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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다른 아빠의 탄생

다시 아이와 나, 그저 지구 주위를 맴도는 달

by 북드라망 2019. 2. 22.

다시 아이와 나, 그저 지구 주위를 맴도는 달



이비에스 방송 프로그램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본 적이 있다. 남녀 실험자들이 어느 방에 들어가면 그곳엔 다른 이성의 얼굴 사진들이 크게 걸려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호감이 가는 사람을 고르고 그 이유를 인터뷰하는 실험이었다. 실험자들의 선택 이유는 다 달랐지만 결과는 흥미로웠다. 대부분 자신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에 호감을 보였고 선호하는 이성으로 선택했었다. 즉, 우리는 자신과 닮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실험의 결과였다. 


내가 나로부터 떨어져서 바라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다른 존재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옛말에 부부가 같이 살면서 서로 닮는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서로 닮은 사람들이 같이 부부로 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부부는 그들이 낳은 아이에게서 발가락이 닮아 있음을 발견하려 한다. 결국 또 다른 존재에게 늘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는 ‘나’인 셈이다. 


사실 어찌 보면 이러한 실험의 결과는 꽤 섬뜩하다. 실험의 결과대로라면 내가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첫째와 둘째, 둘 다 엄마 뱃속에서 거의 열 달을 채우고 다행히 건강하게 태어났다. 엄마가 보고 듣고 먹는 것은 뱃속에서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느껴진다. 사실 아빠로서는 뱃속에 다른 존재가 있다는 느낌을 상상하거나 체험할 수도 없고, 아이가 나올 때 엉덩이에 수박이 낀 느낌을 알기도 어렵다. 게다가 세상에 나온 뒤 제일 먼저 품는 것도 엄마 아닌가. 

하지만, 아빠는 다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뱃속의 아이를 알 수도 없고, 초음파화면이 아니라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눈앞에 보였을 때에 아빠는 비로소 그 존재를 실감한다. 자신의 일부를 덜어내어 다른 존재로 낳는 엄마와는 달리, 아이가 다른 혹은 낯선 존재로 다가왔을 때에 비로소 아빠가 된다.


아내는 조산원에서 둘째를 낳았다. 첫째 아들과 나는 하마 같은 아내의 배를 걱정했고, 산파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둘째가 (첫째의 표현에 의하면) 엉덩이에서 나오는 것을 같이 보았다. 그때 첫째는 세 살. 하지만 둘째의 다른 존재를 만나는 데 있어서 그 애와 나 사이에 나이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렇게 첫째는 여동생의 오빠가 되었고, 나는 딸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첫째는 태어나면서 동생의 오빠가 된다고 생각했었을까? 나 역시 아내를 만나면서 둘째의 아빠가 될지 알지 못했다. 


나와의 닮은꼴은 무의식적으로도 찾거나 혹은 아닌 것들을 외면하는 세상이다. 그 와중에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다가오는 것은 분명 나의 인식을 흔들어 놓은 사건이다. 게다가 첫째도 마찬가지지만, 아빠인 나는 그게 언제인지 알지도 못한다. 목줄이 풀려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개 한 마리를 우연히 골목길에서 마주한다면, 열에 아홉은 외면하거나 불안해할 것이다. 나를 괴롭힐지 아닐지, 그저 지나갈지 아닐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아이들이라 다를 게 있을까? 그 아이가 나중에 나를 괴롭힐지, 힘이 될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최근 이슈가 됐던 ‘SKY캐슬’ 드라마를 보면 엄마와 아빠가 자식을 대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거기에 나오는 엄마들의 자식에 대한 애착은 끝이 없다. 그들의 존재 이유가 마치 자식의 성공인 듯 엄마들은 무한한 에너지와 돈을 자식들의 성공에 쏟아붓는다. 아이들이 성적에 낙담하면 같이 슬퍼하고, 학생회장 선거에 당선되면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반면 아빠들은 자식을 자신의 3D 아바타쯤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다른 동료에게 받은 모욕감을 그 동료의 아이와 같은 학교 다니는 자기 자식의 성공을 통해 복수하려 하거나, 자신의 지위나 명예에 흠이 나는 행동을 한 자식에게는 가차 없이 응징한다. 부부가 그들의 아이에게서 닮은 발가락을 찾으려는 건 같은데, 그 방법은 엄마와 아빠가 서로 다르다. 여기에는 애착과 동일시가 있다.   




예전에 내 손가락에서 나는 담배냄새는 마치 아버지의 손 같아서 좋았다. 문득 첫째 아이의 귀를 보니 그의 할아버지와 닮았고, 여치 같은 날씬한 다리도 닮았다. 평발이어서 잘 못 뛰던 할아버지와는 달리 달리기에서 1등 하는 걸 보고 놀랐다. 둘째가 나처럼 빈 박스로 집 만들기를 좋아하고, 나의 돌사진이 둘째 딸과 완전 닮았다고 느꼈을 때 재밌었다. 애착이 엄마가 맺는 아이와의 관계라면, 아빠들은 동일시를 통해 아이를 바라본다. 엄마가 아랫입술을 내밀어 머리 뒤로 까뒤집는 고통 속에 낳은 아이지만, 아빠는 그저 두 눈을 꿈쩍이며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할 일도 없다. 

  

그래서 아이들의 반항에 엄마들은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고 묻는 반면, 아빠들은 “뭐라고? 어디서 감히, 버릇없이!”라며 화를 낸다. 아이들에게 나와 동일시가 안 되는 상황이나 혹은 싫어하는 나의 단점이 닮아 보이는 행동을 할 때, 종종 화가 난다. 동일시가 안 되는 건 아이가 내 말대로 안 할 때, 단점이 닮아 보일 때는 아이의 행동에 은근 짜증날 때다. 


