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십대가 읽은 『다른 이십대의 탄생』 - 삶의 연결을 위한 질문

* 북드라망은 『다른 이십대의 탄생』 출간을 자축하기 위해서 이 세 명의 저자들처럼 공동체 활동을 하고 있는(혹은 경험이 있는) 이십대 분들에게 리뷰를 부탁드렸습니다. 남산강학원, 규문, 문탁네트워크에 여러 방식으로 접속하고 있는 이십대(사실... 한 분은 십대...) 분들께서 뜨끈뜨끈한 리뷰를 보내주셨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요!



십대가 읽은 『다른 이십대의 탄생』

- 삶의 연결을 위한 질문



나는 스무 살이 되면 다양하고 특별한 힘이 생길 것이라 믿었다. 여섯 살 때는 큰 키와 예쁜 모습을, 열 살 때는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 없는 네이버 가입을, 열여섯 살 때는 자립을 할 수 있으리라 …… 비록 그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20대를 동경하는 마음은 같았다.


그러나 열여덟 살이 되니 그 특별함을 믿는 마음이 20대의 모습에 대한 부담과 답답함으로 바뀌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하고, 취직해서 사는 것. 너무 많은 친구가 놀라울 정도로 같은 생각을 하고, 이 사실이 나도 같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모습이 내 모습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는 것 같고, 다른 길을 찾는 것이 잘못처럼 보이기 때문에 불안하기도 하다. 




문득 질문을 던져본다. 이 예상처럼 살 수 있을까? 내가 이걸 원하고 있을까? 다양한 선택지를 찾고 싶다. 물론 정해진 것처럼 보이는 길 말고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다른 길은 틀렸다는 눈길을 보내며 왜 그렇게 귀찮게 사느냐고 돌려 묻는 주위 사람들에게 해줄 말은 모른다. ‘그냥 어떻게 살지 찾아보고 싶어요. 옳고 그른 것 이전에 제가 뭘 원하는지를 알고 싶어요.’ 이 말이 전부다.


서로가 쓴 글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일은 텍스트로서의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정당하게 변화를 요구하는 관계의 기술이다.

- 『다른 이십대의 탄생』, 10쪽


3명의 젊은 이십대가 쓴 『다른 이십대의 탄생』 속 프롤로그의 이 문장을 통해, 내가 왜 이 책을 읽으며 감동하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다양한 길을 관계에서 찾고 싶었다. 다양한 사람의 삶의 모습에 내 삶을 비추어보고, 반영하고 변화하고자 한다. 그 안에서 텍스트는 나와 다른 사람의 세계를 연결해주리라. 쉽사리 책의 페이지를 넘길 수 없을 만큼 그 안의 삶이 너무 감사했다. ‘김고은편’에 나오는 고은 언니의 글을 읽다가 지금의 나와 가장 비슷하다고 느껴진 부분이 있었다.


나는 학교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했다. 스스로도 말할 수 없었으니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했다. 동아리, 학생회, 학년잡지 등 온갖 활동을 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만 늘 뿐이었다.

- 『다른 이십대의 탄생』, 20쪽


고은 언니가 입학 전에 꿈꾼 ‘멋있는’ 학교는 실제 모습과 거리가 있었다. 실망스러운 학교의 모습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으나, 문제를 정확히 짚지 못해 그 생각과 고민을 말로 전달할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꼭 문제가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음을 알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 몰라 답답할 때가 있다. 언젠가 이런 답답함으로 괴로워하던 내게 어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제를 정리해내는 것이 해결까지 걸리는 시간의 반을 가져간다. 문제를 내 언어로 표현하면 문제를 내 삶으로 만들 수 있으니 이게 해결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이제는 이 말이 이해된다. 삶에서 나의 언어를 가지는 것은 내 세상을 가지고 주위 사람과 나눌 수 있게 한다.  


여기서 내 정해진 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정해진 길’이 왜 불편하게 느껴졌을까? 그건 내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 나는 내 언어를 찾기 위한 길에 올라왔다. 고은 언니가 자신의 언어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 길을 찾아가고 있듯이 말이다.


나는 더이상 어딘가에 멋진 세상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이 어디에 있는지를 갈망하기보단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더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평생 떠돌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 『다른 이십대의 탄생』, 25쪽


절대적으로 멋진 세상이 없을 수도 있고, 고은 언니의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그랬듯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래서 목표를 조금 바꿔보려고 한다. 나의 언어를 만들어줄 곳에 가는 것이 아닌, 나의 언어를 구축하는 것으로. 고민의 중심에 나를 둘 수 있기를 원한다.


‘김지원편’에서 나를 사로잡은 건, ‘욜로(YOLO)’이다. 요즘 친구들이 ‘욜로’라는 말을 많이 한다. 비싼 물건을 살 때 특히나 그렇다. 그래서 처음에는 ‘얼른 사!’라는 뜻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인생은 한 번뿐이다’라는 뜻이었다. 현재 내 행복을 중시하여 소비하라는 뜻을 별생각 없이 수긍하고 은근히 즐기던 나와 다르게 지원 오빠는 깊은 글을 써놓았다.


