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십대의 탄생』
다른 관계의 탄생
‘안전한 공간’을 찾아서
고등학교를 자퇴했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에게 멋있다고 말한다. 철없다는 말보다 멋있다는 말을 주로 듣는 이유는, 내 머리 색이 노랗지 않아서. 그러니까, 겉모습이 소위 ‘날라리’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날라리’가 아니니 공부하기 싫어서 생각없이 자퇴를 했다거나, 한때의 치기 어린 반항심에 자퇴를 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글쎄… 그건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내가 자퇴한 이유를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할 순 없다. 나는 공부가 하기 싫었고, 나를 통제하려 드는 부모나 교사들에게 반항하고 싶었고, 경직되어 있는 학교 문화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좀 더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자퇴 이후 생각이 맞는 친구들과 이런저런 집회에도 나가고, 인권과 관련된 사회운동단체에 기웃거려보기도 하고, 페미니즘 모임에서 활동하면서 세미나를 진행하기도 했다. 해방된 기분이었다. 학교나 집에 있을 땐 옷차림을 지적받진 않을지, 담배 피는 것을 들키진 않을지, 동성인 애인의 존재를 들키진 않을지 걱정하면서 나를 숨겨왔었는데, 여기서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도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 따뜻한 경험들은 그때의 나에게 분명 필요한 경험이었지만, 이후로 나는 그 따뜻한 기분에 도취되어 ‘안전한’ 공간만을 찾아다녔다. 그건 폭력적인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용기를 내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결의 마음이었다.
우리는 ‘무균실’에 살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견고해 보였던 ‘안전한 공간’들은 한 번의 갈등상황에 와르르 무너졌다. 인권을 말하는 사람들이 소수자 혐오발언을 했을 때, 페미니즘을 함께 공부했던 사람이 어떤 사건의 가해자가 되었을 때,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안전한 공간이라고 굳게 믿었던 공간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그 중에서도 결정적으로 나를 무너뜨렸던 순간은 나도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임을 알았을 때다. 늘 남에게만 해왔던 질문을 나에 대한 질문으로 바꿨을 때, 나 자신은 안전한 사람인가를 고민했을 때,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자 혼란스러웠다.
상처받은 관계를 무조건 단절하기 바빴던 나에게 더 이상 도망칠 공간이 주어지지 않자, 그제야 관계에 대해 좀 더 깊은 고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인권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이 인권감수성을 담보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상처받고 상처 주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안전함’과 ‘안전하지 않음’으로 구분되었던 세계가 좀 더 복잡해졌다.
나는 더 이상 어딘가에 멋진 세상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이 어디에 있는지를 갈망하기보단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더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평생 떠돌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 『다른 이십대의 탄생』 김고은편, 25쪽
이런 맥락에서 ‘유토피아’를 찾아 떠난 고은의 이야기가 결국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끝나는 것이 유난히 공감되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을 열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전함에 가까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전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계는 ‘무균실’이 아니고, 우리는 이미 수많은 세균이 득실거리는 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어떻게’다. 그런 세계에서 어떻게 살면 좋을까?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나?
쓸모 있는 참견, 함께한다는 것은-
‘유토피아’를 찾아 떠났던 고은의 첫번째 이야기는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마친다. 그리고 그 다음 챕터의 제목은 ‘참견의 힘’이다. 고은은 문탁네트워크에서 공부를 하며 그곳의 선생님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는다. 밥은 왜 혼자 먹는지, 공부는 어떻게 하는지, 힘들지는 않은지 등에 대해서. 고은은 그런 참견을 받으며 ‘내 영역을 침범당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곧 그것이 서로의 합을 맞추는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참견의 힘. 여기서 참견은 다른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여 적극적으로 상대방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그에 대해 묻고, 쪼았다. (중략) 문탁네트워크 사람들은 이래야만 그 상대가 다듬어지고, 자신도 다듬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묻고 쪼아 다듬어진 것이어야만 문탁네트워크의 공통의 활동이 되고, 활동들이 모두의 공통감각이자 넘치는 에너지의 기반이 되었다.(『다른 이십대의 탄생』 김고은편, 34쪽)
이러한 참견은 ‘꼰대질’과는 다르다. 꼰대질은 상대방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없는 참견이다. 예를 들면, 명절에 친척어른들이 “취업은 언제 할 거니?”라고 묻는 것은 나를 알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기준에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확인하고 싶기 때문에 묻는 것이다. 그래서 꼰대질은 참견이면서도 서로의 영역에 침범할 수 없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되니까. 그런 참견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고민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는 참견이다. 함께하기 위한 참견은 다른 환경, 다른 생각, 다른 맥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맞춰 나가는 것이다. 그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모두 옳거나, 선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가 ‘무균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세계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은 수많은 세균들을 맞닥뜨려야 하는 일일 것이다. 계속 부딪히고 싸울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 모든 노력의 끝이 헤어짐이 될지도 모른다. 함께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내는 일이 아닐까.
다른 관계의 탄생
세 명의 저자가 쓴 이 책에는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서 내가 공통적으로 발견한 키워드는 ‘관계’다. 무언가의 ‘탄생’은 나 아닌 다른 것과의 부딪힘 없이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일까. 꼭 타인과의 관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과의 관계이기도 하고, 일과의 관계이기도 하고, 공부와의 관계이기도 하고, 나 자신과의 관계이기도 하다. 사실 이것들을 완전히 분리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른’ 삶을 산다는 건 ‘다른’ 관계를 맺는 일과 떨어질 수 없다. 기존의 사회는 관계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계속 재생산한다. 거기에 의문을 던지고 다른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고, 지금의 나에게 던지게 되는 질문도 생겼다.
...이 같은 거리는 오프라인에서 맺는 관계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생전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고, 논쟁을 할 것도 없이 불편하면 누군가를 ‘차단’한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서로를 반영하며, 차단이라는 간편한 기술을 신체화 한다. 차라리 혼자가 되는 것이 익숙하고 편안해진다.
“그래서?”라고 물을 수도 있다. “난 전부 차단했어”, “혼자 있는 게 뭐가 문제야?”, “‘함께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인간은 사회적 동물 운운하며? 그런 거야말로 구시대적 이데올로기 아니야?”
맞다. 함께하는 것이 근거없는 당위로 주어지면 취향과 선택, 자유를 부정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반대편도 무언가를 부정하기는 마찬가지다. 함께는 개인을 부정하고, 개인은 함께를 부정한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들을 만나며 느낀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온라인 공간을 찾고, ‘넷플릭스’를 찾고, 마음을 달래줄 음식을 찾고, 게임을 찾는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적극적으로 1인 마케팅의 대상이 된다. 편안함으로 계속해서 돌아감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린 결국 자기를 돌보는 일로부터 멀어진다. ‘옳은 나’만 있고, ‘그른 세계’만 있다. 세계는 온전히 나쁜 것이 되고, 나는 온전히 옳은 것이 된다. 쿨-하게 세계를 차단한다. 하지만 우린 함께 존재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 『다른 이십대의 탄생』 프롤로그, 7~8쪽)
관계를 지속하는 것보다 차단하는 일이 훨씬 쉬운 세상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프롤로그의 제목처럼 ‘차단하지 않으며 출구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이 말은 매 순간 순간마다 갈등을 직면하고 무조건 함께하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왜 함께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함께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차단하지 않으며 출구를 만들려면 무엇보다 고민을 차단하지 말아야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관계의 방식에 의문을 던지고, ‘함께’와 ‘혼자’ 사이 어딘가에서 헤매다 보면, 다른 관계는 이미 탄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_스물n 살 김소이(문탁네트워크 미학세미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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