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

페터 한트케,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 과거는 사라지지 않지만, 떠날 수는 있다

by 북드라망 2020. 2. 17.

페터 한트케,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 과거는 사라지지 않지만, 떠날 수는 있다


““여기 다시 온지 얼마 안 돼서 그래”하고 나는 그가 가고 난 뒤 혼잣말로 소리쳤다. 외투를 걸친 채 욕실로 들어가 나 자신보다는 거울을 더 들여다보았다.”(14쪽)




‘혼잣말’에는 전제가 있다. ‘말’이 사실은 ‘상호적’이라는 전제다. 그럴 것이 ‘말’은 ‘의미’의 묶음이다. 그래서,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전달 받는다. 이를 두고 ‘소통’이라 부르는데, 이 시도는 대개는 실패한다. 오죽하면 정치인이고 연예인이고, 세상 전부가 ‘소통하자’고 달려든다. 다시 ‘혼잣말’을 살펴보자. 1인칭 화자(이하 주인공)는 소설의 3/2, 그러니까 클레어와 베네딕틴 모녀를 만나기 전까지 끊임없이 혼자 말한다. ‘말’을 상호적인 의미 꾸러미라고 보자면 주인공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셈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소설 전반부에서 주인공의 자아가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렇다면 어째서, 이러한 ‘분열’이 일반적인 일이 된 걸까? 문제는 자본주의적 '소유'가 아닐까? 인류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이래, 인류 각각이 가진 소유물은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그래서 우리의 집은 생활의 공간임과 동시에 소유물의 저장고, 말하자면 창고가 되어버렸다. 거기에는 어린 시절부터 그때까지 쌓아온 온갖 물건들과 거기에 얽힌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우리가 어떤 기억, 특정한 심상, 어딘지 모르게 답답한 일상과 결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주인공의 여행도 마찬가지, ‘긴 이별’을 위한 것이었다.


주인공이 찾고자 하는 전 부인 유디트는 주인공보다 앞서 이미 그 길을 떠났다.(내게는 그렇게 읽힌다) 19세기 또는 그 이전부터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주인공의 여행이 가지고 있는 성격은 더욱 명백해진다. 말하자면 그곳은 ‘신대륙’, 자신의 기억이 온전히 저장되어 있는 ‘구대륙’을 뒤로하고 이른바 ‘새출발’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 ‘꿈’(American dream)의 공간인 셈이다. 주인공은 대륙을 횡단하며 끊임없이 꿈을 꾼다. ‘자연’(어떠면 유럽, 구대륙)으로부터 받았던 억압, 유디트(과거의 갈등)를 죽이는 꿈, 새로운 관계에 대한 희망(클레어와 베네딕틴)까지. 


다른 의미로 보자면 주인공은 제 삶의 토대로부터 추방당한 것 일수도 있겠다.(“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 이 짧은 편지는 퇴거명령서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비행기표이기도 하다. 도저히 지금의 생활공간에서 버티고 있을 수 없게 만드는 언표이기 때문이다. 


‘긴 이별’의 과정 속에서 주인공은 혼잣말을 잃었다. 그와 동시에 ‘말’ 자체를 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새로운 말을 배워야 한다. 존 포드는 아마도 그런 인물이 아닌가? 그는 그의 필모그래피 속에 느껴지는 아메리카에 대한 애정을 보자면 그는 신대륙의 언어, 거기에 응축된 ‘아메리칸 스타일’의 담지자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이 그 언어 속에 섞여들 것 같지는 않다. 분열된 ‘나’를 ‘우리’로 바꿔치기 한다고 해서 그 분열이 해소되지는 않을테니까 말이다. 차라리, 나라면, 어떻게든 분열을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일 듯하다. 그게 ‘타자’와 화해하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 10점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문학동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