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이반 일리치 外, 『전문가들의 사회』 나의 역량은 관리될 수 없다

이반 일리치  外, 『전문가들의 사회』 

나의 역량은 관리될 수 없다 


글_정건화(규문)



1. ‘위기’ 속에서 느끼는 무기력


걸어서 5분 거리의 연구실과 자취방 사이를 오가며 생활하는 내게는 사실 코로나의 위협이 절실히 다가오지 않았다. 운이 없어서 감염된다 한들 심한 감기 정도일 거라 생각했고, 사스나 메르스보다 치사율이 낮고 증상도 가벼워서 바이러스 자체보다도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의 확산이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어느 학자의 인터뷰에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또 근래 들어 인수공통 감염병이 유행하게 된 것이 무차별적인 개발로 인한 야생동물 서식지의 파괴로 인간과 야생동물의 접촉이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읽고는 ‘옳거니, 작금의 사태는 인간의 지나친 탐욕에 대한 대가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마스크를 사재기하거나 혐오와 단죄의 대상을 찾아 자신들의 공포를 상쇄하려는 듯한 모습에 피로감을 느꼈다. 미디어의 지나친 호들갑과 사람들의 과잉반응. 이게 코로나 사태에서 내가 견지한 입장이었다.




그런데 지난달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아 국내 확진자가 급증하고 미국과 유럽 등 세계 각지로 바이러스가 확산되기 시작하더니, 프리미어리그가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비롯해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마스크도 안 쓴 채 버스에 오른 나는 살해협박에 가까운 눈총 세례를 받으면서 조금씩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바이러스의 객관적인 위험도와 무관하게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진짜’였다. 면역력이 낮은 노년층이나 중환자들에게 그것은 목숨이 걸린 문제로 다가올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공포를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바이러스의 여파로 우리 연구실도 한동안 모든 세미나를 중단해야 했고, 함께 공부하는 학인들도 각자의 두려움을 안고 있음을 알았다. 


이 ‘위기’ 앞에서 난 무엇을 해야 할까? 혹자는 우리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사태는 결코 일시적으로 끝날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코로나는 영화에서나 보던 판데믹의 위협을 우리 모두의 무의식에 아로새기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제 점점 더 대면관계를 기피하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 등의 거대 기술기업들이 때 아닌 호황을 맞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소식은 앞으로 우리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펼쳐지게 될지를 상상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경제학자들은 이번 사태로 인해 1929년 대공황을 넘어서는 거대 규모의 경제위기가 초래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문제는, 이런 공포 어린 전망 앞에서 내가 느끼는 무력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겪게 될 이 항상적 ‘위기’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정녕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철저히 마스크를 챙겨 쓰고 열심히 손을 씻고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질병관리본부가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는 걸까? 


이런 고민 속에서 이반 일리치의 『전문가들의 사회』(1977)를 읽어보려 한다. 자신의 도반들과 함께 쓴 이 책의 첫 페이지에서 일리치는 20세기를 “인간을 불구화하는 전문가 시대”(13쪽)라고 명명한다. 일리치의 비판은 근본적이다. 개개인의 전문가들이 아무리 선한 의도와 출중한 역량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전문가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한 우리의 존재는 왜소해지고 삶은 평준화되며 삶의 역량은 마비될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가 삶에서 겪게 되는 무수한 문제들이 그러하듯,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위기 또한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구원을 외부에 내맡기고 제도나 전문가의 해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위기’를 근본적으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면 위기의 노예가 되지 않고, 위기 속에서도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갈 수 있을 것인가?  



2. 인간을 불구화하는 전문가 시대


한국의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 국면에 접어드는 동시에 유럽과 미국 등에서 뒤늦게 바이러스가 확산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공격적이고 신속한 한국 정부와 질병관리본부의 대응을 세계적인 모범사례라며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분명 한국 정부의 대응이 훌륭했던 건 사실이다. 그동안 내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얼마간은 정부의 그런 노력 덕분일 거다. 그리고 여기에 무수한 의료 종사자들과 공무원들의 노고가 스며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좀 불편하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제도적 관리를 우리 자신의 안전 또는 행복과 동일시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더욱 철저한 ‘관리’를 욕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외국인 입국을 막지 않는다며 정부를 비난하는 보수세력들과 성공적인 방역에 환호하는 진보세력들.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양 진영은 공히 더 엄격하고 더 많은 관리와 통치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관리와 통제를 자발적으로 내면화하는 중이다. 재빠르게 정보를 습득하여 자발적으로 제도와 전문가의 지침을 따르는 ‘스마트한’ 시민이 되고자 하며, 그렇게 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까지 한다.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 집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지냈다는 몇몇 확진자들의 사례는 감동적인 미담처럼 전해진다. 물론 바이러스 확산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부의 지침을 충실히 따르고 전문가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는 것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시민’으로서의 의무다. 다만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답답함은 우리가 더 철두철미한 ‘관리’를 요청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제도나 전문가에 의한 관리를 욕망한다는 것, 관리를 내면화한 주체가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전문직의 군림을 공적으로 용인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사건이다.”(이반 일리치, 『전문가들의 사회』, 사월의 책, 26쪽)


일리치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주장을 펼친다. 배움을 얻기 위해서 교사를 찾고, 몸이 아플 때는 의사에게 가고, 환경문제는 환경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전문지식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일리치가 그들의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전문가들의 지배를 공인할 때 필연적으로 그들의 앎과 권력이 우리의 삶을 강제적으로 인도하게 된다는 점이다. 일리치가 정의하는 바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전문가란 자신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필요를 사람들에게 강제적으로 부여하는 자다. 


