통에 버리는데……. 그리하여 'most wanted' 종이가 케이스 안에 들어가 있게 된 것인데, 막상 보관해 놓고 보니 여전히 버릴 수가 없다.(요즘은 CD도 잘 사지 않지만, 사더라도 저런 건 즉시 버린다. 그냥 두면 점점 더 못 버린다는 걸 안다.)
종이에 가려진 부분을 빼고 온전히 드러난 재킷 이미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재킷 이미지 중에 하나다. 2단으로 서 있는 마샬 앰프, 그 앞에서 깁슨 레스폴을 들고 연주에 몰두하는 마크 볼란 그들을 감싸고 있는 노란 빛, 마침 앨범 타이틀은 'Electric Warrior'다.(마샬 앰프와 깁슨 레스폴은 종교와도 같다.) 앨범 타이틀과 재킷 이미지가 이렇게 잘 맞아 떨어져도 되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직관적'이다. 다만, 이 이미지만 보자면, 굉장히 파워풀한 사운드로 앨범이 가득 차 있을 것 같지만, 그건 또 그렇지가 않다. 아마 그랬다면 노란 빛이 사방으로 막 뻗치고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납득이 가기도 한다.
여하튼,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사운드 코드를 꼽으라 한다면 '그루브'를 꼽겠다. 이게 참 독특한 점인데, 사실 이 리듬감은 어디에서도 들어본 바가 없는 리듬감이다. 블루스맨들이나 펑키한 사운드 표방하는 밴드들의 그것과도 다르고, 여느 로큰롤 밴드의 그것과도 다르다. '묘'하니까 뭐라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음반을 들으면서, 특히 요즘에서야 부쩍 깨닫게 된 바가 있는데, 이른바 '음악'에 있어서 독특함이랄지, 차별점이랄지 그런 다른 것과 구분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바로 '리듬'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처음에 들었을 무렵이야, '이야 이거 막 로큰롤로큰롤 하겠지'하는 기대를 품고 들었으니, '시시하군' 싶은 반응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는데, 들을수록 '이거 뭔가 다르다' 싶은 요소가 계속 나타나는 것이다. 그때 '이거 뭔가 다르다' 하는 그 '다름'이 바로 마크 볼란의 기타 리프가 만들어 내는 리듬감이었다. 특히 1번 트랙의 'Mambo sun'이나, 'Get in on' 같은 곡들을 들어보면 그런 점이 더욱 잘 느껴진다. 아! 그러고 보니 'Get it on'은 오아시스의 1집에 수록된 곡인 'cigarettes & alcohol'의 리프와 똑같다. 사실상 노엘 갤러거가 대놓고 베낀 것인데, 사람들이 이걸 문제삼자 그가 한 말,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어디있음?'이었다나 뭐라나. 감추려는 노력도 없이 워낙에 대놓고 한 짓이어서 오히려 벙찔 정도인데, 기왕에 할 표절이라면 그 편이 더 나은 것 같기도…….
요즘 나는 이동 중에 딱히 들을 게 없으면 이 음반을 듣는다. 마침 애플뮤직에는 리마스터 버전도 올라와 있어서 귀도 아주 즐겁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로큰롤의 비트가 인간의 심박수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이 음반이 딱 그렇다. 'Get it on'이 나올 때 슬슬 걷다 보면 곡의 리듬감 내 발걸음부터 신체의 리듬이 동조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한다. 그게 참 짜릿하다. 많은 록 음악들이 한참 달리기를 하는 신체, 흥분 상태의 신체와 동조되는 느낌이라면 이 음반은 걷거나 가볍게 몸을 흔들 때의 리듬과 참 닮은 점이 많다. 어쩌면 그래서 독특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마크 볼란은 자타 공인 '톨키니스트' 였다고 한다. 하여, Electric warrior 앨범을 만들 때에도 맴버들에게 『반지의 제왕』시리즈를 모두 읽고 녹음작업을 시작하자고 요구하였다는데, 그 소리를 듣고 나니 나는 '같은 팬'으로서 호감도가 급상승하였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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