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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다른 아빠의 탄생

다시 아이와 나 - 누군가를 위한, 결국은 나를 위한

by 북드라망 2019. 3. 4.

다시 아이와 나 - 누군가를 위한, 결국은 나를 위한



난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다. 타인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것이 힘들다. 내 일신의 편안함과 이익이 무엇보다 먼저다. 이타적인 척 하면서 남을 도우려 하지만, 속마음에서는 찌질한 계산을 하고 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저 사람에게 이러저러한 보답이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아니면 저 사람은 과거에 나를 많이 도와주었는데, 이에 상응하는 보답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를 고민한다. 술자리에서 호탕하게 ‘내가 쏜다!’고 이야기 하지만, 속으로는 돈 계산을 하는 ‘나’란 사람은 참 저급하면서도 없어 보이게 이기적이다.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하고 갑자기 아빠가 되었지만, 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의 벅차오르던 감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고, 이 아이가 아름답게 클 수 있도록 ‘아비’의 역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기적인 나의 모습은 사라진 듯했다. 아이의 건강을 위해 10여년 넘게 피우던 담배도(지금은 다시 피지만) 끊었다. 아이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당일 발행된 주요 신문과 주간 시사잡지를 사 모았다. 육아 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아이를 안고 ‘우리 아들~’이란 말을 달고 살았다. 나를 희생(?)해서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보면 소위 ‘부성’이라는 것이 사전적 의미처럼 강력한 ‘본성’이라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될 텐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한몸의 편안함을 생각하기도 한다.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와 노는 일이 힘들고 귀찮을 때도 자주 있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부담과 귀찮음으로 다가올 때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낳은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살아가는데, 나는 왜 ‘나’만을 생각 하며 살고 있을까? 표준대국어사전의 정의처럼 ‘남성이 아버지로서 가지는 정신적ㆍ육체적 성질. 또는 그런 본능’인 부성을 가지지 못한 내가 많이 부족해 보였다. 내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내 아버지와 나의 관계, 나와 내 아들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니 결론적으로는 아버지와 내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와 단 둘이서,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


때는 1994년 여름방학, 김일성이 사망했고, 기록적인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고3이었던 나는 단과학원 새벽반에 갔다가, 학교 보충수업을 듣고, 저녁에 독서실을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는 척 하고 있었다. 주말 아침을 먹던 중 아버지는 대뜸 ‘짐 싸라!’ 한마디를 하셨다. 더운데 공부해 봐야 잘 되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시며, 어색하게도 처음으로 부자끼리만, 일정도 확실하지 않은 강원도 여행을 가자고 하셨다. 아 이런 오늘 오후에 독서실 땡땡이 치고 친구들과 잠실야구장 가려고 했는데 망했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아버지와 춘천 닭갈비로 시작해 소양강, 청평사, 홍천, 인제, 오색약수, 양양, 강릉을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한 편의 로드무비를 찍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무리로 몸보신하라며 비싼 개고기 수육까지 사 주셨다. 


사실 아버지와의 여행은 많이 불편했다. 둘이 무엇을 함께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둘이 함께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가면서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않았다. 개그콘서트의 경상도 부자가 나오는 코너처럼, ‘가자’, ‘타자’, ‘내리자’, ‘밥 먹자’등 3음절 이내의 짧은 질문 내지 지시와 ‘네’라는 1음절 답변만 계속되었다. 하지만 3박4일 내내 썰렁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첫날 저녁 청평사 부근 민박집의 간이 샤워장에서 ‘여름엔 겨드랑이를 잘 씻어야 냄새가 나지 않는다. 이제 대학 가면 여자친구도 만나야 하니 항상 깨끗하게 잘 씻어라’며 손수 비누칠을 벅벅 해주신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성수기라 이동할 때 버스에 자리가 없는 경우도 많았는데 다리가 불편하시면서도 자꾸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시던 기억도 난다. 심지어 양양 산골의 사냥꾼이 밀렵한 노루피를 술에 타서 체력을 위해 먹어야 한다며 주시기도 했다.  


아버지는 나를 왜 강원도로 3박4일간이나 데려갔을까? 별다르게 애틋한 부자 사이도 아니었는데. 수험생활에 지친 아들을 위로하고 힘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그 전까지는 아들의 성적표에도 별 관심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여행을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까? 내가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산부인과에 있으면서, ‘아버지도 나를 얻었을 때 이런 기분이 들었겠구나’라는 생각에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생물학적 자손인 아이를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은 사전적 의미의 ‘부성’을 아버지는 발휘했었고, 아들을 낳은 나도 아들에게 좋은 것들을 해주고 싶은 ‘부성’을 발휘하려 했다. 



