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아이와 나
공짜로 아빠가 되는 건 아니다
“임신은 괴롭고 출산은 아프고(둘 다 해본 적이 없으니 상상이지만) 육아는 고역이다. 아이는 앵앵 울부짖고 똥오줌을 흘리고 쓰레기를 주워 먹고 욕조에 빠지고 도랑으로 곤두박질치고 고양이를 물어뜯고 툇마루에서 굴러 떨어진다.
그런 존재에게 24시간 구속되는 것의 어디가 ‘승리’인가.
육아는 분명히 말해 ‘끝없는 불쾌함’이다.
육아를 ‘행복한 경험’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이 ‘끝없는 불쾌함’을 ‘끝없는 희열’로 바꿔 읽는 스스로에 대한 속임수에 성공했기 때문이지, 육아 행위 자체에 만인이 실감할 수 있는 ‘희열’이 존재해서가 아니다.”
- 우치다 타츠루, 이지수 옮김, 『거리의 현대사상』, 서커스, 057쪽
어떻게 불쾌함을 다룰 것인가
맨 위의 인용문은 최근에 우치다 타츠루의 『거리의 현대사상』이라는 책에서 본 구절이다. 읽자 마자 ‘이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개안開眼이라는 것인가!’ 싶을 만큼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이걸 읽고서야 분명하게 알게 되었는데, 나는 정말이지 ‘끝없는 불쾌함’을 ‘끝없는 희열’로 바꿔 읽고 있었다. 힘들기는 하지만 지칠 정도까지는 아닌 걸 보면 꽤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어렴풋하게 눈치는 채고 있었다. 이렇게 힘이 들고 짜증도 나는데, 반대로 지금껏 느껴 본 적이 없는 기쁨과 희열을 느끼곤 했었던 것이다. 아마도 아기를 돌보는 많은 부모들이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이런 기분을 느끼다 보면 정말이지 기분이 묘하다. 물론 아기를 키우기 전까지 그런 형태의 복잡한 감정을 전혀 느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매일매일, 또는 몇시간 간격으로 연속으로, 수년간 변함없이 느껴 본 적은 없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처음에는 감정 자체가 낯설다.
아이와의 관계에서, 부모가 느끼는 죄책감도 대개는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힘이 들고 짜증이 나는 감정이 우세할 때, 괜히 욱해서 아이에게 화를 내고 나면 기쁨과 희열이 죄책감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러면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다. 그때 나름대로 마음의 길을 돌리는 기술을 체득하거나 애초에 화가 날 때 기분을 푸는 다른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면 짜증과 죄책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우울의 늪에 빠지고 만다. 나의 경우엔 그러느니 그냥 살이나 찌고 말자는 기분으로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를 몸속에 집어넣으며 위기를 넘기곤 했다. 그러다보니 겉잡을 수 없이 (몸이) 커져 버려서 지난주부터는 그런 순간에 스쿼트 또는 런지를 하고 있다. 체력이 필요한 순간에 힘이 다 빠져서 흐물거린다는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살찌는 부작용보다는 그게 나은 것 같다. 아이를 다 키우고 난 다음의 인생도 생각해야 하니까.
어쨌든, 각설하고, 결국 아이를 키우는 일이나 더 넓게 보아 결혼 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는 결국 ‘불쾌감’을 다루는 기술, 그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살아온 내력이 완전히 다른 사람, 이제야 겨우 그 내력을 만들어 가는 사람, 그러니까 나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타자’(他者)들과 초근접거리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남’이라면 편하겠지만, 이쪽은 ‘남’도 ‘나’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어서 더 어렵다. 그래서 이런 관계에서는 관계를 유지해주는 ‘거리감’을 유지하기가 정말 어렵다. 엄연한 ‘타자’를 ‘내것’이라고 여긴다. 내것이 아닌 걸 내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때마다 마음이 상한다.
