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드라망은 21세기 유례없는 세계적 감염병의 대유행 시대를 지나며, 전자책 한 권을 기획했습니다. 타인이 공포와 불안이 된 이 시기야말로 우리가 책을 읽고 사유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상이 깨진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철학'할 수 있는 적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자책은 다음주 말쯤 선보일 예정이지만 그 가운데 청년 분 두 분의 글을 먼저 맛보기로 선보여 드립니다. 북드라망 독자 여러분의 많은 기대를 부탁드립니다.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질병 속 자유!
글_이호정(남산강학원)
21세기에 ‘전염병’이라니?
난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에 속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능숙하게 다루며, 정보의 바다에서 유영을 하다못해 종종 허우적~대기도 하는 최신 인류의 일종이다. 이 최신 인류에게는 ‘인류의 위대함’이라는 정보가 셋팅되어있다. 학교 다닐 적에 아침밥을 먹으려고 테레비 앞에 앉으면, 이런 내용의 뉴스가 흘러 나왔다. ‘새로 개발한 항암치료로 생존율이 4배나 뛰었다는 기쁜 소식이….’, ‘유전자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의학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땐 정말, 티비 너머에 있는 하얀 가운 입은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우린 정말 어쩌면…신(神)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그런데, 아뿔싸! 21세기 들어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전염병’이다. 그것도 판데믹(pandemic) 급의 슈퍼 전염병…! 아니, 전염병은 진즉에, 20세기에 끝났어야 하지 않나? 우리 인류는 이제껏 무수히 많은 병들을 정복해왔는데! 현대 기술 문명이 눈부시게 발달한 21세기 ‘호모 데우스’로 향하고 있는 우리가, 고작 전염병 따위에 발목이 잡혀서야 쓰겠냔 말이다.
코로나19가 우리의 코앞까지 쳐들어온 덕에, 현대 의학과 인류에 대한 나의 무한한 기대에 갖가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 사태를 어찌 바라봐야 할지 난감해하는 차에, 마침 근영샘의 『사람은 왜 아플까』를 만났다.
그렇기에 독일의 철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건강은 자기 망각이라는 놀라움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아픔은 그 자기 망각이 깨지는 때입니다. 아픔이 찾아와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신근영, 『사람은 왜 아플까』, 낮은산, 9쪽)
책에서 말하는 ‘아픔’의 문제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과도 일맥상통한다.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는 우리의 삶에 아픔으로 인한 충격과도 같은 균열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자기 망각이 깨지는 때’를 만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까?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역시 현재의 코로나 사태는 ‘인류가 맞이한 글로벌 위기’이며, ‘전지구적 사회 체계 변화의 분수령’으로써 작용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잊고 살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됨으로써, 과연 우리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
나는 현대 의학을 철썩 같이 믿고 살아왔다. ‘병’이란 것에 대해 의학이 제시하는 것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이런 사태를 만났을 때, 몹시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이 병은 뭐지? 운 좋게 걸리지 않길 바랄 수밖에 없는 건가….’, ‘마스크는 언제쯤 벗을 수 있을까? 오늘따라 머리가 좀 아픈 것 같은데, 자가격리를 해야 하나..’ 이런 내게 ‘병은 제거하면 된다!’는 간단명료한 논리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제n차 세균대전
병을 대하는 거만한 태도는 최신 인류인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왜 아플까』에서는 19세기 말에 ‘세균’이 ‘보이지 않는 적’으로서 출현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우린 ‘세균’이란 말에 익숙하다. 우리 몸에 열과 기침을 유발하는 게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미생물의 소행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몇 종류의 미생물들만이 발견되었을 뿐인 19세기에, 그런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당시에 미생물은 그저 쬐끄맣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보잘 것 없는 것에 불과했다.
미생물의 엄청난 위력을 처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준 사람이 바로 화학자 ‘파스퇴르’다. 어느 날 그에게 ‘술이 자꾸 상하는데 좀 도와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그는 앉아서 문제의 ‘병든 술’을 차분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술의 부패를 일으키는 ‘나쁜 미생물’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여러 실험 끝에 그는 지금도 유명한 ‘저온살균법’을 통해, 술에 도움이 되는 좋은 미생물은 살려두고 나쁜 미생물만 없애는 일에 성공한다.
