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아빠의 일

아빠의 일



나는 출판사에 다니며 아이를 본다


나는 출판사에 다닌다. 출판사에 다니고 있으니 ‘출판인’이기는 하지만, 딱히 내가 그렇게 느낀 적이 있었던가? 얼마간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조차도 그 느낌이 딱히 강력하지는 않았다. 그건 아무래도 내가 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듯한데, 출판사에 다니기는 했어도 내가 했던 일들의 대부분은 여느 IT회사에서나 할 법한 일들이었다. 블로그를 만들고, 운영하고, 나아가 홈페이지를 만들고, 더 나아가 웹 서비스를 만들기까지 했다.(정확하게는 그것들을 설계하는 일을 했다.) ‘출판인’이 할 법한 일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떠오를 법한 일들, 원고와 씨름하거나, 저자들과 미팅을 하거나, 표지 디자인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거나 하는 일들은 대개 내 일이 아니었다. 이렇다보니 지금도 출판사에 다니고 있지만, 딱히 스스로를 ‘출판인’으로 느끼지는 않는다.(사실 지금 나의 본업은 ‘주부’에 가깝다.) 그뿐이 아니다. 이 일을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면, 그러고 싶지 않다. 이 일로 대략 10여년 정도를 살았으니 그만하면 오래했다 싶다. 장기적으로는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나을 듯하다. 


앞선 글들에서 이야기했지만, 요즘 내 일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은 이른바 ‘주부의 일’에 속하는 것들이다. 집에서 아이와 놀아주고, 아이의 밥을 챙겨주고, 옷을 갈아입히고,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고, 간식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그러니까 ‘육아’를 한다. 그리고 내가 먹을 것, 아내가 먹을 것들을 만드느라 주방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낸다. 오늘은 토마토 수프를 만들었다. 역시 내가 만든 음식이 내 입엔 가장 맛있다. 어쨌든. 요즘 같은 일상에 나는 꽤 만족한다. 집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일이 힘들기도 하고, 가끔 울화가 치밀기도 하고, 뭐 그렇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힘들고 안타까운 시간들도 기꺼이 ‘행복’으로 바꿔먹을 정도는 된다. 요리야 원래 이것저것 해 먹는 걸 좋아했으니 아무 문제 없다. 부엌이 조금 더 넓었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말이다. 여하간 나는 이 일이 아주 잘 맞는다고 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데?’ 정도는 된다. 타이밍도 좋았다. 사실 아이가 생기고, 본격적으로 집에 들어앉기 시작할 무렵 나는 바깥 일에 지쳐 있었다. 더는 조직도의 어느 한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썩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끼이는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아이가 생겼다.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라, 나는 그저 ‘옳다구나!’ 했다. 그렇게 이 일을 하게 되었다.



첫번째 직업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겪어본 직업은 대략 두가지 정도다. IT회사에 다니는 ‘웹 기획자’, 그리고 출판사에 다니는 ‘웹 기획자’다. 결국 하나 아닌가 싶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전자가 조금 더 기능적인 일을 한 데 비해 후자는 간판만 그렇게 걸어놓고 웹 컨텐츠와 관련된 온갖 일을 다 한다는 차이가 있다. 아, 그러고 보니 꼭 그렇게 두 가지라고만 할 수는 없다. 한 가지가 더 있다. 회사를 만들어 운영하다가 말아먹은 ‘웹 기획자’. 마지막 직업의 경우엔 더 떠올리고 싶지 않으니… 눈물 좀 닦고,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여하간에 나는 그렇게 웹 기획자로 직업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였고, 여지껏 그걸로 먹고살고 있다. 첫번째 직업이 그렇게 중요하다. 


뭔가 정규적인 느낌으로 ’직업’은 그러했지만, 나 스스로 내가 진짜 ‘일’이라는 걸 한다고 느꼈던 첫번째 경험은 ‘웹 기획자’로 취직하기 직전에 했던 아르바이트(이하 알바)에서였다. 당시 나는 막 군대에서 나온, 아직 군대물을 충분히 빼지 못한 동시에 사회물을 충분이 흡수하지 못한 그런 상태였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 떄문이었을까? 나는 정말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착을 했었다. 부모님께 더는 용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여기저기 온갖 알바들을 알아보고 다녔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당시에 집이 어렵기는 했었다. 그렇다고 막 당장 내가 일을 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물론 내가 복학을 하자면 또 빚을 내야 하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빚이 1억인데, 500만원쯤 더 빚을 진다고 어떻게 되거나 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까지 강박적으로 행동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돈을 벌어서 집에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알 수 없다. 여하간 그렇게 알바자리를 전전하며 굴러다녔고, 기왕이면 취업을 해버렸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기까지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정말로 취업까지 해버렸다. 그 시절이 오늘의 내 (직업) 인생이 시작된 출발점이었다. 


