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20대가 읽은 『다른 이십대의 탄생』- 시끌벅적한 공간의 탄생

* 북드라망은 『다른 이십대의 탄생』 출간을 자축하기 위해서 이 세 명의 저자들처럼 공동체 활동을 하고 있는(혹은 경험이 있는) 이십대 분들에게 리뷰를 부탁드렸습니다. 남산강학원, 규문, 문탁네트워크에 여러 방식으로 접속하고 있는 이십대(사실... 한 분은 십대...) 분들께서 뜨끈뜨끈한 리뷰를 보내주셨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요!



『다른 이십대의 탄생』

- 시끌벅적한 공간의 탄생



대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혜화동에 있는 규문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요즘 나의 일과는 연구실에서 사람들과 함께 밥해먹고,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밤이 되면 자취방으로 돌아와서 눈을 붙이는 것이다. 내가 자취하는 곳의 바로 위에는 한성대학교가 있어서 아침마다 연구실로 향하는 길에 나와 엇비슷한 나이의 대학생들과 마주치게 된다. 연구실이 위치한 건물 근처에도 성균관대학교가 있어서, 퇴근하는 길에도 대학생들을 마주친다. 그들의 걸음은 언제나 분주해보이고,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있을 때면 다들 고개를 약간 떨군 채로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그리고 심심치 않게 들리는 말소리들,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돌아보면 말하는 사람 곁에는 아무도 없지만, 너나없이 귓속에 이어폰을 꽂고 있다. 분주하게 통화하고 있는 모습이 흡사 혼잣말 같아 보일 때가 많다. 다가가 일부러 휴대폰을 떨어뜨리거나 이어폰 줄을 건드리지 않는 한, 이들은 자신의 곁에 어떤 사람들이 있고 무슨 말을 나누는지, 주변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 대학생이었던 내가 봐온 익숙한 풍경이기도 하다. 열람실에서나 식당에서 모두는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우리는 서로 단절되어 있다. 말없이 책을 보는 열람실은 말할 것도 없고, 학생식당에서 스마트폰을 곁에 두고 혼자 밥을 먹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다. 웬만하면 서로에게 참견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할까. 그나마 참견할 것이 있다면 대학교마다 개설된 익명의 커뮤니티에서 이뤄지는 것 같다. 물론 여기서도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게시물만 메인 화면에 걸리고, 그렇지 못한 게시물은 삭제되거나 묻힌다. 또, SNS의 타임라인에는 자신들의 일상을 공유하려는 다양한 사진들로 가득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취향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또래들의 댓글에 끊임없이 반응하지만, ‘인싸’(교우관계가 넓은 사람)의 기준과 ‘아싸’(교우관계가 좁은 사람)의 자격을 묻고 남모를 공허에 시달린다. ‘좋아요’를 누르느라 바쁜 동시에 웬만해선 남 일에 참견하지 않는 고립된 일상.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적극적으로 1인 마케팅의 대상이 된다. 편안함으로 계속해서 돌아감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린 결국 자기를 돌보는 일로부터 멀어진다. ‘옳은 나’만 있고, ‘그른 세계’만 있다. 세계는 온전히 나쁜 것이 되고, 나는 온전히 옳은 것이 된다. 쿨-하게 세계를 차단한다. 하지만 우린 함께 존재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 『다른 이십대의 탄생』, 7~8쪽


