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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다른 아빠의 탄생

아내와 나 - 우리는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까?

by 북드라망 2019. 2. 8.

우리는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잘 모르는 누군가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을 부부라고 한다며 가정의 달 중 하루인 5월 21일을 부부의 날로 만들어 놓았다. 과연 부부의 날의 취지처럼 아내와 나는 하나일까? 아니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최근 2-3년 간 아내와 나의 일과를 대략적으로 정리해 보자. 나는 2월 중순부터 11월 말 까지 평일에는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출근한다. 퇴근은 빠르면 오후 5-6시 늦으면 밤 11시. 수업 준비와 진행, 학생 상담의 쳇바퀴를 돈다. 주말은 9-10시 경 일어나 아점을 먹고 청소, 장보기, 아이와 놀기, 멍때리기를 한다. 아내의 일과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는 것 같다.(겹치지 않는 일상이 많기 때문에 그녀의 동선을 정확히 모른다!) 먼저 인문학 세미나, 마을 공유지 큐레이터 역할 등 ‘문탁네트워크’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활동들. 그 다음 청소, 빨래 등 가족의 의식주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노동들. 마지막 매일 오전 여기 저기가 아픈 몸을 달래기 위한 요가 클래스. 한 집에 살고 있지만 함께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주말에 잠깐 아내의 진두지휘아래 청소하기 정도?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가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내가 하루 일을 끝내고 늦게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세미나를 준비하며 책을 읽거나, 후기를 쓰고 있고, 아이는 자고 있다. 일찍 들어오는 날에도 같이 저녁을 먹고 치운 후 자기 전 까지 나는 아이와 목욕가거나 알까기, 오목, 부루마불 등을 하고 아내는 세미나를 위한 책을 읽는다. 10시 정도가 되면 아내는 잠들기 어려워하는 아이를 재우러 간다. 나는 멍때리며 티비를 보거나 휴대폰을 뒤적거린다. 



그렇다고 서로 대화도 없고 무관심 한 것은 아니다. 아내가 아이를 재우고 나오면 둘 만의 시간이 시작 된다. 밤 11시 경 아내가 코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말한다. “맥주 딱~ 한 캔만 할까?” 대답은 필요 없다. 나는 4캔 만 원짜리 맥주를 사러 집 앞 편의점으로 간다. 아내는 오징어나 쥐포를 굽는다. 한 시간 정도의 대화가 시작된다. 요즘 학생들의 태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 등을 이야기 하며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는 뒷담화를 이어간다. 아내가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문탁네트워크 생활에 대해서도 이 시간에 많이 듣는다. 다음 날이 휴일이라면 대화는 오랜 시간 계속된다. 편의점에도 한 번 더 가야 한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술에 취해 아내는 루쉰 전집을 꺼내 낭송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감동이야’를 연발하고 나에게도 낭송을 시킨다. 나는 문탁네트워크를 드나들며 스쳐지나가듯 읽은 스피노자의 에티카 한 구절을 펴서 읽어주며 현재 너는 이러저러한 정념에 빠져있는 상태라고 놀리며 논다. 아내는 내 직장생활의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나도 아내의 문탁네트워크 생활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뭐랄까 서로가 하는 말을 들어주는 척 하고는 있지만 각자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심야토론이나 백분토론의 느낌이다. 