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드라망은 『다른 이십대의 탄생』 출간을 자축하기 위해서 이 세 명의 저자들처럼 공동체 활동을 하고 있는(혹은 경험이 있는) 이십대 분들에게 리뷰를 부탁드렸습니다. 남산강학원, 규문, 문탁네트워크에 여러 방식으로 접속하고 있는 이십대(사실... 한 분은 십대...) 분들께서 뜨끈뜨끈한 리뷰를 보내주셨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요!
『다른 이십대의 탄생』
청년을 위한 지침서, “이렇게도 살 수 있다”
고은이가 책을 썼다!
재작년 가을 문탁네트워크의 초대로 송전탑 문제가 한창인 밀양에 다녀오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것은 밀양 송전탑과 관련된 문제들보다도 고은이와 나눈 이야기들이다. 일단, 한문을 좋아하는 동년배를 발견했다는 것이 더없이 기뻤다! 한문이 노년의 학문은 아니지만, 통계적으로 따졌을 때 대체로 노년들이 좋아한다. 덕분에 한문을 좋아하면 ‘애늙은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다. 그러던 차에 고은이와 나눈 대화는 그동안 답답하게 쌓인 체증이 단번에 내려가는 느낌을 주었다. 우리의 대화는 우샘(우응순 선생님)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되었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이랬던 것 같다. “네가 처음으로 쓴 『논어』 구절(「자한」편 18장)에 대한 얘기가 우샘이 얘기한 거랑 같아서 놀랐어. 선생님이 나한테도 ‘왜 마지막 삽질에서 모든 게 무너졌다고 생각해?’라고 물으셨거든. 나는 ‘오만해서요’라고 대답했는데, 그때 선생님은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야’라고 얘기하시더라고. 그 말에서 선생님이 그동안 어떻게 공부해 오셨는지, 공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다 느껴졌었어.”(우샘에 대한 고은의 자세한 찬양은 『다른 이십대의 탄생』 김고은편의 「공자씨, 그동안 오해가 많았습니다」를 보시라.)
이런 대화를 시작으로 그동안 서로 품고 있던 한문에 대한 이야기를 맘껏 나눴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논어』 구절, 고은이 수업하는 『천자문』 등 소재는 많았다. 나뿐만 아니라 고은이도 자신이 있는 공동체에서 한문을 좋아하는 동년배가 없어서 묘한 쓸쓸함을 느끼고 있던 중이라 했다. 보기 드문 젊은 선비(?)들의 대화는 담쟁이넝쿨처럼 이런저런 주제로 뻗어 나갔다. 한문을 가지고 신나게 얘기해본 적은 처음이었던지라, 나에게 밀양의 밤은 ‘동학(同學)’를 얻은 기쁜 순간으로 기억된다.
『다른 이십대의 탄생』에서 고은이 한문 공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공감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공감된 부분은 한문에 대한 기초를 배우지 않고 『천자문』 세미나를 주도했을 때 고은이 느낀 당혹감이었다. 고은이는 우샘이 계시는 인문학당 상우의 ‘삼경스쿨’ 세미나에 유학했다. ‘갈 지(之)’자도 모르던 깍두기로 시작한 고은이는 일주일 내내 한자만 외울 정도로 악착같이 공부했다고 한다. 겨우 한숨 돌렸다 싶었을 때, 우샘은 고은이에게 『천자문』 읽기를 주도하게 하셨다. 우샘이 보강해주신다 하더라도, 별다른 밑천이 없었던 고은이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강독준비는 마치 깜깜한 동굴에서 더듬더듬 손 감각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았다.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나는 또다시 무식하게 시간을 들이부었다.”(『다른 이십대의 탄생』, 41~42쪽) 규문에서 처음 청소년 프로그램을 맡았을 때 나도 그 못지않게 당혹스러웠다. 여전히 한문 초보인 내가 뭘 안다고 애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이 자의식은 가르치는 게 지식 전달이 아니라 배움의 또 다른 측면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조금씩 깨져나갔다. 그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고은이 삼경스쿨 세미나 시간에 멍때리지 않고 눈치껏 글자를 따라가는 데만 1년이 걸렸던 것처럼.
고은의 글을 읽으며 놀란 부분은 고전 공부의 현대적 의미를 풀어내는 과정이었다. 나는 아직도 “왜 동양고전 공부를 하느냐”는 질문에 “재밌다”고밖에 대답할 수 없다. 그런데 고은이는 현재를 낯설게 보기 위한 도구로서 고전을 공부한다고 말한다. 고전이 제공하는 낯선 관점은 현대 철학자들의 분석 못지않게 현재적이라고.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독자의 문제의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내가 남들에게 한문 공부의 ‘재미’를 이렇다 할 언어로 풀어내지 못하는 것은 현재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만큼 첨예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공부를 글로 푼다는 것은 내 공부의 수준을 점검하는 일이고, 정체된 지점을 뛰어넘기 위한 시도다. 그런 점에서 고은이가 책을 썼다는 게 질투나게 존경스럽다.^^
공통감각, 관계를 확장하는 기술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함께하기’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데 있어서 가장 민감하고 불편한 요소는 뭐가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돈이다. 내 돈 쓰는 것은 오로지 내 자유다. 내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돈 쓰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똑같이 다른 사람을 위해 쓰더라도 내 돈이 아닐 때는 많이 망설여진다. 내 돈 쓰듯이 다른 사람이 준 돈을 써도 될까? 특히 ‘우리’라는 명목으로 주어진 돈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작년 말에 한 달 동안 떠난 ‘소-생 프로젝트’ 여행 경비를 책정할 때도 그랬다. 일정으로부터 경비가 나와야지 경비에 맞춰 일정을 짜면 안 된다는 피드백을 받았지만, 계속 액수만 신경쓰였고, 현실적으로 이 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아, 도대체 돈은 어떻게 써야 하는 걸까? 돈을 쓰는 올바른 기준은 뭘까?