나와 맞는 사람과는 접속하지만, 맞지 않는 사람은 거침없이 차단하기. 이것은 이십대들의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관계의 기술이다.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과 기꺼이 마주할 수 있는 자신감은 점점 더 적어지고 있다. 캠퍼스는 물론 거리에서도,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처럼 낯선 이들로 북적이는 공간에서도 예외는 없다. 무언가를 차단한다는 것은 내가 있는 공간을 침해받아서 안 될 곳으로 규정하는 것이고, 내 삶에 함부로 상관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이 그동안 내가 속한 세대를 아우르는 공간과 관계에 관한 감각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에 읽은 『다른 이십대의 탄생』은 이전과는 ‘다른’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이 책을 쓴 친구들은 대학을 가지 않거나 자퇴를 택한 이십대 청년들이다. 이들은 저마다 우연한 계기들로 경기도 용인에 있는 문탁네트워크와 ‘접속’하면서 다양한 질문과 맞닥뜨린다. 세 명의 필자 중 김고은은 본격적으로 중국고전 공부를 시작했을 때 마주했던 어려움을 말한다. 문탁넷은 ‘인문학’ 공동체이니까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하는 데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고은은 공부방에서 매일 숨 가쁘게 공부한다. 그런데 문탁넷 공부방은 여느 독서실처럼 숨 막히게 조용한 곳이 아님을 느낀다. 공부방에서 대화는 좀체 끊이지 않는다. 고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풍경 선생님은 공부하던 중에도, 밥 먹고 난 뒤에도, 잠깐 물을 뜨러 간 사이에도 종종 말을 건넨다. 나이 많은 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은지, 어떤 부분이 어려운지 물어보곤 한다. 공부방에 머무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이처럼 끊임없이 질문하고 말을 건넨다. 식사할 시간이 되어 주방으로 가는 중에도 왜 혼자서 밥을 먹으러 가냐고 묻고, 공부방에 같이 있었는데 밥도 같이 먹어야 한다면서 고은에게 말을 건넨다. 문탁넷의 사람들은 고은에게 그동안 별다른 간섭없이 알아서 하던 것을 궁금해하고, 누군가와 공유한 적 없던 생각을 알고 싶어 한다. 질문 앞에서 어물쩍 상황을 넘기곤 했던 고은이는 공간에 관한 다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같이 밥을 먹는 사이가 된단 말인가?”(『다른 이십대의 탄생』, 31쪽)


문탁넷에서 인문학 프로그램을 수강했던 필자 이동은은 다시 공부하고 싶지만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걱정한다. 그러던 중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선생님에게 제안을 받는다. 문탁넷에서 운영하는 공유지카페(‘파지사유’)에서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수강비를 충당해보면 어떻겠느냐는 것. 그러나 기쁨도 잠시, 동은이는 어떤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파지스쿨>을 다시 하고 싶긴 했지만 반년밖에 안 본 사람에게 일을 준단 말인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내가 카페에서 일을 잘하지 못하면 <파지스쿨>에서도 잘리는 걸까? 아니, 젊다고 돈을 더 준다는 게 말이 되나?”(『다른 이십대의 탄생』, 182쪽) 걱정 어린 질문 속에서 제안을 받아들인 동은이에게 일이란 그저 시간에 맞춰 주어진 것만 잘하면 되는 알바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파지사유에서의 매니저 일은 단지 시간에 맞춰서 주어진 업무만 하면 되는 ‘시급 알바’ 같은 게 아니었다. 카페의 주된 이용자는 문탁넷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어제 보았던 사람을 오늘 보기도 하고, 누가 언제 올지 알 수 있게 된다. 동은이는 카페 마감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을 내보내야 할지 고민하기도, 마감시간을 넘겨 진행되는 행사를 함께 구경해보기도 한다. 시간이 쌓여 문탁넷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모습이 하나둘 눈에 밟히면서 동은이의 질문도 바뀌기 시작한다. “ 왜 이 사람들은 여기서 공부를 하는 걸까? 공부가 어렵다고 하면서도 왜 계속 오는 것일까? 문탁넷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고, 게다가 다른 세미나를 하는 사이인데도 어떻게 저렇게 가까워 보이는 걸까?”(『다른 이십대의 탄생』, 183쪽)


