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낭송 논어』 디딤돌편 리뷰 - "두 마리 토끼를 쫒다"

『낭송 논어』 디딤돌편 리뷰

- "두 마리 토끼를 쫒다"



내가 논어를 접한 것은 2010년초였을 것이다. 문탁네트워크가 문을 연 지 얼마 안 되었을 시기, 처음 열었던 고전강좌가 『논어』였다. 우응순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그 당시에 나는 한자를 조금 읽을 줄 아는 정도였고, 한문으로 된 문장은 한 번도 읽어 볼 엄두를 못 내는 문외한이었다. 딸과 함께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를 읽어 내려가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고 그렇게 나의 고전읽기는 시작됐다. 추운 계절에 열렸던 강의는 논어를 함께 읽는 세미나로 이어졌지만, 나는 그리 오래지 않아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나의 고전 입문기는 끝이 났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다시 『논어』를 읽는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 고전을 원문으로 공부한 지 4년차 되는 ‘고전빠’이고, 한편으로는 ‘낭송’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공부 프로그램에 폭 빠져 있는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4년차라고는 해도 모르는 한자가 수두룩한 것은 물론이고, 여전히 해설서의 도움 없이는 한 문장을 해석하는 데도 진땀을 빼는 수준이며, 해석한 문장에 내 문제를 결합시켜 생각하는 것에는 늘 한계를 느낀다. 낭송은 또 어떤가. 외우는 것에 자신이 있다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뛰어든 이 세계는 종합예술 수준의 준비가 필요한 영역이었다. 텍스트를 읽고 외우고, 라임과 톤을 고민하고, 동작을 만들어내고, 구체적인 발표형식을 의논하고 매번 낭송하는 이들과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들과의 교감까지 생각해내는 것이, 겉보기와는 다르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나의 고전공부는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원문 읽기와 낭송, 이렇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말하자면 두 마리 토끼를 쫒는 것이다. 왜?


신영복 선생님은 『담론』에서 고전을 제대로 읽으려면 삼독(三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텍스트를 읽는 것이 먼저이고, 저자를 읽는 것이 두번째이며, 마지막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뛰어넘는 읽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텍스트를 읽는 첫번째 읽기의 단계에서 원문을 읽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래된 문장일수록 옛날로 소급해서 읽어야 할 문장일수록 그 원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이리저리 살피고 해석하는 노력이 깃들어져야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공부하면서 다양한 해설서를 읽지만 결국 원문으로 돌아가서 스스로 그 뜻을 밝혀낼 수 있어야 진정한 ‘일독(一讀)’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은이가 살았던 시대의 맥락을 읽어내는 것이며, 독자가 과거를 소환해 저자와 교감하는 일이다. 나는 『논어』 팔일(八佾)편을 처음 읽었을 때를 기억한다.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춤을 추는데 인(忍)하지 못하다니? 팔일이라는 이름도 낯설었지만, 당시의 시대상황과 공자의 입장을 알지 못했던 내게 이 문장은 글자의 의미를 넘지 못했다. 팔일무는 중국 고대국가의 왕인 천자만이 행할 수 있는 의례였는데 계씨 세력이 멋대로 집안 마당에서, 그것도 대낮에 그 춤을 추게 했다는 것이니, 이 한 문장만으로 무너져가는 봉건제도를 적절하게 그린 것이다. 그리고 시가인야(是可忍也)라는 원문의 표현이야말로 비탄에 빠진 공자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한 현장감을 주는 것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렇게 시대의 맥락을 고려하며 고전을 읽어 내려가는 것은 그 흥미진진함에서 액션영화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아가 이처럼 원문을 읽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독자는 자신이 처한 현대에 견주어보게 된다. 


한편 낭송에 필이 꽂힌 것은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중세 수도원의 수도자들의 공부법은 물론 나의 공부 목표와는 달리, 영성이 풍만한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피지에 갇혀 있는 텍스트를 불러내어 수도사의 살아있는 몸에 젖어들게 하는 그 ‘중얼거림’은 삶 자체의 구성이었다. 


“1,500년의 전통에서 소리 나는 페이지는 움직이는 입과 혀의 움직임으로 메아리친다. 읽는 사람의 귀는 주의를 기울이며 입이 내는 소리를 포착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식으로 연속되는 문자들은 바로 신체운동으로 번역되어 신경충동의 패턴을 만든다. 행은 읽는 사람의 입이 포착하고 자신의 귀를 위해 소리를 내는 사운드트랙이 된다. 페이지는 읽기에 의해 말 그대로 체현되고, 육화된다.”


이미 『적벽가』 『문탁네트워크가 사랑한 책들』 같은 레퍼토리를 가지게 된 ‘낭송하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지만, ‘낭송’이라는 도구형식이, 과연 진정한 구도(求道), 혹은 공부의 체현으로 이어진다는 확신에는 물음표가 따라다녔다. 그렇지만 이제 ‘낭송유랑단’을 소개할 때, 새로운 공부법으로서의 낭송을 실험하고 전파하는 그룹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이유가 생겼다.



어쩌면 북드라망의 새로운 낭송시리즈인 ‘원문으로 읽는 디딤돌편’은 원문읽기와 낭송을 결합한 공부로 방향을 잡은 나에게 최적의 텍스트가 될 수 있겠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고 그 해석에 있어서도 원문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살리려 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옮긴이가 서문에서도 밝히지 않았던가. “해석하고 풀어 쓴 방식에서 원문의 느낌을 충실히 살리는 데 공을 들였다”고 말이다. 처음 고전 원문 공부를 하면서 “미지유야(未之有也)” 같은 부분은 매우 낯설었다. 이것은 ‘있지 않다’고 해석한다. 단지 ‘없다’고 하지 않고 ‘있지 않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원문을 함께 읽어가면서 그 의미를 조금씩 알게 됐고, 이것은 원문을 가지고 궁리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행간을 읽는 즐거움이다. 또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같은 것도, ‘잘못이 있으면 즉시 고쳐라’라는 식으로 했을 텐데, 원문이 주는 느낌을 그대로 살려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고 풀었다.


사실 나는 『논어』를 공부하지 못했다. 내가 고전공부를 시작했을 때 문탁의 동학들은 이미 그 전 해에 『논어』를 읽고 <맹자>로 넘어간 상태였다. 할 수 없이 <맹자>을 읽은 다음에 <중용> <대학> <노자>를 읽었다. 그리고 지금은 <주역>을 이년 째 배우고 있다. 그러다 보니 『논어』 이야기가 나오면 약간 주눅이 들곤 했다. 마치 숙제처럼, 하지는 않으면서 언젠가는 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남은 책이 바로 『논어』다. 숙제하듯이 읽어 내려간 『낭송 논어』는 고전 텍스트가 그러하듯이 한 번 읽어서 그 뜻이 제대로 이해될 리 만무다. 옮긴이의 말처럼 읽고 또 읽을 수밖에. 더구나 낭송에 맞게 입말을 고르고 다듬은 책이 아닌가. 두고두고 읽으면서 단전이며 입술이며, 혀, 목구멍에 이르기까지 낭송에 관계되는 모든 내 신체기관이 반응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내 입이 하는 말을 내 귀로 들어보리라. 눈으로는 텍스트 위를 지나며 포도밭 고랑에 서 있는 것처럼, 고랑마다 배어 나오는 포도향을 음미하리라. 




글_봄날(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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