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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의 윤리』- '듣기'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

by 북드라망 2020. 4. 22.

'듣기'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



“다가오는 모든 이방인-타자들에게 묻지도 판단하지도 않고 온전히 피난처를 개방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절대적 환대라는 윤리적 요청은 생존을 내어놓을 만큼 위험해 보이고 또 그래서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환대의 행위가 자기 배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모든 만남의 장소에서, 모든 관용의 공간에서 절대적 환대는 살아 있어야 한다. 절대적 환대는 불가능하면서도 가능해야 하고, 현전하지 않으면서 도래해야 하고, 경험할 수 없는 경험으로 경험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 환대의 이념은 곧 정의다.”

- 김애령, 『듣기의 윤리』, 205쪽




올해로 마흔이 되었다. 젊다고 하기엔 늙었고, 늙었다고 하기엔 여전히 젊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애매한 나이여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되었는지 요즘들어 종종 생각해 보곤 한다. 스무살에서 서른까지, 서른에서 마흔까지, 10년 단위로 내가 많이 바뀐걸 느낀다. 그동안 경험해 온 것들, 읽어온 것들, 해낸 것들이 모여서 이렇게 된 것일텐데, 그 중에서 가장 크게 바뀌어온 것이 있다면, 예전에 비해서 ‘확신’을 갖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는 점이다. 그렇다보니 스스로 느끼기에 말도 많이 줄었다. SNS도 하지 않는다. 


예전엔 이렇게 저렇게 확신을 가지고 해 나가면 세상이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바뀌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사람’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이 옳은 생각과 다르게 생각하는 건 미성숙한 것이거나, 악의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내 힘으로 돌려놓고, 윽박질러서라도 제 길로 가게 만들어야 했다. 당연히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을리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절대 나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나는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그렇다. ‘듣기’는 정말이지 어떤 ‘능력’의 문제다.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말하게 하는 능력, 그 말을 그것 그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그 말을 하나의 힘으로 받아들이는 능력, 그런 ‘능력’이다. 내가 오랫동안 조금씩 상실해 왔고, 상실했음을 깨달은 후에 힘겹게 복원 중인 능력이다. 


세상에 말들이 넘쳐난다. 저마다 확신을 가지고 사태를 평론한다. 나는 그런 말들의 홍수가 정말이지 지겹다. 그 속에서 ‘내 말만이 옳다’는 확신을 보기 때문이다. 거기엔 ‘듣기’ 위한 자리가 없다. 그래서 비슷비슷한 말들끼리만 뭉쳐있다. 거기서 ‘말할 자격’은 얼마나 설정된 ‘옳음’을 잘 모사하고 있는지에 따라 분배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것들은 사실 말이 아니다. 말이 되려면 저편으로 갈 수 있어야 하고, 이 편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하니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건 정말 ‘능력’의 문제다. 한 사회가 얼마나 많은 ‘다른’(다르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안고 있을 수 있는지, 이질적인 말들이 진실로 ‘말’이 될 수 있게끔 하는지, 바로 그런 것들을 해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게 내가 ‘정의’라는 말을 통해 떠올리는 것들이다. 더 많은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으리라. 그건 ‘권리’를 준다/안 준다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이유로 올해 마흔이 된 나는 여전히 남아있는 마음 속의 ‘확신’ 회로를 없애려고 노력 중이고, 되도록이면 더 들으려고 한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기도 한다. 매일 마음 속에서 ‘절대적 환대’ 비슷한 일 일어나기도 한다. 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이를 보다보면 세상에 진짜 옳은 일이라는 게 그다지 없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자아가 줄어든 자리에 더 많은 ‘다른 것’들이 끼어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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