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 '나'를 변화하는 시간 속에 던지는 일
생명은 오로지 잠재적인 것들만을 포함한다. 즉 생명은 잠재성들, 사건들, 특이성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잠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실재성을 결여한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잠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잠재적인 것 고유의 실재성을 그에게 부여하는 [내재성의] 평면을 따라가면서 현실화의 과정 속에 뛰어드는 어떤 것이다. 이때 [현실화의 과정 속에 뛰어드는] 내재적인 사건은 내재적인 사건 자신을 [현실의 차원 속에] 도래하도록 하는 사물들을 상태와 체험된 상태 속에서 현실화 된다. 달리 말하자면 내재성의 평면이 한 대상과 한 주체에 스스로 할당된다고 할 때, 바로 그 한 대상과 한 주체[즉 내재성의 평면으로부터 비롯되지만 내재성의 평면에 대해서 초월적인 것으로 고려될 현실적인 한 개별 대상(사물들의 상태)과 한 개별 주체(체험된 상태)] 속에서 내재성의 평면 그 자체가 현실화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건들이 이처럼 사건 자신들의 현실화와 아무리 분리가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내재성의 평면을 채워나가는 사건들이 잠재성들인 한에 있어서, 내재성의 평면 그 자체는 잠재적일 수밖에 없다.
질 들뢰즈, 박정태 옮김,『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내재성... 생명」(516-517쪽)
어떤 책은 읽는 내내 모르는 채로 읽어가야 한다. 모르는 채로, 문장이 일으키는 번개를 그대로 맞아가면서 읽어야 한다. 여기서는 '이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책에 대해 '이해'한다는 건 앎의 '중심'을 전제한다.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펼쳐진 부분들은 '중심'을 재현한다. 어딘가 익숙한 모델 아닌가? 자기 전개의 도식으로 세계의 발생과 전개, 종말을 아우르는 헤겔의 체계, 이데아로부터 실재를 끌어내는 플라톤적 세계, 오이디푸스로 욕망 일반, 욕망 그 자체를 아우르는 정신분석, 구조주의 모델, 당과 인민, 전위와 대중...... 이 익숙한 중심과 부분의 재현 체계가 문제다. 동일시, 죽음 충동, 그램분자적 집단화, 세계에 대한 통계적 표상 따위의 바탕엔 그러한 '재현의 질서'가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무엇을 읽든, 겪든 그 일이 매끄럽게 이해된다면, 아무런 꺼림칙함이 없다면, 거기서 멈추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 신체가, 내 정신이 열심히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진짜 나를 변화시키는 텍스트나 사건은 결코 한번에 이해되지 않는다. 아니, '이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크다. 너무 크기 때문에 언제나 잠정적으로만 이해될 뿐이다. 물론, '삶'은 바로 그런 '잠정적인 것' 위에 구축된 것이기 때문에 매번 꺼림칙하고, 매번 주체가 변형되고 그럴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끔하게 이해된 것보다 잠정적으로 정리된 것 밖에 남아 있는 알 수 없는 것들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여기'에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다음' 또는 '그 너머'를 만드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는 그것들이 저 바닥, 심층에서 '잠정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평면이기 때문이다.
한가득 번개를 품고 있는 책들은 바닥에 흩어진, '이해' 속에 들어오지 못한, 재현 불가능한 것들을 요동치게 한다. 그때까지 알아왔던 것들,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 질서잡힌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다음으로 가기 위해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주체가 변하는 건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책을 읽는다는 건 허구적인 '나 다운 나', '진정한 나'를 지키거나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굳고 딱딱해져서 그저 깨지기만 하는 나를 재탄생시키는 일, 그것을 가속화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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