첼로와 수학 사이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후, 학교는 일찍 끝나고 방과 후 공동육아는 주 3일 격일로 운영해 심심해했다. 방과 후에 무엇을 할지 같이 고민해보기로 했다. 내가 아이에게 제안한 것은 ‘첼로’였다. 멋있지 않은가? 덩치 큰 남성이 굵직한 소리를 내는 악기를 부여안고 눈을 감은 채 연주하는 모습. 바이올린처럼 많은 사람들이 연주하는 악기도 아니고, 소리도 경박하지 않다. 흠, 완전 멋있어 보이는군. 지금까지 아이는 내가 추천해 주는 것을 크게 거부하지 않았고,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멋있는 첼로 연주를 배우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나의 착각. 아이는 애매한 표정을 하더니 첼로는 여자애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거부했다. 이런! 충격 두 가지. 먼저, 비싼 돈을 들여 ‘고급’ 문화 취향을 만들어주겠다는데 거부하다니. 하나 더, 집에서는 최대한 성차별적 발언과 행동을 안 하려 애썼는데 아이가 어떻게 성별에 따른 이미지 구별을 배웠을까? 




어쨌건 이런 생각은 접어 두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생각에 그럼 배우고 싶은 것은 따로 있냐고 물어봤다. 아이의 대답은 기대와 달리 ‘수학학원에 보내주세요’였다. 아! 이런 젠장. 고급진 취미 첼로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는데 아이는 정말 없어 보이게도 수학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이 수학학원에 가서 배울게 뭐가 있나. 아이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수학을 잘해서 우등생이 되고 싶다’는 간단명료한 답변이 돌아왔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고 아이에게 ‘수학은 학교 수업 시간에 배우면 된단다. 그딴 걸 학원에서까지 배울 필요는 없어’라고 말해주었다. 아이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학원에 가서 공부하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웠나보다. 아이는 가끔 친구들 집에 놀러갔다 와서 학원에 가기 싫다고 땡깡 부리는 친구들이 한심스럽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 이런 마음은 나중에 커서 가져야지. 초등학생은 학원을 보낸다 해도 가기 싫다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마도 만고불변의 진리인 지랄총량의 법칙에 따르면, 분명 나중에 커서는 부모와 사회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엇나가는 지랄 같은 삶을 살리라. 결국 수학학원을 보내는 최악의 불상사를 막기 위해 나는 첼로 제안을 철회했고, 피아노를 배우는 것으로 적당하게 타협했다. 타협과 함께 한 번 배우면 3년 이상 계속해 완전히 숙달해야 한다는 조건도 달았다. 만약 3년 이내에 그만 두면 다른 것을 배우는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라는 협박도 함께 했다. 

  


아빠의 욕망


나는 아이의 요구를 어처구니가 없다며 쓸데없는 일로 무시해버리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일’을 아이에게 강요했다. 나는 왜 아이에게 첼로를 강요했을까? 정말 아이를 ‘위한’ 일이었을까? 나름대로 아이에게 좋은 길을 제시해 주고 싶었고, 교양을 지닌 멋있는 아이로 크기 위한 바람이 있어서 결연한 마음으로 없는 돈에 최대한 아이에게 투자하려 했었다. 아버지로서 아이가 잘 성장하기를 바라는 본능인 ‘부성’을 극대화해 표출한 것이다. 


사전적 정의의 ‘부성’에 충실한 나의 행동을 비난하기 어렵다. 하지만 아이가 교양인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은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아이에게 무엇인가 시키고자 하는 마음은 아들을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의 부족함과 열등감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빈약한 문화자본 속에서 자라 다룰 줄 아는 악기도 대학 시절 학생회실에서 뚱땅거리던 기타밖에 없고, 문학적인 감수성도 제로에 수렴하는, 하지만 항상 풍부한 문화적 감수성을 가지고 싶은 열등감에 가득 차 있었다. 난 아이에게 열등감을 극복하고 싶은 욕망을 대신 이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 그 집 아이는 첼로를 하는구나’라는 부러운 시선을 받아보고 싶은, 아이를 ‘위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행동이었다. 


아마도 1994년의 아버지도 나처럼 자신의 채워지지 못한 욕망을 나에게 투영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오랜 병환으로 대학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지내야 했다. 자신의 과거 처지에 대한 울분과 아쉬움을 항상 가지고 있었고, 아마도 당신의 자식만큼은 무난하게 대학에 입학해 졸업하기를 바라고 계셨으리라. 사춘기가 지난 아들을 데리고 강원도를 돌아다니며 아버지도 별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내 모습에 비추어 볼 때 아버지도 자기를 희생하고 아버지로서 아들을 ‘위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하지만 그것은 결론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엄격한 아빠 


