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십대의 탄생』
다르면서도 같은, 이십대의 이야기
다르게 살고 싶다는 충동이 처음 올라온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대학에 가도 취업하려고 진을 빼야 하고, 취업하고 나서도 안 잘리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한다는 걸 모두 알면서 왜 그래도, 대학엘 가고 취업을 하려는 걸까? 서울대에 가도, 번듯한 전문직 종사자가 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절대 지금의 불안함과 괴로움이 해소되진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명문대-취업-중산층’이라는 루트에 대한 회의감이 제법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기에서 벗어나 다르게 살아가지 않았다. 고등학교 3년, 재수 1년의 시간을 때우고 나는 어영부영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당연한 것처럼 취직을 걱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때때로 불평불만이 치솟을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다르게 살고 싶다고 분명히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왜 다르게 살지 못하는 걸까?
『다른 이십대의 탄생』은 인문학 공부를 통해 삶의 윤리를 세워 나가고자 하는 이십대 세 명의 이야기다. 다니던 대학을 자퇴한 후 동양고전을 공부하며 대중지성프로그램에서 강의를 하는 고은. 목수 기술을 가지고 친구들과 ‘길드다’ 활동을 하며 경제 활동의 윤리를 고민하는 지원. 인문학 공부를 한 내용을 바탕으로 예술프로젝트를 꾸리는 동은까지.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멋지다, 불안정하다 등의 가치 판단을 떠나서 우선 참 낯설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에 다니고 있고, 또 이러다가 회사에 다닐 것 같은 보통의 이십대인 나와는 애당초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을 것만 같달까. ‘다름’이라는 단어에 애증이 생겨버린 나는 사실 약간은 방어적인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어차피 이 사람들이랑 내 사정은 다른 거 아니겠어?’, 하고.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그들의 파격적인 행보에 비해… 의외로 평범하다. 처음부터 대단한 통찰력을 갖춘 것도 아니며, 모두가 알아보는 특이한 재능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 마음이 앞서 실수를 하기도 한다. 아니, 그냥 실수를 계속한다. 그러나 그러면서 이들은 자꾸 더 멀리 가고, 더 자유로워진다. 책을 덮으면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겼다. 다를 것도 없는 그들과 나인데, 나는 자꾸 비슷해지고 이들은 자꾸 낯설어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사회의 언어를 벗어나 ‘나’를 찾기
책 초반, 고은은 국어 시간에 스스로 열심히 생각해낸 이야기가 전과에 적힌 내용과 완전히 일치했던 경험을 소개한다. 그는 “학교가, 교과서가, 글쓰기 대회 주최 측이 만족해할 만한 이야기”를 잘 포착할 수 있는 모범생이었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제시하면서 스스로의 언어를 잃었다. 공립중학교에서 대안고등학교로, 대안고등학교에서 진보적인 것으로 알려진 대학의 사회과학 학부로 시스템을 옮겨도 그가 자기만의 언어를 찾는 일은 묘연했다. 시행 착오 끝에 그는 시스템의 대체가 아닌 다른 방면의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한다.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더 시급한 문제”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다른 이십대의 탄생』, 25쪽)
막연하게 어떤 좋은 환경에 진입하면 내가 더 행복하거나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착각은 비단 고은만이 해본 것은 아닐 테다. SKY에 다니는 것이 무언가를 보장해줄 것이라 믿고, 북유럽이 아닌 헬조선에서 태어난 것을 비관하고, 흙수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모두 비슷한 오류에 빠져 있다. 이때 우리는 ‘나’를 구성하는 욕망과 습관을 보는 대신, 스스로를 비-SKY학생, 한국인, 흙수저 등으로 거칠게 파악한다.
그러나 생각의 주어가 어떤 사회적 지표에서 ‘나’로 좁혀질 때에만, 우리는 다른 삶으로의 첫 걸음을 뗄 수 있다. ‘시스템’에 대한 혁명은 갖은 핑계를 대면서 미룰 수 있지만, ‘나’에 대한 혁명은 사실 어떤 순간에도 당장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아 보일지 몰라도 오히려 리얼한 것은 이런 질문이다. 오늘 하루 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무엇을 하면서 보냈는가? 나는 주로 어떤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그럴 때 주로 어떤 정서가 유발되는가? 여기서 나아가 나는 앞으로의 일상을 어떻게 꾸리고 싶은가?