오호~ 그런데 파스퇴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미생물이란 놈이 술을 상하게 한다면, 사람 몸도 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직관적으로(!) 떠올린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그의 연구는 엄청난 데까지 나아간다. 당시 유행하던 탄저병의 ‘탄저균’을 발견해낸 것이다! 인류사에 점수를 주는 기계가 있다면, 탄저균 발견은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보다도 높은 점수가 매겨지지 않을까 싶은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그 뒤로 인류를 무차별적으로 폭격하던 콜레라, 말라리아, 결핵 같은 역대급 질병들을 일으키는 미생물들이 속속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인류는 자손의 무한 번식을 막는 훼방꾼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하하하, 호모 사피엔스의 대승리!
이제 질병의 주범은 바로 이 ‘세균’이란 놈인 게 밝혀졌다. 별 것 아닌 줄 알았던 미생물이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마 같은 존재”(같은 책, 69쪽)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이로써 인류는 그 악마에게 전면전쟁을 선포한다. 세균대전, 그것은 엄청난 양의 살균 소독제 대포와 백신 수류탄, 예방 주사 바리게이트 등을 동원한 총력전이었다. 그리하여 기세등등했던 질병 어벤져스들은 너도나도 손 흔들며 항복을 외쳤다. 인간을 100만, 아니 1000만 단위로 죽게 한 병들이 인류의 손에 의해 정복되다니, 그 성취감은 아마 하늘을 찌를 정도로 통쾌했을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성취감, 그 드높은 자긍심은 21세기를 사는 나에게로까지 이어져왔다. 병은 ‘제거될 수 있다’는, 아니,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그렇게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또한 그것은 ‘위생 관념’을 생활화 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우리는 나쁜 일이 생기면, 그 사건을 일으킨 범인을 찾아내고 싶어 합니다. 범인을 색출해서 없애 버리면 사건이 끝난다고 믿기 때문이죠. 병원체는 질병에 있어서 그런 범인이었습니다. 질병의 주범이 미생물임을 알았으니, 비록 지금 당장 그놈들을 퇴치할 수는 없다 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같은 책, 95쪽)
우린 질병을 ‘잡아서 없애야 하는 범인’ 정도로 생각한다. 아직 백신이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우리의 방법 역시, 바이러스를 모조리 ‘차단’하고 ‘쓸어버려야 한다’는 위생 관념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믿음 위에서 우리는 병원체가 지나간 곳을 봉쇄하고, 대량의 소독제를 투하하며, 병원체를 몸에 지닌 사람들을 철저하게 격리시킨다. 아니, 몸에 지녔을지도 모를! 사람까지도~
이렇게 하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분명히 조만간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렇게 사스가 지나갔고, 메르스가 지나갔다. 하지만…‘또’ 코로나다. 이럴 수가! 게다가 이번엔 엄청난 전염력과 함께 왔다. 그렇담 이 다음의 ‘또’는 또 어떤 놀라운 스펙을 장착한 놈이 될까? 그때에도 우리는 그 병이 우리를 어떻게 만들고 있건 간에, 그놈이 ‘제거’되기를 기다리고만 있어야 할까? 단지 그 병에게만 모든 책임을 덧씌우고, 나는 가만~히 앉아 하루 빨리 이 불운한 일이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출구 없는 세균대전이 만드는 삶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질병들을 극복해왔고, 그것에 우리의 삶이 잠식당하지 않을 자유를 얻었다. 그건 분명 어떤 의미에서 인류의 승리이자 대혁명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코로나19 이상의 어퍼컷을 또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이게 과연 ‘자유’인지에 대해 심히 강도 높은 의심이 든다. 혹시 우리가 얻은 건 ‘싸움을 계속할 자유’가 아니었을지? 『사람은 왜 아플까』에서는 이런 식의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소개한다.
위생 관념은 수많은 장점들과 더불어 우리 삶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타자와의 접촉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됩니다. 내가 아닌, 내 외부의 모든 것들을 위험으로 인지하는 것. 그래서 철저하게 타자를 배제하고 나를 지키려 드는 것. (같은 책, 125쪽)
위생 관념과 함께 우리의 삶에는 새로운 길이 났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타자와의 접촉을 두려워’한다. 실제로 코로나19가 창궐하자, 우리에게는 길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잠재적 감염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왜, 요새 사람들이 자주 하는 푸념 있잖은가. “갑자기 코가 간질거려서 재채기 한번 했는데,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어요.-.,-;”
대한민국 정부는 현재 나름 훌륭한 방역 체계를 실현하고 있다. ‘세계적 방역 모델의 모범’이라는 외신 보도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참이다. 국민들과 투명한 정보를 공유하며 소통 중이고, 질본과 의료진들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이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국민들도 신뢰 속에서 협력하고 있다. 그건 정말 놀라운 지점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앞으로 국가와 국민의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다양한 논의거리가 제공될 수 있는 귀중한 사례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싸움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언제까지, 대체 어디까지 바이러스라는 타자를 ‘배제’할 텐가? 바이러스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옆 사람을 ‘차단’하고 있다. 마스크로, 시설격리로, 휴교로! 이러다가 나중엔 아예 옆 행성에까지 격리시킬 기세 아닌감?