당시에 나는 무려 역삼동 테헤란로 한복판에 위치한 이른바, ‘벤처기업’에 취직을 했다. 그곳은 얼굴인식기술을 기반으로 PC기반 사진 정리 프로그램, 웹기반 사진공유SNS 서비스 따위를 만드는 회사였는데, 처음 6개월 동안 나는 말 그대로 유령의 삶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니다 만 대학에서 내 전공은 철학이었고, 인터넷으로는 그저 메일을 쓰고, 메일을 받고, 메일을 보내고, 메일을 지우는 것 정도밖에 할 줄 모르는 상태였으니 당시의 직업활동에 필요한 지식도 스킬도 요령도 그 어떤 것도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는 회사 사람들이 간단하게 주고받는 대화도 거의 알아듣질 못했다. 이를테면, “클라이언트단에서 얼굴을 인식을 하고, 그걸 태그값으로 저장한 상태로 웹에 올리면, 그걸 한 DB에 저장하지 말고, 이미지랑 각자 따로 저장하게 만들어야 해요.” 같은 말들 말이다. 이제 와 떠올리다 보니 그래도 저 정도면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아예 알아듣지 못한 말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그 시절 나는 매일 인터넷 IT사전을 컴퓨터 한구석에 켜놓고 있었다. 나한테 직접하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모르는 걸 빨리 익혀야 뭐라도 할 수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당시에 나는 거의 우울증 상태였다. 매일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서 두시간 삼십분 동안 광역버스를 타고 출근한 회사에서 내가 뭘하고 있는지,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 것인지, 내가 이걸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로 6개월을 보내다보면 아마 누구라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로 그만둬버리면 평생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역시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분에 꾸역꾸역 버티고 있었고, 버티다 보니 어느날 “이제 밥값 해야지? 계속 다니기만 할 거야?” 같은 소리도 듣게 되고, 그러다 보니 어느날 귀가 트이고, 입이 트이고, 개발자를 붙잡고 늘어질 줄도 알게 되고, 디자이너를 구슬러 개발자의 요구를 관철시키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하룻밤에 스토리보드 100장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버틴 덕분에 출판사에서 웹 기획 일을 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그와 비슷한 직업으로 먹고살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대견하다. 우울한 시절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버틴 경험은,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자부심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이제 무얼하며 살 것인가


그런데, 그 ‘자부심’이라는 건 이미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제 나는 딱히 그 업계(IT 그 중에서도 사용자 서비스를 만드는) 사람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그쪽에 별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나는 개인적으로 SNS도 안 한다. 그 모든 ‘단절’은 전에 다녔던 출판사에서 일어났는데, 그건 정말이지 내 인생 전체를 흔든 일이었다. ‘자부심’에 취한 탓인지, 나는 꽤 오만했었고, 그 대가를 톡톡하게 치렀다. 그렇게만 이야기해 두자. 어쨌든 그 일을 겪고 난 후에 나는 완전히 지쳐버리고 말았다. 단지 물리적으로 체력이 방전되었다거나 그런 정도의 느낌이 아니라,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구축되었던 믿음이나 신념, 뭉뚱그려서 가치관이라 부를 법한 것들이 모두 터져버린 것이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이전까지 나는 나름대로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타고난 성향도 그러거니와 옳고 그른 게 분명하고, 내가 옳다고 믿는 바에 대해서는 어떤 타협도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가치관이 무너진다는 건 바로 그런 게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완전히 옳은 것도 완전히 그른 것도 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하다못해 책이라도 읽으려면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게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야, 그러니까 내가 설 자리 정도는 알아야 읽을 수 있는 법이다. 가치관이 무너지고 나면 그 자리가 없어진다. 말인즉 ‘주장’을 담은 어떤 책도 읽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거의 2년에 걸쳐 어떤 책도 읽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전까지 나는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건 재미있기는 하지만 딱히 열과 성을 다해 그것들을 읽을 필요가 있는가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통해 주장하는 방식이 조금 낭비처럼 느껴졌다. 옳고, 그름을 일도양단으로 나눌 수 있다는 세계관 아래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러나 옳은 게 무엇인지, 그른 게 무엇인지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게 되자, 그제서야 ‘이야기’가 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제서야 ‘현실이 원래 이런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원래 사람이 사는 일이란 그때그때의 옳음, 적합함 정도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든 그걸 제대로 볼 수 있는 시야가 확보되기 전까지는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겨우겨우 읽었던 여러 고전 소설들, SF소설들 모두가 말하는 바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나서야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지 길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야기’를 쓰고 싶다. 지금은 여전히 마음속에 무언가 응어리가 져 있어서 원하는 만큼 이야기할 수 없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즘도 여전히 매일 이야기를 떠올리고 쓴다. 안타까운 건 아기를 돌보다 보면 이런저런 사정에 치여서 머릿속에서 끝나버리고 마는 경우도 많다는 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떠올리는 일이 즐겁다. 그게 요즘의 나를 지탱해 주는 일이다. 지금까지는 어떤 가시적인 성과가 있다거나, 딱히 어딘가에 글을 보내보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지금을 ‘수련기간’ 정도로 생각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여전히 뚜렷한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쩐지 내 남은 생애는 계속 이 일로 보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오기는 한다. ‘소설’의 형식을 가진 이야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 무언가, 내 마음속에 나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글로 써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아빠의 일