「길드다 2018, 마이너스 500만원」 이야기는 돈 쓰기에도 다른 감각이 있음을 보여준다. [길드다] 초기 자금으로 받은 500만원은 다르게 살아오고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의 낯섦을 확인하는 사건이었다.
“명식은 부모님 집에서 비교적 여유롭게 지냈지만, 동은은 자취를 위해 알바를 하며 비교적 빠듯하게 지냈다. 지원은 나에 비해 많이 벌지만 거의 돈을 남기지 않았고, 나는 지원에 비해 적게 벌지만 저금만은 꼭 하려고 들었다.”(『다른 이십대의 탄생』, 68쪽)
돈에 대한 온도가 다르니 당연히 쓰는 기준도 달랐을 것이다. 교육프로그램이 폐지되면서 수입이 줄어든 동은에게 지원하는 것, 한두 달간 디자인을 해준 친구에게 페이를 주는 것 등에 관해서 다른 의견이 나왔다. 동은에 대한 지원을 수습비로 줄 것이냐 건당 활동비로 줄 것이냐, 디자인을 해준 친구에게 지불할 페이는 <길드다>의 예산에 맞게 줄 것이냐 사회 일반적 관점에 맞게 줄 것이냐 등등. 돈 쓰기에 대해 고민하던 고은이는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를 따지기보다 돈을 어떤 감각으로 쓰고 있는지를 되돌아보았다고 한다. <길드다> 멤버들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예산을 썼다. 개인적인 소비 외에 다른 방식으로 돈을 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소비는 의도와 관계없이 대체로 사적 감각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이럴 때는 주는 자와 받는 자가 구별되고 액수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돈이 있는 사람만이 소비할 수 있고, 돈이 없는 사람은 시혜를 바랄 수밖에 없는 구도가 형성된다. 하지만 돈을 관계의 확장을 위한 매개물로서 생각하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쓰일 수 있다. 그러니까 돈을 쓰는 방법을 통해서도 더 많은 사람들과 공통감각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돈뿐만이 아니다. 사적 감각은 다양한 영역에서 작동된다. 그리고 그것은 관계를 폐쇄적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적 감각이 아닌 공통감각을 형성할 수 있을까? 여기에 명확한 답은 없는 것 같다. <길드다> 멤버들이 돈 쓰기 원칙을 정하고 난 후에도 곧 새로운 문제에 부딪힌 것처럼, 공통감각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외부적 힘이 계속해서 개입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공동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한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자마자 동일한 문제가 동일하지 않은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그 문제를 넘자마자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한다. 그러나 이렇게 공통감각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나의 습관이 달라지고 일상의 리듬이 변화한다. 고은이는 <길드다>에서 번 돈으로 ‘길위기금’과 <길드다>에 특별기금을 냈다고 한다. 액수는 크지 않았어도 다른 방식의 돈 쓰기를 발명한 것이다.
어떻게든 살 수 있겠다!
이 책은 ‘청년시절을 어떻게 보낼까?’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 책이 될 듯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처럼 따라오는, ‘지금보다 더 풍족한 것을 누리며 산다’는 환상을 깰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실 청년들이 가장 무능력한 지점 중 하나가 ‘다른 삶’에 대한 빈약한 상상력 아니던가? 이 책을 쓴 세 명의 저자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르게 살기’를 모색하고 있었다. 미래를 위해 스펙을 쌓거나 자포자기식으로 쾌락을 좇고 싶지 않은 청년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열정으로도, 어떤 희망도 없다는 자조 섞인 비관으로도 자신을 규정하고 싶지 않은 청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물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도대체 나의 길을 어떻게 낼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어쩌면 뾰족한 수는 없을 수도 있겠다. 필자들도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 모르겠다고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서 왠지 모르게 기묘한 활력이 느껴진다.
나는 기뻤다. 왜 신났던 걸까? 그 이유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답해하던 내가, 바로 옆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였고, 이 질문의 해답을 위해 함께 공부하고 여러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알게 되어서였다.
- 『다른 이십대의 탄생』, 184쪽
나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할 때 우리의 존재는 한없이 작아지지만, 나와 같은 고민을 누군가와 함께 할 때 우리의 존재는 더없이 커진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명석·판명하게 인식하는 만큼 우리는 능동적으로 되고, 역량이 증대되며, 기쁨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필자들이 보여준, ‘함께하기’의 길에서 느껴지는 기쁨이란 스피노자가 말한 역량의 고양으로부터 느껴지는 능동적 기쁨이 아니었을까? 사회가 규정한 모델이 아닌 다른 삶의 양식도 가능하다는 것을 몸으로 이해한 자들의 기쁨.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다고 해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정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함께하는 데서 발생하는 기묘한 힘은 혼자 있을 때 엄습하는 무력감, 고립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자기 말을 찾고 싶었던 고은, 수단이 되지 않는 삶을 발명하고 싶었던 지원,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동은. 세 사람의 고민은 나에게 ‘어떻게 하면 이십대를 재밌게 보낼 수 있을까?’로 다가왔다. 한적한 시골생활도, 극단적 쾌락의 소비생활도 나에겐 무료하기만 했다. 그런 내가 흘러 흘러 지금 있는 규문으로 왔다. 지금 내가 있는 규문에서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고 나를 실험할 것인지, 그들의 이야기에서 여러 값진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글_스물여섯 살 박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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