이 점을 깨닫고 난 다음에야 나는 우리 ‘아이’를 조금 달리 보기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에는 아이를 ‘타자’(他者)로 보질 않았던 것 같다. 말이야 ‘독립된 인격체’라든가, ‘자아를 가진 별개의 존재’라든가 하는 식으로 하기는 했지만, 그냥 생활에서는 ‘나의 일부’ 더 나아가 ‘내것’ 같은 식으로 아이와 나 사이에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개체성을 지우고 있었다. 그렇게 여기고 있으니 아이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마다, 불쾌한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괴로움을 곱절로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여전히 우리 아이는 ‘독립된 人격체’라고 보기엔 본능에 충실한 짐승에 더 가깝다. 아이와 나 사이의 거리를 두지 않고 아이를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존재로 여기는 동안, 그는 내 안의 짐승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깥의 짐승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불쾌함은 어떻게 희열이 되는가
만약에 내가 나의 아버지와 같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까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돈을 버는 데 쓰고, 시간이 날 때면 기꺼이 놀아주기는 하지만, 먹고 싸고 어지르는 동안의 뒤치닥거리는 거의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무래도 나는 우리 아버지 정도의 아버지가 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아버지는 놀아줄 때만큼은 최선을 다하셨던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는 그럴 정도로 헌신적인 캐릭터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주로 아이를 보는 역할을 맡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내가 지금보다 돈을 버는 일에 시간을 더 많이 썼다면 나는 정말이지 그냥 ‘옛날 아빠’의 표본과도 같은 아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 나는 ‘자기연민’이 워낙 많은 캐릭터라서 무슨 일을 하든 ‘내 일이 제일 힘들다’며 투덜거리며 온갖 엄살을 떠는 편이다. 그런 내가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역할을 맡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니, 집에서 애만 보는데 뭐가 그렇게 힘들어? 정말 힘든 건 나야."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을 게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이 역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게 진실이다.
우리집 아이의 주양육자가 된 다음부터 ‘밖에서 돈 버는 일’을 맡고 있는 친구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돈도 벌어 보고, 지금은 애도 키워 보고 있는데, 집에서 애 보는 게 10배는 더 힘들어.”
맞다. 이것만큼은 여러 번 다시 생각해 보아도 역시 진실이다. ‘자기연민’이 강한 나의 성향을 고려해서 가중치를 조절하자면 2~3배 정도는 더 힘든 것 같다. 직업활동에 빗대어 보자면 ‘육아’란 근무시간 내내 관리감독자를 바로 옆에 두고 일을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날에 따라서는 쉴 틈도, 농땡이를 부릴 여유도 없다. 그만큼 강도가 높다. 정서적인 면은 어떤까? 그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날그날 아이의 컨디션에 따라서 ‘상전님’이 부리는 온갖 투정과 짜증과 간섭과 침탈과 강짜와 뻗댐과…… 같은 것들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이겨내야 한다. 그러고 있자면 ‘야 너 하나도 안 귀여워 임마!’ 같은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그런 날이면 그저 부양육자가 얼른 돈 버는 일을 마치고 귀가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데, 막상 부양육자가 귀가하고 나면 순간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육아라는 게 이렇게나 불쾌한 일이다.