격리 자체가 문제라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병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를 보자는 거다. 근대 이후 우리는 점점 더 타자와 내 삶을 분리시키고 있다. ‘내’가 아닌 외부의 것들을 ‘위험’으로 바라보고, ‘배척’하려 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겐 ‘나만의 것’들이 점점 더 늘어간다. 네모난 아파트 속 수많은 칸막이, 나만의 공간, 나만의 취향, 나만의 시간…선택받은 민족인 나와 다른 유대인…자국민이 아닌 피난 온 외국인…. 지금 이 시간에도 나와 타자의 선은 무수히 그어지고 있다.
분명 우리는 질병을 피할 수 없다. 슈퍼슈퍼 코로나n은 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가 그 병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정녕 다른 이를 밀쳐내고 나를 지키는 일밖에 없을까? 출구 없는 질병 앞에 선 우리에게, 다른 ‘자유’는 없는가아아~~!
사람은 왜 아플까?
다시, 이 책의 표지에 커다랗게 찍혀있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은 왜 아플까?” 그 질문을 풀기 위해 이 책의 마지막 목차에서는 ‘어떻게 아플 것인가’를 그려내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의 이야기, 폴리오라는 소아마비에 걸려 평생을 두 다리의 고통과 함께 살아온 가다머라는 철학자의 삶을 함께 더듬어보자.
그 역시 처음엔 병의 고통으로 인해 외부 세계를 향한 문을 꽝 닫았다. 그러자 그는 ‘혼자 있다’는 고립감에 떨기 시작했다. ‘세상에 홀로 있는 느낌.’ 하지만 그는 이내 ‘나’라는 존재와 처음으로 ‘접속’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건강할 때와 달리 두 다리를 쓸 수 없다보니, 온 몸의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어떻게 움직이면 좋을지 몹시 집중을 한 바로 그때 생긴 일이다.
고통이 열어준 이 세계는 우리에게 낯섭니다. 아프기 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모든 것들이 서걱거리며 다가옵니다.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고, 이렇게 움직여야 하는지, 저렇게 움직여야 하는지 매번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야말로 내 행동 하나하나가 질문이 되어 돌아옵니다.…이 물음들 앞에서 외부 세계는 나의 행동 하나하나와 관련지어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나는 나라는 개체가 가진 지평을 넘어 타자를 포함한 보편적 존재와 삶으로 나아갑니다. 거기에는 나와 분리된 외부나 타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외부로 열린 문이 곧 나를 향하는 문이 되고, 세계는 하나의 총체성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같은 책, 202쪽)
‘고통이 열어준 세계’, 이건 지금 우리의 상황에도 잘 들어맞는 말이다. 위기의 시국에서 개인들은 지금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여느 때보다 신중을 기울인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정답’이란 게 주어져 있지 않다 보니, 나라별로 자국 상황에 맞게 이런 저런 방법을 시도한다. 학사 일정에 그토록 보수적인 학교 역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코로나19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풍경들이다.
나 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나를 스쳐간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한 국가가 취한 방역 체계가 훗날 전 세계에 새로운 국민-국가 관계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면? 학교의 개학 일정에 따라 수백 만 학생‧교사들의 생활이 좌지우지 되고 있다면? 코로나19 사태 아래에서 지금 우리는 전 세계적, 전 방위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건 정말로 귀중한 경험이다. ‘나’라는 개체의 지평을 단박에 뛰어넘어 나를 세계(타자)로 열어놓을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지금 우리를 팽팽히 잡아당기고 있다. “고통은 바로 우리를 그 질문이란 것으로 내몹니다.”(같은 책, 204쪽) 디지털 시대의 판데믹은 인류와 인류, 인류와 자연, 인류와 질병이 이어져있다는 걸 정말로 생생히 느끼게 한다. 그 느낌은 자연스레 우리를 ‘질문’으로 내몰아간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런 질문을 계속 그리고 더욱 활발히 던질 때만이, 피할 수 없는 질병 속에서 우리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길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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