내가 이렇게 뚜렷한 확신이 없으면서도, 게다가 돈도 되지 않을 가능성이 팔, 구할이 넘어가는 이 일을 인생의 다음 경로로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아내 덕이다. 무엇보다 나는 ‘아빠’이지만, 여느 많은 아빠들과는 다르게 가정경제를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훨씬 자유롭기 때문이다. 나도 돈을 벌기는 하지만, 내가 당장 돈을 벌지 않는다고 해서 집안이 휘청거리거나 생계를 걱정하거나 할 일은 없다. 


물론 나는 그런 상황을 마음껏 누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자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벌써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한참 직장생활을 하거나 자기 사업을 하고 있는 ‘남자’이자 아빠인 친구들과는 얼굴을 본 지도 오래되었다. 생활패턴이 워낙에 다르기도 하거니와 요즘 같아서는 만나봐야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도 잘 모르게 되고 말았다. 가끔 그들이 생각이 나다가도 ‘굳이 만나서 뭣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고 만다. 반대로 요즘 자주 연락을 하거나 만나는 친구들은 육아와 가사일이 주업인 ‘여자’이자 엄마인 친구들이거나 아예 비혼, 싱글, 프리랜서에 가까운 직업을 가진 친구들이다. 이쪽은 만나면 화제도 풍부하거니와 만날 때마다 내일을 기꺼이 살아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의 즐거움을 준다. 인생이 이렇게 바뀌었다. 앞으로도 보통의 한국남자와 같은 형태의 인생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 같다.


30대 후반, 남들 같으면 한참 일하고 경력의 완숙기로 넘어가기 시작할 나이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경력을 마감해 버렸으니 쌓아온 것들이 그래도 조금쯤 아쉽기는 하다. 사소하게는 직장에서 큰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얻을 수 있는 기대감, 작은 일들을 마무리해 나가면서 느낄 수 있는 성취감, 동료나 상사에게 인정받을 때의 기쁨 같은 것들 말이다. 더불어 여느 아빠들과는 다른 내 인생을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의문 같은 것들도 있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이가 신생아 티를 벗을 무렵 아내도 다시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아기와 둘만 남은 집에서 시간은 참 빨리도 갔다. 아기가 자는 틈틈이 빨래를 걷고, 개고, 돌리고, 젖병들을 소독하고,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이고 하다 보면 금세 아내가 돌아올 시간이 되곤 했다. 매일매일 일과가 그렇게 채워지다 보니 시간은 정말 잘 갔다. 시간이 잘 간다는 사실이 그 시절의 나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아이는 벌써 아기 티를 벗어가고 있고, 나는 그렇게 아이를 키워낸 것 말고는 딱히 해놓은 게 없었다. 아이를 키워낸 것이야말로 대단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아이와 상관없이 풍선처럼 부풀어가는 내 자아가 흘러갈 길이 필요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그건 말했듯 사소하게는 풍선처럼 부푼 자아의 압력을 해소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면서 동시에 언제가 될지 모를 두번째 자립의 기반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삶에 충분히 만족하고, 하루하루가 고되기는 하지만 지나서 돌아보면 즐거운 일이 가득한 삶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아는바, 이런 만족이 영원히 이어질 수는 없다. 언젠가는 변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나도 인생이 다시금 격변할 때를 대비해야 하지 않겠나. 지금으로서는 허황된 것일 수 있지만, 나는 글쓰기를 오래, 꾸준히, 밀도있게 열심히 하면 그런 격변 속에서도 잘 버틸 수 있으리라 믿는다. 조직에 속해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다시 하고 싶지 않다. 누구의 아랫사람도, 윗사람도 되고 싶지 않다. 격변의 시기에 그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스스로 훈련하는 수밖에.


나는 우리 딸이 아빠를 ‘글쓰는 사람’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자라면서 누가 “아버지 뭐하시노?” 하고 물었을 때 말이다. 이건 어쩌면 지금까지 세웠던 그 모든 인생의 목표를 통틀어 가장 커다란 목표다. 무엇보다 하루하루를 한눈팔지 않고 쌓아가야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글을 쓰는 걸로는 ‘글쓰는 사람’이 될 수 없지 않나. 그리고 매일매일 쓰더라도 몇 년은 그렇게 해야 겨우 ‘몇 년 동안 매일 글을 쓴 사람’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진짜 ‘글쓰는 사람’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하루하루를 쌓아야 할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목표를 그렇게 정했으니, 잘해 보자.


글_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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