그래서 아기들은 그렇게나 귀여운 외모를 갖게 되었다. 그렇게나 힘든 일을 부모에게 시켜야 하니 보통의 사랑스러움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어떤 날은 짜증도 안 내고, 투정도 안 부리고, 밥도 주는 대로 넙죽넙죽 다 받아먹는다. 그러고는 너무 맛있다는 듯, 이렇게 맛있는 걸 만들어 준 아빠가 너무 좋다는 듯 입 안에 음식을 넣은 채로 활짝 웃기라도 하면, 아빠는 녹아내린다.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자신감, 에너지, 책임감, 자부심, 자긍심, 자기애(이건 아닌가?) 같은 긍정적 에너지들이 마음속에서 한방에 빵빵 터져나온다. 그때의 기분은 최악의 날을 겪어본 양육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냥 한때의 아기만 본다면 그냥 ‘아기가 오늘은 기분이 별론가 보네’,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네’ 하며 넘어갈 수 있지만, 망나니 짓을 본 양육자라면 그 낙차에서 이미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어쩐지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것 같아 조금 자존심이 상하지만, 부모란 원래 그런 것 아니겠나.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
아이와 딱 붙어서 일상을 보내다 보면 하루에도 몇번씩, 밀물과 썰물이 오가는 것처럼 불쾌감과 희열감이 교차한다. 그 감정의 교차, 낙폭이 결국 아이와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강도를 말해준다. 그 안에 있을 때는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조금 거리를 두고 보면 이게 참 대단한 일이다. 나는 세상에 그 누구와도 이렇게 '쎄게' 부딪혀 본 적이 없다는 걸 아이를 돌보면서 깨닫게 되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다른 친밀한 관계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게다가 이 점에 있어서는 엄마와 아빠는 아예 출발선이 다르다. 엄마와 아이는 아예 한몸에서 같이 살았던 적도 있지 않은가. 세상에 갓 태어난 신생아도 제 엄마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정도로 둘 사이는 특별하다. 아빠는? 따지고 보면 ‘아빠는… 아빠는… 뭐? 아빠는 뭐?’ 싶을 정도로 딱히 제자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도 그렇고, 내 친구들의 아버지들도 그렇고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제자리를 잃어버리고 자기 집에서 노숙을 하거나, 제자리에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거대한 성을 쌓아 올려놓거나, 집에서 쫓겨나거나, 자기가 못 견뎌서 도망가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게 아닐까 싶다. 결국 ‘아버지’란 스스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엄마’도 노력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말했다시피 출발점이 다르다. 훨씬 유리하다. 그래서 나는 아예 급진적인 상상을 해 보곤 한다. 아예 법으로 ‘오늘부터 육아는 아빠들이 하시오’ 해보면 어떨까. 상당수가 학을 떼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그게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될거다. 게다가 이 안은 몹시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엄마는 뱃속에서 열 달, 아빠는 밖에서 열 달’ 하면 균형도 딱 맞지 않나. 그리고 엄마들과는 달리 아빠들은 주양육자가 되더라도 훨씬 덜 헌신적일 가능성이 높다. 말인즉, 신체와 정서에 가해질 데미지도 더 적다는 말이다. 게다가 안 해본 사람이라면 이유식 만들기, 유아식 만들기, 청소, 빨래 등 개별분야 외에 집안일 전체를 굴리는 시스템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가 되리라 본다.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다. ‘아빠’는 아이가 태어나면 일단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른바 ‘부성’이라는 건 가만히 있으면 자연적으로 습득되는 게 아니다. 물론 과거에는 ‘가족을 (경제적으로) 책임진다’는 책임감 하나면 다 통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만 가지고는 얻을 수 있는 게 몹시 한정적이다. 시대가 변하고 경제가 발전이라는 걸 하면 당연히 물가도 오른다. 아버지로서 가정 내에서 ‘제자리’를 찾고 싶다면, 아니 나름대로 발붙이고 살고 싶다면 ‘제 값’을 치러야 한다. 밀물, 썰물처럼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불쾌감과 희열감의 강도를 더욱 높여야 한다.
그래서 나는 제 값을 치르고 있느냐 하면, 아, 그건 역시 좀 자신이 없다. 지금까지 쓴 것들을 보아도 알 수 있겠지만, 아이를 보는 동안 매번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양육자가 된 다음부터 ‘훌륭한 사람’, 말하자면 매사에 더욱 큰 ‘희열’을 찾고, ‘기쁨’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되고 말았다. 그건 나에게 하나의 이념이 되었는데, 그렇게 큰 이념을 가지고 있다 보니 현실이 쭈글탱이가 된 건 같은 기분을 종종 느낀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 쉽게 실망하는가, 나는 어째서 이렇게 쉽게 지치는가, 나는 어째서 이다지도 책임감이 부족한가 등등. 그러니까 아직 갈 길이 한참 멀다. 멀고 먼 길이다. ‘아빠’가 되는 건 쉬…,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훌륭한 아버지가 되는 것보다는 쉽다.
글_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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