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생각한 것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생각한 것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인간 세계가 난리다. 바이러스에게는 국경도 없고, (이번 경우엔) 사람도 딱히 가리지 않는 듯 하다. 그래서 그것은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바이러스가 두려운 걸까?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급증할 무렵부터 나는 집 밖에 나갈 일이 있을 때에는 꼭 마스크를 썼다.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에도 피우는 동안에만 벗고, 엘리베이터에선 꼭 마스크를 썼다. 그런데 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게 무서워서 그랬던 게 아니다. 내가 두려웠던 건 마스크를 쓰지 않은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그리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서 병에 걸리는 것보다, 그 때문에 나의 일상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게 두려웠다. 내 일상의 동선이라고 해봐야 집 근처 슈퍼마켓, 빵집, 까페,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 집, 회사 정도가 전부이지만, 내가 만약 감염이 되었다하면 그 모든 곳이 폐쇄되고, 소독 당할 것이다. 확진자인 나는 온라인에서 얼마나 손가락질을 받을 것인가.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감염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렇지만 그 때문에 마스크를 썼던 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스크'가 나를 지켜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안경을 쓰는 나는 마스크의 와이어를 잘못 조정하면 안경에 습기가 찬다. 그래서 자주 조정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손으로 얼굴을 만지게 된다. 차라리 마스크를 쓰지 않는 편이 방역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크'가 사회적 공포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쓸 용의가 있다. 그 공포에 맞설만큼 용기가 있지는 않다.


어쨌든, 이 대유행 사태로 인해 사람의 분류가 딱 세 종류가 되고 말았다. 확진자, 격리자, 아직 감염되지 않은 사람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것 또한 두렵다. 엘리베이터나 가게에서 가깝게 선 사람들이, 그냥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로 두려워지는 것이다. '두렵다'까지는 아니어도 꺼림칙하다. 그럴때면, 우리 아파트에, 우리 동네에 나와 내 가족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다못해 현재의 10퍼센트 정도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말도 안 되게 말이다. 이쯤되면 이제 두려운 건 코로나 바이러스라기 보다는 '사람'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전근대적이지도 않고, 하물며 그 오래된 담론 속의 '중진국'도 아니다. 온 세계가 이 나라의 진단속도, 방역체계, 시민의식 같은 걸 칭송한다고 하지 않나.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첨단의 선진국에 와 있는 것이다. (물론 어느 사회나 균질적인 집단으로만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니듯, 지체 현상을 보이는 몇몇 집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첨단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안전'이 중요하다. 각 개인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철저히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중 신체의 '안전'은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여러 권리들 중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권리다. '세월호 사태'가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던 건 그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것이 붕괴된데서 오는 충격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코로나 사태'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술도, 제도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이 상황에서 도대체 '나'의 안전은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불안을 낳고, 그 불안이 모든 것을 흥분 상태로 몰아간 것이다. 



나는 몇몇 확진자들이 손가락질 섞인 비난을 뒤집어 쓰는 것에 이유가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겁에 질린 사람이 온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 나도 그와 같은 상황에서 크게 다르지 않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스스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했지만 결국 통제불능 상태에 빠지고 마는 경험 같은 것 말이다. 누구에게 있는 바로 그런 경험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온라인이나, 하다못해 가족을 제외한 다른 친구들에게도 어떤 확진자들에 대한 그런 식의 비난을 옮길 수가 없었다. 행동을 보면 나 역시도 답답하고 화가 나기는 하지만, 쉽게 뭐라 하기엔 나 스스로도 찜찜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최대한 담담해지려고 노력한다. 사방이 개방된 실외에선 마스크를 벗고 숨쉬기도 하고, 집에만 갇혀 있는 아이를 데리고 산책도 가고, 놀이터에 가서 놀기도 하고 말이다. 위축되면 위축될수록 공포가 자라는 느낌이어서, 몸을 펼 수 있을 때는 최대한 펴려고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손을 자주 씻고, 밀폐된 실내에서는 꼭 마스크를 착용하고, 집과 회사를 제외한 다른 '실내' 공간엔 될 수 있으면 들어가지 않는다. 말하자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비를 하면서도 공포에 잠식되지 않는 노력을 하는 셈이다. 아 또 한가지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거나, 까페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받거나 할 때, 평소보다 약간 더 힘주어서 인사를 한다. 그게 정말 티도 안 나게 미약한 일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공포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어차피, 몇 개월이 되었든, 일 년이 되었든, 이 국면에도 끝은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좀 더 담담하게, 좀 더 조심스럽게, 조금 더 힘주어 인사하며 지냈으면 좋겠다. 




덧, 원래 이 글은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의 『불안사회』(책세상)(링크)의 독후감으로 쓰기 시작했던 글이다. 그런데 쓰다보니 영 이상한 길로 가고 말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딱히 이상한 것만은 아니다. 나는 저 책이 지금 이 사태 속에서 읽기에 아주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무엇하나 확실한 게 없는 시대, 일례로 당장 몇년 후에도 지금 사는 집에 계속 살고 있을거라는 확신조차 없는 이 시대의 '불안감'에 대해 다룬 책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불안감과 함께 딸려 나오는 급진성과 광신성에 대해서도 다룬다. 이 보다 오늘의 사태에 적합한 책이 또 있을까 싶다. 두려움과 불안함은 대개 그 정서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잘 모를 때 나타난다. 그래서 그 정서를 제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책을 읽는 건 그 불안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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