우리는 심야의 소소한 술자리로 서로의 삶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냥 술을 좋아해서 매일 밤 취한다. 서로 친한 척 재미있게 놀기도 하고, 과음 후 멱살 잡고 두드려 패고 맞으며 싸우기도 한다. 다음 날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잘못한 것 같아 서로 사과하기도 하고 싸움과 냉전이 일주일 이상 계속되기도 한다. 두 달 전 부터는 건강을 위해 금주를 하고 차를 마시고 있어서 술자리의 재미와 다툼도 없어졌다. 술 먹고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일이라도 함께 했는데, 차를 마시니 싸울 일도 없다. 무언가 함께 해 보려고 결혼하고 부부가 되었는데 10년이 지나고 보니 함께 하는 일은 별로 없다. 우리는 이제 정말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아내가 좋아하는 탱고? 내가 좋아하는 여행? 내가 처음 아내를 만나고 결혼해 남편이 되면서 생각했던 ‘함께’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10년 간 결혼생활을 한 지금 우리는 ‘함께’ 무엇을 했고 앞으로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30살이 넘어 내 인생은 이제 다 끝났다며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와 전인권의 ‘그것만이 내 세상’을 목 놓아 부르며 울고 있었다. 아내를 만났다. 새로 출강하게 된 학원에서 배꼽티와 스키니진을 입고,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자신감 있게 복도를 걸어가던 아내의 모습이 10년도 훨씬 지난 일인데 선명하다. 뭐라고 정확히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턱을 약간 들고 ‘비틀비틀’일 수도 있고, ‘엉덩이를 흔들며’일 수도 있는 자세로 걸어가던 서른 살을 갓 넘은 아내의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을 하러 가는 학원이었지만, 다른 학원 수업이 끝나면 지금의 아내인 ‘이선생’이 있는 학원으로 달려가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며 어떻게 한 번 썸을 타볼까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선생은 내가 던진 밑밥인 농담들에 관심과 반응을 보였다. 함께 소주나 한 잔 하자고 나에게 제안했다. 난 밀당을 시도했다. 모의고사 출제 마감을 앞두고 있어 힘들다고 튕겼다. 그러면서 소개팅을 시켜주겠다느니, 그 쪽 친구들과 내 친구들과의 3:3 미팅을 하자는 둥 또 밑밥을 던졌다. 결국 서로 처음 얼굴을 보고 한 달 쯤 지났을 때 소주에 주꾸미와 꼼장어를 먹으며 ‘오늘부터 1일’이 시작되었다. 내숭 없이 솔직하고 자유분방하면서도 대화에 재치와 애교가 넘치는 - 참고로 아내는 술을 먹으면 말 할 때 혀보다는 코를 쓴다. - 모습에 반해버렸다. 이때만 해도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을 함께 ‘하기’보다는 그냥 함께 ‘있으면’ 좋은 여자 친구였다. 1년 정도 만난 후 큰 결심이나 각오 없이 결혼을 하기로 했다. 서른 살 넘은 남녀가 1년 이상 만나면서 결혼에 이르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도 했고, 아내가 가지고 있는 털털한 성격과 소박한 꿈이 좋았다. 한창 연애를 하던 시절 아내의 집에 놀러 가서 본 아내의 방은 내가 본 최고의 무질서가 구현된 곳 이었다 바닥에 벗어 놓은 청바지들은 여러 마리 뱀이 벗어 놓은 허물처럼 방안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화장품들이 뒹굴고 있었다. 그래 이런 털털함이라면 청소를 싫어하고 게으른 나와 살아도 별 문제가 없겠구나 생각했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아내는 결혼을 하며 서울 남자를 만나 고향을 떠나는 것이 꿈이었다. 연애 시절 아내는 결혼을 위한 두 가지 귀여운 조건으로 서울에 살 것과 냉장고에 맥주 6캔을 항상 대기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런 소박한 사람이라면 함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와의 결혼 생활에 의문을 품는 아내를 이리 저리 꾀어 결국 결혼 하게 되었다. 그냥 함께 ‘있으면’ 좋을 거란 막연한 생각에.