아직 둘째가 태어나기도 전, 말도 잘 못 하는 아이를 돌보다가 엄청 화가 난 적이 있다. 그때 난 주먹으로 있는 힘껏 책장을 내리쳐서 한쪽이 부서졌다. 다음 날 테이프로 붙여 놓았지만 원상태로 회복되진 않았다. 당시 화가 난 이유는 기억이 안 나지만, 기울어진 그 책장을 볼 때 마다 그 상황은 계속 상기된다. 또 한 번은 혼자서 저녁에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가서 함께 달리기 시합을 재밌게 했다. 그러다가 두 아이가 서로 떼 부리며 놀리고 싸우는 상황이 계속되자 화가 나서, 나는 마시던 생수통을 땅바닥에 내던지며 아이들에게 큰 소리를 질렀다. 둘째는 깜짝 놀라 서럽게 울고, 첫째는 이 상황이 뭔지 수습이 안 된 채 멀뚱히 서 있었다. 아이 앞에서는 화 안 내려고 말없이 1층으로 내려와 주먹으로 벽을 쳤던 적도 꽤 많았다. 화가 났던 그 상황들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는지’ 배신감이라기보다는, ‘네가 감히 내 말을 안 들어!’라는 생각에 욱하는 거다. 나의 아바타라고 생각했던 존재들이 뭔가 내 마음대로 통제가 안 될 때 화가 난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첫째에게 화를 더 많이 냈건 사실이다. ‘아이’라는 다른 존재와 어떻게 만나야 할지 알지 못 했다. 난 당연히 아이보다 세상도 많이 알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아이는 아직 미숙하고 세상이 뭔지도 모르고 아직 말도 잘 못하니, 당연히 내가 옳은 상황이야,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첫째 아이와 만나는 방법을 헤매게 할 뿐이었다.   

둘째와는 형평성의 문제로 드러났다. 대여섯 살 때부터 둘째에게는 ‘내가내가’병과 ‘나도나도’병이 있다고 농담하곤 했다. 무슨 일이든 자기가 하겠다는 ‘내가내가’, 뭐든 첫째와 똑같이 하려는 ‘나도나도’. 그런 상황을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자꾸 떼를 부린다고 보고 아이에게 큰소리를 낸다. 서로 다른 존재로 만난 아이와 난 당연히 하고 싶은 행동과 순간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건 그저 생각 속에만 머물고 있었다. 


첫째 아들에게 스파링 상대가 되어 등을 뚜드려 맞으면 아프긴 하다. 가르쳐준 수학문제를 자꾸 틀릴 때면 답답하긴 하다. 아들과의 오목에서 지면 승부욕이 생기긴 하다. 둘째 딸이 자기가 그린 그림을 계속 보라고 하면 지치긴 하다. 사자놀이로 등을 올라타거나 비행기놀이로 다리에 매달리면 힘들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가 나진 않는다. 아이들과 같이 놀고 있을 때는 나로부터, 아빠 역할로부터 조금은 ‘거리두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 놀이가 재밌을 때 아빠로서 아이와 노는 게 아니라 재밌기 때문에 아이와 놀고 있는 거다. 거기에 아빠의 역할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블로그에 첫째의 육아일기를 올릴 때 아이가 수박으로 온 식탁을 어지럽혀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재밌기까지 했다. 화분의 흙을 모두 꺼내서 베란다를 어지럽혀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아빠들이 엄마들에 비해 잘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마도 이 거리두기가 아닐까. 이미 아이들을 그렇게 만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이가 말하기 전부터, 움직이고 뛰고 혼자 밥 먹기 전부터, 내가 그 아이의 손과 발이 되었다. 기저귀를 갈아입히고 밥을 먹여주고 옷을 입혀 왔기에 아이가 점점 나의 분신으로 생각되는 모양이다. 내 몸에선 젖도 나오지 않는데 말이다. 특히 육아휴직을 했던 나의 경험은 아빠의 입장에 엄마의 특권을 조금 덧붙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건 위험하다. 아빠는 엄마가 아이와 만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만날 수 있고, 그렇게 만나야 한다고 본다. 이건 비단 아이를 위한 것은 아니다. 동일시의 과정이 전부 화로 나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거리두기는 상대의 존재를 좀 더 잘 들여다보는 과정인 것은 분명하다. 




자라면서 그 아이가 말을 하고 걷고 뛰기 시작하면 이제 슬슬 통제의 대상이 된다. 치우는 게 힘들어지고 아이가 귀엽게만 보이던 때도 한때였나 싶다. 그런데 한 발 떨어져 보면 그 아이는 그저 그 아이인 셈이다. 굳이 디엔에이를 들먹이며 유전자 중 일부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해도 아빠에게 아이는, 그리고 아이에게 아빠는 그저 다른 존재일 뿐이다. 


우주에 거대한 폭발로 하나의 중심이 생겨났고 그것은 태양이 되었다. 태양 주위를 맴돌던 부스러기 중 일부는 태양과 하나가 되었다. 태양과 부스러기는 우주의 기운을 받아 지구를 비롯한 여러 아이들을 만났다. 지구와 아이들은 태양 주위를 맴돈다. 부스러기는 다시 지구를 맴돌며 하나의 위성이 되는데, 이름이 달이다. 엄마가 태양이라면, 지구는 아이들이고 아빠는 달인 셈이다. 태양은 뜨겁게 지구를 비춰주지만, 달은 그저 지구 주위를 돌뿐이다.   


글_청량리(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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