예컨대 교사는 누가 무엇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를 결정하고, 그럼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교육 서비스에 대한 동일한 필요를 부과한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서 정상적인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 서비스에 대한 일정한 양의 필요를 채워야 한다. 때문에, 전문가의 인도에 따른다는 것, 그들의 돌봄과 관리를 욕망한다는 것은 단순히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편이를 취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리치는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욕망하고 그들의 관리에 자신을 맡기는 순간 우리가 그들이 부여한 ‘필요’를 내면화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참으로 많은 필요들을 지니고 있고, 이러한 필요들은 각종 전문가들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리고 필요들을 충족시키는 과정에 우리의 능동적인 행위가 개입될 여지는 거의 없다. 전문가가 제공하는 서비스와 상품을 수동적으로 소비하고, 그들의 판단에 자신을 내맡긴 채 고분고분 지시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전문가들의 지배 하에서 우리는 “계산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부여할 수 있는 필요”(29쪽)를 지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전문가들의 돌봄 없이는 무엇도 할 수 없는 불구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엇도 깨닫지 못하고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는 존재. 이것이 전문가들의 지배하에 놓인 우리들의 모습이다. 


전문가들의 인도 하에 우리는 점점 더 평균적이고 예측가능하고 통치가능한 존재가 되어간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우리는 의료 전문가들과 행정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팩트’에 입각하여 일상의 행위를 조직한다. 매일 업데이트되는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확인하고, 감염되지 않기 위해 전문가들의 조언과 지침을 따른다. 그러나 그러한 통계와 전문가들의 견해를 충실히 수용한다 해도, 끊임없이 변이하면서 주기적으로 도래할 바이러스와 공존하며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사유에 이르게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정보에 노출될수록 공포와 불안, 그리고 전문가들에 대한 의존은 더욱 강화된다.


지금 한국은 진정국면을 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커다란 변수가 없는 한 수개월 내에 당장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우리는 코로나 사태가 초래한 경제 위기를 해결해줄 경제와 행정 전문가의 관리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는 3~4년 주기로 유행하는 신종 바이러스 전염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전문가가 등장하지 않을까? 당장만 해도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를 들이대며 만연한 불안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고립감을 치료해주겠다는 사회 심리 전문가들이 틈새시장을 노리고 있다. 이러다가 온갖 분야의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온갖 문제들과 온갖 대안들에 우리의 삶이 잠식당하게 되는 건 아닐까?


일리치에 따르면, 전문가들의 지도와 돌봄 아래 놓인 개인들,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삶을 의탁한 소비자들은 자신이 “원래 가질 수도 있었던 자기 고유의 욕구들”(31쪽)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진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실존을 “하나의 전체로, 즉 온 마음으로 원하고 기꺼이 소유할 수 있는 의미 깊은 전체로 통합하는 데 더욱 어려움을 겪게”(일리치, 31쪽) 됨을 뜻한다. 전문가들의 관리와 돌봄과 해결에 우리 자신을 맡길 때, 우리는 그 ‘편안함’ 속에서 정작 우리 자신을 소외시키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위기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그로부터 스스로 문제를 구성할 능력과 의지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 이게 내가 느낀 무력감의 정체였다.



3. 생각의 면역력 기르기


‘전문가들의 사회’에 대한 일리치의 비판은 중요한 윤리적 질문을 함축하고 있다. ‘구원’의 문제를 외부에 맡길 것인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전문가들의 인도에 복종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기술과 지식을 이용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간편한 해결책이 제시될 수 없는 삶의 무수한 문제들로부터 회피함을 의미한다. 


니체는 각자의 ‘병’을 자신이 지배당하고 있는 익숙한 습관과 작별하고 새로운 건강에 도달하기 위한 뒷문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위기’는 우리 자신의 삶의 방식을 낯설게 보고 새로운 사유와 실천을 시도하도록 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경험 속에서, 각자의 힘으로, 현실을 ‘다르게’ 문제화하기를 시도함으로써. 나는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새삼스레 우리가 얼마나 ‘정보’를 숭배하고 있는지를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통계나 전문가들의 견해에 불과한 정보에 의존해 세상을 바라보려 할 때 우리의 사유능력이 무력화되어버린다는 것도. 일리치에 따르면, 전문가들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인간이 지닌 자립적 역량을 감지하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미약하나마 스스로의 힘으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능동적으로 판단하고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전문가들만이 상황을 적절히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만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최근 들어 나는 매일 아침 뉴스기사들을 읽고 거기에 나의 해석이 들어간 코멘트를 달아서 연구실을 오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공유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코로나와 관련된 기사들이 주가 되고 있다. 또 생태학을 공부하는 연구실의 다른 친구는 현 국면을 계기로 바이러스란 무엇이며, 그것과 우리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정리한 내용을 다른 학인들과 공유하기도 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 사태에 얼마나 많은 원인들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는지를 조금씩 이해해가고 있다. 물론, 우리가 겪는 사건을 이해해보려는 이 작은 시도들이 쌈박한 대안이나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다만 스스로 앎을 구성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이 과정이, ‘위기’라는 협박이나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에 일방적으로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는 ‘뒷문’ 정도는 열어주지 않을까. 이로써 우리 자신의 사유와 관계의 면역력을 조금이라도 강화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전문가들의 사회 - 10점
이반 일리치 외 지음, 신수열 옮김/사월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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