큰 결심과 각오를 하지 않은 채 남편이 되었지만 스스로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 있던 나는 결혼을 하게 되자 대안적인 가족을 이루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 대해 착각했다. 대학시절 총여학생회장이었던 페미니스트 여친을 따라다니며 여성학 세미나 몇 번 했다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착각하며 살았고, 양성평등을 구현하는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기로 결심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나의 이러한 생각은 아주 순진한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사회의 기존 관습을 거부하지 못하는 존재로 가부장적 질서에 매우 충실한 인간이었다. 앞선 글에서 말했듯 전형적인 경상도 대가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가부장적 남성의 역할을 내면화하고 있었고, 그건 몇 권의 책을 읽고 글을 끼적거린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180도 태도가 바뀌어 무질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결혼 전의 자신을 버리고 정리청소 대마왕이 되어버린 아내와 ‘어느 정도 더러워진 시점에 청소를 할 것인가?’를 논쟁하는 것은 아내와의 본격적인 다툼 전 몸풀기에 불과했다. 지난 30년 간 다르게 살아왔던 서로의 방식이 충돌하는 다툼은 격렬하게 이어졌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가장 역할을 수행하며 동생들을 결혼시킨 아버지는 근엄한 가부장의 모습을 항상 보였다. 삼촌들과 고모들도 아버지의 지시라면 군소리 없이 따랐다. 명절이 되면 세 명의 삼촌들은 처가에도 가지 않고 3-4일 간 집에 머무르며 즐겼다. 명절 전날 모여 전야제를 한 후, 명절 당일 아침 일찍 당숙 댁과 재종숙 댁으로 남성들을 중심으로 순회를 마치고 10시 전 후로 할아버지의 차례를 모신다. 점심을 먹고 나면 술상이 차려지고 저녁 때 까지 계속 이어진다. 고모가 저녁 늦게 도착하면 또 다시 술상이 차려지고, 다음날 아침에도 손님이 오면 또 술상이 차려지는 무한 술상 반복이 이어진다. 어서 마치고 집에 가서 부모님과 형제들의 얼굴을 뵙고 싶은 숙모님들의 마음은 아무도 챙기지 않았던 것 같다. 어머니도 서울로 이사 온 후 10여년 가까이 친정에 가 보지 못했었다. 어머니는 명절이 다가오면 집에 있는 이불을 다 꺼내 세탁하고, 스무 명 가량 되는 식구들 먹일 음식을 장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실 어릴 때는 그냥 집에 사람들이 많이 와서 북적거리는 상황이 용돈도 많이 받고 흥청망청한 기분에 마냥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 ‘장남인 아버지의 장남’이라는 타이틀로 여러 가지 특별대우를 받으며 자랐다. 지금도 농담처럼 이야기 하지만 난 사촌동생들과 겸상하지 않고 어렸을 때부터 성인 남성들이 모여 밥을 먹는 곳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한 2-3년 전부터 이러한 나의 역할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지만, 내 마음 속에는 난 장남이고, 최소한 사촌들 까지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와 다른 경험을 하며 살아온 아내는 나의 이러한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님과 동생을 넘어서서 사촌들까지 내가 책임져야 할 가족이라 생각하고 있던 나는 없는 돈에도 집안에 일이 생기면 흥청망청 돈을 쓰며 과시하고 싶었다. ‘깔끔하게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가부장’이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과시적 행동을 하려고 할 때 마다 아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가족-나, 너, 아들’을 생각하라고 했고, 나는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받았는지 아냐고 되물으면서 ‘가족-할머니부터 아들까지 4대에 걸친 모두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려는 내 모습을 이해 못하는 아내를 속으로 답답하게 생각했다. 나의 결정적인 오버액션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내가 그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자세하게 상의하지도 않고 사촌들까지 모두 우리 집에 불러 명절을 쇠겠다고 선언했다. 난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내의 황당함이 이해된다. 나에겐 30년 넘게 함께한 역사가 있는 삼촌들과 사촌들이지만 아내에게 그들은 나 때문에 관계를 맺게 된 낯선 사람들일 뿐이다. 함께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결혼했으면서, 그건 까맣게 잊고 어린 시절 부터 켜켜이 쌓인 나의 경험을 함께 ‘하자고’ 강요하고 있었다. 같이 할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니었다. 나만의 생각으로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어이없는 일을 아내에게 시켰다. 게다가 어머니는 ‘장남’과 ‘맏며느리’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고부관계는 원만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여기에 애매한 태도를 보이며 가부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나의 태도로 인해 아내와 나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원만하지 못했다. 아내와 나의 의사소통방식 차이는 다툼을 극단의 상황으로 치닫게 했다. 