고은과 동은의 글이 기억에 남은 것은 본격적으로 연구실(규문)에 다니면서 생긴 나의 고민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는 연구실의 분위기는 대학교 열람실과는 전혀 다르다. 독서에 열중하는 중에도 농담이 흐르고, 가끔씩 웃음이 터진다. 밥 먹을 시간이 되면 누군가는 보던 책을 잠시 놓고 밥을 짓고, 밥을 먹고 나면 반찬그릇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게 된다. 수업할 시간이 다가오면 연구실을 찾아오시는 선생님들과 인사하고, 서로 근황을 주고받기도 한다. 퇴근하기 전에는 그동안 쓰던 방 안을 같이 청소한다. 대학교의 열람실의 엄숙한 공기가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인지, 처음에는 이러한 공간 배치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연구실 곳곳은 때때로 식탁이 되고, 강의하는 곳이 되며, 손님과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 된다. 이런저런 일로 가득한 연구실에서 이따금 산만함을 느낀 까닭은 이 때문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참견하다 보면 책은 언제 읽지?’, ‘이곳에서는 모두가 조용히 지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공부하는 곳에 대해서 내가 가졌던 관념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며 간섭할 수 없는, 외부와의 차단이 일상화된 곳이었다. 




연구실에서 이런저런 일과 마주했을 때 들었던 혼란도 마찬가지였다. 규문에서는 식사를 준비하거나 설거지를 맡고, 청소하는 일과에 딱히 당번을 정하지 않는다. 당장에 급한 일정이 없고, 마음이 내키는 사람은 밥을 짓거나 그릇을 닦는다. 그러다 보니 누구는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게 된다. 이처럼 자신의 손에 닿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은 공간에서 간섭할 것이 늘어난다는 것과 같다. 할 일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기에 오히려 자신의 역량을 시험할 기회가 언제든 생겨날 수 있지 않을까? 이때 역량이란 앉아서 책을 읽는 몸을 때로는 밥을 차리는 몸으로, 설거지하는 몸으로, 부단히 쓸고 닦는 몸으로 바꾸는 능력이다. 다양한 살림이 진행되는 공간에 끼어들수록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참견을 받거나 참견할 수 있는 힘이 조금씩 길러지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에 나는 연구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떻게 거들지 막막하고 불안해했다. 이러한 감정에서 비롯된 부자연스러운 동작과 말투는 고스란히 몸으로 드러났고, 어김없이 연구실 사람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었다. (물론 지금도 놀림 받고 있지만^^) 그러는 와중에 그저 번잡하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점점 소란스러운 만큼 생기가 넘치는 곳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숙하게 책 읽는 곳으로만 여겼던 첫인상과 달리, 어느새 연구실에 대한 느낌이, ‘공부하는 곳’에 대한 감각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탄생’이란 단어는 어떨까? 개인주의적인 삶의 방식에 익숙했던 지원은 새로운 감각을 익히게 됐다고 말한다. 밀도 높게 부딪혀 결과물을 냄으로써 실질적으로 다른 이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는 것이다. 동은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을 해왔듯이 앞으로도 어떻게 살게 될지 전혀 모르겠지만, 글을 쓰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여태까지 자신을 변화시켰던 것이자 앞으로도 그에게 지침이 되어 줄 것이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태도’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다른 이십대의 탄생』, 231쪽


어쩌면 ‘함께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일상에 끊임없이 참견하고, 참견하게 되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닐까? 나에게도 되도록 누군가에게 나의 일상을 침해받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질문해보려 한다. 참견하지 못하는 공간에서는 자신의 역량이 과연 얼마만큼 발휘될 수 있을까? 나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공부한다는 것은 함께하기 위한 공간을, 공간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느낌을 익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받은 느낌은 내가 하는 공부를 한층 시끌벅적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 스물여덟 살 전한역(고전비평 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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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시우 2019.05.29 14:56 답글 | 수정/삭제 | ADDR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좋은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 무용 2019.05.29 15:37 답글 | 수정/삭제 | ADDR

    (서로가 서로에게) "참견하지 못하는 공간에서는 자신의 역량이 과연 얼마만큼 발휘될 수 있을까?"라는 문장 안에 오래 머물다 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