그런데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소확행이나 욜로라는 말로 불려지면, 그리고 이것이 트랜드라 불리기 시작하면, 소비와 소비를 위한 노동을 전제해놓은 상태에서 소비의 방식만이 문제가 된다. 이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다고 외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스스로 이렇게 질문하도록 한다. “나는 욜로인가? 욜로가 아닌가?”

- 『다른 이십대의 탄생』, 118쪽


우리는 쉽게 우리가 똑같이 벌고 소비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 안에는 각자의 기준과 생각이 있다. 지원 오빠는 이 점을 짚으며 위의 문단을 이야기한다. 욜로로 규정지어 버리는 행동이, 당사자들이 다른 방법으로 스스로 규정하길 힘들게 만든다는 문장을 읽으며 이게 비단 욜로의 문제만은 아님을 깨달았다.




‘욜로’가 돈을 쓰거나 아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누는 것처럼 세상에는 사람을 두 개로 나누려는 일이 많다. 규정해버리고, 나를 설명할 많은 단어를 뺏어버린다. 성적, 직장, 그 외의 많은 기준도 이런 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욜로를 통해 생각지도 못했던 구분과 다양함이 무시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니 놀랍다. 지금도 나는 이분법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원 오빠는 욜로의 이분법이 세상을 은폐한다고 말한다. 결국에는 미래를 위한 현재의 희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왜냐하면, 결국 소비를 위해선 노동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소비에만 중점을 두는 욜로의 관점에서 노동은 오로지 소비를 위한 전제가 된다. 여기서 지원 오빠는 자유와 소비를 연결지어 설명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선택의 폭은 엄청나게 다양해졌다. 이 다양함이 우리로 하여금 충분히 자유롭다는 느낌을 주자마자, 우리는 소비를 곧 자유라고 받아들인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부딪히는 저항은 오로지 돈의 부족함 뿐이다.

- 『다른 이십대의 탄생』, 122쪽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돈이 부족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자유로움이 제한되니까 자연스레 자유는 돈에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소비만으로 삶의 가치와 방식이 제한되는 것을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자유롭기 위해 노동하는 시간은, 도대체 무엇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이분법 속에는 자유를 담을 수 없다.


여기서 글은 말한다. 인생이 한 번뿐이라면, 소비와 노동으로만 살기보다 더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냐고. 다양한 길을 찾아가는 나에게 큰 감동을 준 문장을 옮겨본다.


You Only Live Once는 소비로 축소되지 않는, 조금 더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점유해야 할 문장이다.

- 『다른 이십대의 탄생』, 123쪽


나의 언어를 찾고, 이분법에 가려졌던 자유를 찾았다. 그리고 ‘이동은편’에서 만난 질문을 통해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하여 말이다.


그동안 나에게는 ‘나중’의 일이 가장 중요했다. 사실 학교는 나중을 위해 다니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하려는 것은 나중을 위한 일이 아니면 불필요한 일이 되곤 했다. 노라샘의 말을 들은 이후 나는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것’이 미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누가 던졌는지도 모를 미끼를 좇는 물고기처럼 언제부터인가 나는 ‘하고 싶은 것’이라는 미끼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 미끼를 물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 지내온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지낸 것이 모두 취업과 진학이라는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한 가능성을 키우기 위해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 『다른 이십대의 탄생』, 180쪽


나중을 위해 산다는 말이 내가 살아온 방식과도 같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어쩌면 평생을 그렇게 살았을 수도 있다.


지금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20대의 나를 위한 것이다. ‘대학에 가고 놀아’라며 현재를 미래에 바치라는 말은 드물지 않게 들을 수 있지 않던가. 많은 사람이 현재보다는 미래를 위해 살기를 권한다. 어쩌면 온전히 현재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가정이 아닐까? 현재란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아주 짧은 순간이고, 시시각각 변화하니까 말이다.


중요한 것은 둘 중 한쪽을 고르는 것이 아닌, 현재와 미래 사이의 나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나를 미래로 연결한다면, 그렇게 둘 다 만족할 길을 찾는다면 어떨까? 어쩌면 이 고민을 계속하는 것만으로도 그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현재의 너를 위해 살아! 라는 말보다 현재와 미래를 연결할 질문을 찾아! 라고 외쳐본다.


리뷰를 마치며, 책의 프롤로그 부분에 나와 있는 문장을 인용하겠다. 이 책의 많은 질문을 통해 앞선 고민을 다른 사람의 삶과 연결하고, 몇 가지 방향을 찾아갈 수 있었다. 품고 있는 질문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어딘가 이상한, 그런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은 세계의 몇몇 부분들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하나의 질문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 『다른 이십대의 탄생』, 10쪽


글 _ 열여덟살 김채진(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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