이질적인 목소리와 만나기
이렇게 ‘나’를 발견하는 순간은 사실 꽤 자주 있다. 그러나 보통 그것이 추상적인 느낌에 머물기 때문에 쉽게 묻어두고 지나치게 된다. 즉, 다른 삶을 시도해보는 동력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지원은 그 추상적인 느낌이 다른 누군가의 삶의 방식과 만날 때, 혹은 어떤 텍스트와 결합할 때 구체적인 언어로 변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이질성’과 접해야지만, 우리는 그 동안 의심없이 살아갔던 일상의 순간에 구체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습득한 관계의 기술은, 서로의 생각을 존중해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도 캐묻지 않는 것이었다. 즉, ‘이질성’을 용납하지 않는 대화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그래, 넌 그렇게 생각해도 돼. 나는 아무튼 안 그럴 테니까. 그러면서 나와 타인은 차분한 마음으로 서로의 거리를 확인하고 차단의 비율을 높여갔다. 그러나 이런 차단의 관계 방식 위에서는, 친구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면이 많아질 때마다 당혹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차단의 비율이 높아지다가 결국 모두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혼자가 되겠지? 이때 ‘다른 삶’이란 건 아주 고독한 길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은 아주 대단하거나 특수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고은과 지원, 동은 세 사람의 관계를 지켜보다 보면, 내가 가졌던 ‘다른 삶’에 대한 착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를 깨닫는다. 오히려, ‘다른 삶’은 나와 같은 보편적인 사람들이 서로를 만나고 나서야 만들어지는 것이다. 고은과 지원, 동은 세 사람은 서로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삶에 이질성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다른 이십대의 탄생』에서는 이들이 서로를 당최 이해할 수 없었던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때때로 울음이 터지고 뾰족한 말들이 쏟아지지만, 이들은 서로의 맥락을 읽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어느 순간 자기 안에서 선명해진 감정이 무엇인지, 자신의 맥락을 노출한 글을 쓴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읽고 그 생각에 마구 간섭하고 질문한다. 누군가가 협소한 생각에 갇혀있다고 느껴지면 왜 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런 설득의 과정에서 피드백을 주는 사람도, 피드백을 받는 사람도 각자의 생각을 언어로 정리하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다른 삶으로 함께,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외부적 조건은 필요 없다
이질성과 만나라는 구호를 접하고 나서는 이런 질문을 하기 쉽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또는 어떤 사람을 만나야 내가 다르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책의 저자들의 경험을 읽다 보면 의외로, 그런 질문이 불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서 지원은 레베카 솔닛의 『맨스플레인』을 읽었을 때의 경험을 소개한다. 이 책은 남성문화가 여성을 억압해 온 방식을 분석한 책이다. 책을 읽기 전 지원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저 평범한 남자로, 공기처럼 존재하고 있는 남성중심문화를 굳이 되짚어볼 이유도, 능력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책을 덮은 후 그는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남아있을 수 없었다. 과거의 자신이 여성을 억압하는 바로 그 남성으로 재발견된 순간, 그는 일상 속에서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여성혐오적인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여기서 다시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해야 하는가?
『맨스플레인』을 읽기 전 지원이 그랬듯, 우리는 때로 어떤 사안에 대해서 스스로가 그냥,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가 어떤 책과만, 어떤 사람들과만 깊이 있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그 어떤 순간에도 절대 그냥, 살아가고 있지 않다. 너무 익숙해서 그것을 의심할 이유도 능력도 없었을 뿐, 사실 우리의 일상의 모든 순간은 항상 어떤 특정한 회로가, 예컨대 남성중심주의, 엘리트주의, 이기주의 등의 전제가 점유하고 있다.
이질성과의 만남은 사실 외부에 있는 낯선 것이 내게 침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이런 당연했던 회로들을 문득 낯설게 보게 되는 것, 다시 말해 내 안에서 이질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지원이 과거의 자신을 낯설게 재발견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어떤 이질성이 내게 침투할 것인가, 즉 어떤 책을 읽고 누구를 만날 것인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삶으로의 탈주에는 어떤 외부적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다른 이십대의 탄생』은 세 명의 저자들이 다른 삶을 일굴 수 있었던 자신만의 특별한 조건, 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경험은 말해준다. 우리와 그들의 존재적 토대는 동일하다고. 다만 나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고, 열심히 이질적인 타자들 속에서 부딪혀 나가다 보면 그 보편적 토대를 특수하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책을 끝까지 다 읽은 후 기분 좋게, 씩씩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었다.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투덜대던 과거의 나는 낯설게 재발견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글_스물세 살 김성아(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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