아내와 나는 생각이 다른 많은 부분에서 격렬하게 싸우며 결혼생활을 해 왔다. 하지만 의견이 일치하는 분야 중 하나가 자녀 양육 방식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주체성’과 ‘엄격함’이다. 이유식이 어느 정도 끝나고 돌 무렵부터 밥을 스스로 먹도록 했다. 온 식탁에 음식물이 너저분하게 날아다녔지만 떠먹여주지 않았다. 정해놓은 일정 시간에 다 먹지 않으면 밥상을 치워버렸다. 다행히 아이는 먹기를 좋아하는 성향을 타고나서 그런지 부모의 양육방식에 잘 따라주면서 스스로 식사를 해결했다. 좀 과한 측면도 있다. 세 살 때 정도 목욕탕에서 장난을 치던 아이를 심하게 체벌한 적이 있다. 숫자에 관심을 보이며, 체중계에 계속 오르락내리락 했다. 두 번의 경고 후 엉덩이를 내 손바닥으로 세게 때렸다. 우는 아이에게 뭘 잘했다고 울고 있냐며, 빨리 가서 옷 입으라고 소리쳤지만, 엉덩이에 난 선명한 손자국 두 개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마음이 아파서 그 이후로 물리적 체벌은 절대 하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 쇼핑몰에서 레고를 사 달라며 드러누운 아이를 내버려둔 채 아내와 나는 다른 곳으로 쇼핑을 하러 갔다. 다행히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아이는 부모가 안 된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하면, 더 이상 보채지 않고 별 반항과 불만 없이(아들은 그렇지 않은데, 아빠와 엄마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잘 따라주고 있다. 최근 다른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에게 반말을 하는데 자기도 그러면 안 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단호하게 ‘너가 성인이 될 때 까지 밥 해주고 보호해주는 나는 너에게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존대를 요구했다. 


나는 아이에게 왜 주체성을 강조하고 엄격한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 아이가 한 사람의 올바른 사회 구성원이 되기 바라는 ‘부성’의 발현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첼로를 가르치려던 나, 강원도 여행을 시켜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처럼 결국은 모두 ‘나’를 위한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육체적 편안함을 위해서, 더 나아가 밥을 들고 쫓아다니면서 떠먹이거나,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는 아이를 방치하거나,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의 요구를 받아주는 개념 없는 부모가 되기 싫었기 때문에 엄격한 아빠가 되었다. 친구들과 이야기 해보면 ‘아이와 소통하고 친구처럼 지내며 원하는 것을 잘 들어주어야 한다.’,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나중에 원망을 듣는다.’는 소리를 많이 듣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아이가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기 위해, 그리고 미래의 ‘아름답고’, ‘화목한’ 가족 관계를 위해 물심양면 뒷받침하는 아빠의 임무를 열심히 수행해야 하는 걸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이 현재로는 없다. 나 자신을 포함한 인간은 자신 스스로 보다는 외부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 내 아이가 자라서 성인군자가 되지 않는 이상 원망은 필연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다. 내가 아이와 친구처럼 지내거나 충분히 그의 욕망을 뒷받침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아이는 어느 순간 나를 넘어서고 극복하려 할 것이다. 그 전까지는 아이의 눈치를 보기 보다는 차라리 엄격한 아빠의 모습이 나와 아이의 관계에서 더 좋을 것이다. 너무 아이와 가까우면 나를 넘어서지 않고 아스팔트의 껌처럼 붙어 있으려 하지 않을까?





미완의 문제 - 나와 아이가 가진 욕망의 정체


나를 포함한 아빠들은 아이와 ‘놀아 준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난 이 말이 매우 거북하다. 같이 놀아야지 왜 같이 놀아주는 걸까? 놀아준다는 말의 이면에는 하기 싫은 일이지만 아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심지어 아빠들은 자신의 ‘부성’을 사회적 기준에 맞추기 위해 놀아주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을 읽기도 한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이의 ‘정상적인 성장’을 위해 의무적으로 아이와 놀아주는 것이 과연 아이와 아빠 모두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형성된 ‘아버지 상’을 자신이 추구해야 할 이상향이라 생각하는 일은 너무도 허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본능적인 ‘부성’에서 벗어나 ‘나를 위해 살겠다는’ 나도 다른 아빠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나를 위한다고 했을 때의 이상형도 결국은 사회적 기준에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 열등감의 기준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이 대중문화보다 우월하다는 사회적 기준을 철저하게 학습하고 내면화한 결과다. 엄격하고 단호한 부모의 모습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어떤 유형의 부모가 사회적 비난을 받는지 알고, 그것을 따르지 않으려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공부를 열심히 해 보겠다며 수학학원에 보내달라는 아이의 바람도 학교 공부를 더 잘해 우등생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난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는 정말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아직은 어렵겠지만, 사회가 만들어놓은 기준에서 벗어나 재미있게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모습이 올바른 삶이다. 정해진 기준을 따르는 것은 편하겠지만, 재미는 포기해야 한다. 


나와 아들 모두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 하지만 ‘나를 위한’ 것이 결코 사회가 정해 놓은 하나의 방향성을 따라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나’를 위한 것일까? 결코 쉬운 질문이 아니다. 나, 아내, 아이 모두가 함께이면서도 각자 당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질문이 해결되어야만 한다. 앞으로의 10년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


글_자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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