아내와 나는 대화의 방식이 서로 다르다. 아내는 매우 솔직하고 직설적이다. 가끔 욕을 하기도 하고, 감정이 북받치면 소리 내어 우는 경우도 많다. 나의 잘못된 지점도 정확하게 짚어내고 말해준다. 시간이 지나면서 결혼 전과는 다르게 점점 그 강도는 강해진다. 결혼 후 가족 문제를 이야기 하다가 아내에게 처음으로 욕을 배부르게 먹고 나를 향해 날아오는 안주가 담긴 그릇을 가까스로 피했을 때(지금 생각해 보면 욕먹을 만한 짓거리를 하긴 했다) 많이 당황스러웠다. 30분 만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내의 행동에 대한 충격에 휩싸여, 자고 있던 어린 아들을 안고 가출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아내에게 뒤끝은 없다. 자신이 잘못한 일은 깔끔하게 인정한다. 내가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면 따뜻하게 이해해 준다. 


나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감정의 동기화가 잘 되지 않는다. 좋아도 싫어도 감정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한다. 특히 싫다는 감정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일이 어렵다. 그렇다고 감정을 계속 억누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쌓아 두었던 감정을 맥락 없이 갑자기 아무런 관계도 없는 시점에 한꺼번에 분출한다. 난 뒤끝이 있는 사람이라 아내와 싸운 일이 있을 때 감정이 상하면 드러내 놓고 이야기 하지 않고, 폰 메모장에 간략하게 적어 둔다. 얼마 전 폰을 동기화 하지 않고 있다가 분실해 복구할 수는 없지만 가끔 아내가 술에 취해 감정을 상하는 말을 할 때는 녹음을 하거나 영상을 찍어 놓기도 했다. 감정을 스스로 제어하지도 못하고 해결하지도 못한 채 쌓아 두고만 있다가 갑자기 쏟아 놓으니 아내도 많이 당황스럽고 답답할 것이다. 아내가 별다른 이야기도 아닌데 조금 톤을 높여 이야기 했다고 캐리어에 짐을 싸서 아들에게 ‘아빠 이제 집에 안들어 온다!’ 한 마디를 남기고 2박 3일 동안 가출해 호텔에서 출퇴근 한 적도 있다. 계속 다툼이 이어지며 이제 아내와 같이 못 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 다음으로 나를 잘 아는 20년 지기를 불러 한탄 하던 중 깨달음을 얻었다. 이러저러해 고부관계도 좋지 않고, 나도 처신하기 힘들고, 아내도 힘들다고 소주 병나발을 불고 있는 나에게 친구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네가 왜 아내를 결혼상대로 결정했는지 생각해봐. 고분고분 말 잘 듣는 현모양처를 바란 것이 아니잖아. 자유분방하고 주체적인 모습을 좋아해서 결혼한 거 아니야? 이제 와서 가부장제에 순응적인 아내를 바라는 건 모순이다.” 아 그래 난 리버럴하고 솔직한 아내의 모습을 함께 하기 위해서 결혼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안의 가부장성을 이해해 주길 바라고 있다니. 친구의 지적처럼 난 모순 덩어리였다. 


아내의 직설적 화법을 쿨하게 인정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어느 날은 혼자 아무 말 없이 아내가 나에게 어떠한 유형의 말을 하는지 속으로 세어 본 일도 있다. 질책과 지시가 90% 이상이었다. 회사에서 일어났던 억울한 일을 이야기 하면 콕 집어서 내가 잘못한 부분을 질책한다. 매우 속이 상하고 가끔은 속에서 천불이 날 때도 있다. ‘남편! 힘들어도 난 당신을 믿어!’라고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는데, 아내와의 관계 뿐 만 아니라 다른 관계에서도 아직 감정 조절은 미숙하다. 오죽하면 내 안의 ‘화’를 잠재우고자 모두를 용서하는 마음에서 ‘용서에 대하여’라는 책을 사 보기 까지 했겠는가. 문제는 내 안에 있는데 실질적인 관계 속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누군가가 쓴 책에서 답을 찾으려는 어리석음이여. 그래서 잘 되지는 않지만 요새는 나도 가끔 아내의 잘못을 콕콕 질책하기도 하고, 장난스럽게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한의원 원장님이 진맥 후 나에게 꼭 필요한 처방이라고 알려 준 노래방에서 노래 크게 틀어놓고 마음껏 욕하고 소리치기도 해 보려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보니 아내가 무슨 욕쟁이 할머니 같다. 하지만 나는 아내의 속마음에 여러 명의 아내들이 모여 다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내는 가부장적인 권력행사를 부당하다고 느끼면서도 명절에 친척들이 모이면 무엇을 해먹일까 고민한다. 가부장적 가족 구조에 매몰되어 있는 남편을 보며 화가 솟구치다가도 불쌍하다는 마음에 나에게 위로의 말을 던지기도 한다. 가사노동을 싫어하지만 한편으로는 남편의 아침 식사를 챙겨주려는 전통적인 주부의 마음도 있다. 내 속마음에도 여러 명의 내가 다투고 있다. 명절에 친척들을 불러 모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평소에 잘 못 보고 멀리 떨어져 지내는 사촌동생들을 불러봐야 모두가 부담만 되겠다는 현실적인 생각도 해 본다. 예전과는 달리 아내의 언성이 높아질 때 메모와 녹음을 하지 않고 내 목소리를 크게 해 보거나 아내의 감정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있다. 곤히 잠자는 아내를 깨우지 않고 조심스레 다림질을 하고 도시락을 싸서 출근하는 나와, 아들을 포함한 모든 가족들을 깨워 아침 출근인사를 받고 싶은 생각을 가진 나도 마음속에 함께 있다. 아내도 나도 양 극단적인 생각 가운데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결국 아내와 나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식상한 말이지만 초심을 살려 상대방과 그냥 함께 ‘있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해 줬는데’라고 소리치는 교환관계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바라지 말고, 있는 존재 그대로를 인정하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다. 결혼 생활 중 절반을 무엇인가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내 생각을 강요하고 치고 박고 싸웠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양극단 가운데 어디인가를 함께 헤매고 있는 서로의 마음을 인정하고 읽어 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아내와 나는 불완전한 불혹을 지나 서로의 존재를 뒷배로 여기며 사는 지천명을 맞을 수 있겠지. 앞으로 함께 사는 동안 아내에게 욕심 내지 말고 욕도 먹고 때로는 두드려 맞으면서 그냥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고자 한다. 


글_자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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