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우치 요시미, 『루쉰』
-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사는 일'은 대체로 암담한 것을 견디거나, 잊는 일인 경우가 많다. 대체로 즐겁게 살아가는 낙관주의자의 삶도 마찬가지다.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낙관주의자가 되었을까. 아니, 그런 말이 생겨났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삶은 어두운 곳에 간신히 불을 밝히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꽤 매력적인 일이다. 내내 밝은 것보다 어둠 걸 밝히는 일이 더 즐거우니까.
다케우치 요시미의 책에는 루쉰이 죽고서야 '청년들은 비로소 자신의 고독을 깨달았다'는 말이 나온다. 그에게는 죽음마저도 어떤 '쓰기'였던 셈이다. 인간의 삶, 죽음마저 포함하고 있는 그 삶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살아가고, 죽는 것 중에 어느 하나도 허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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