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의 허물에 대처하는 방법
군자(君子)는 공자가 생각한 ‘이상적 인간’이다. 그는 늘 때에 맞게 행동하며[時中]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私慾)보다 인(仁)을 앞세우는 존재다. 그래서 이 엄친아와 마주하고 있으면 괜히 갑갑해지고 자꾸 주눅이 든다. 완벽한 인간 앞에 선 소인(小人)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더구나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우리들의 옆집에 반드시 한둘은 살고 있는 이 엄친아들 덕분에 얼마나 길고 긴 오욕(!)의 시간을 견뎌야 했던가.^^ 그런 우리에게 공자는 병도 주고 약도 준다.
그러면서 공자는 남을 의식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고 주문한다. 그렇다. 군자는 우리 자신의 삶에 있을 뿐 저 멀리, 아주 멀리에 있는 분이 절대 아니다. 헌데 부모들은 왜 이 평범한 진리를 애써 외면하려고 하시는지, 우리는 그 앞에서 왜 당당해지지 못하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자의 말처럼 군자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그 역시 실수투성이에 좌충우돌하는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 그와 우리가 같다고? 워워~~ 섣불리 결론짓지 말자. 중요한 건 군자와 우리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매우 작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자신의 허물에 대처하는 방법에서 드러난다. 일단 군자의 허물은 ‘월식과 일식’ 같아서 천하에 다 드러난다. 그게 그의 운명이기도 하다. 유명한 ‘스타’의 허점, 아니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인간들의 허물은 트위터(?)를 타고 천하에 공개되지 않던가.^^ 그런데 군자는 그런 현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허물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우리들과는 정반대의 태도다. 군자는 자신의 허물이 드러난 자리를 그 허물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버린다.(이 엄친아!!) 공자는 군자의 이런 태도를 용(勇)이라고 불렀다. 용기란 무력으로 남을 다 때려눕히는 힘이 아니라 사지(死地)에서도 자신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인 것이다.
그런데! 군자라고 칭송받고 퍼펙트라는 찬사를 받았던 공자도 실수를 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은 자유(子游)가 다스리는 작은 읍에 놀러 갔을 때 벌어졌다. 공자가 읍에 도착하자 거문고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자유를 조롱했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
이유인즉슨 이렇다. 공자는 한 나라를 다스릴 때는 예악(禮樂)으로써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자유가 작은 마을에서 예악의 정치를 펴고 있자 그 스케일이 작다고 놀려댄 것이다. 그러자 자유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들으니 ‘군자(벼슬아치)가 도(道)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백성)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하셨습니다.” 어디서나 도를 행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게[仁] 군자라고 배웠는데 작은 마을의 군자가 되어 그것을 행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자유의 대답에 공자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공자의 태도가 재밌다. 그는 함께 온 수많은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자유의 말이 옳으니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다.” 얼렁뚱땅 농담이라고 넘기는 공자의 센스, 역시 언변의 달인이시다.^^ 하지만 여러 제자들 앞에서 쪽팔림을 감수하고 자기 허물을 드러내는 공자의 태도는 군자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공자는 곤란함에 처해도, 쪽팔린 자리에 처해도 자신의 허물에 당당해지라고 말한다. 자기 문제에 용기 있게 부딪치고 그것을 넘기 위해 자신을 끝없이 갈고 닦으라는 것이다. 이 맛없는 충고.^^ 황당한 건 그 다음이다. 자기 문제가 확연히 드러나는 경우야 고치면 그만이다. 월식과 일식처럼 드러났는데, 안 고치면 어디 가서 살 수도 없다. 하지만 자기 문제가 드러나지 않을 때, 뭐가 문제인지 몰라 문제일 때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들려주는 답은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빠지게 만든다. 유학자들은 자기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겠다고 호소하는 이들에게 담담하게 말한다. “그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깊은 곳을 살펴보라고 한다. 가끔 주위의 친구들에게 이런 유학의 답을 들려주면 도끼눈을 하고 쳐다보곤 한다. 지금 괴롭고 힘든 상황을 쉽게 빠져나갈 위로와 비책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나 유학자들이나 그런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군자는 문제가 생기면 일단 자기를 먼저 돌아본다.『논어』에는 이런 뉘앙스의 문장들이 차고 넘친다.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으면 바람을 탓하거나 조건을 탓하는 게 아니라 일단 자신에게서 그 잘못을 찾는다.’ ‘안으로 자기를 돌아봐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지를 살핀다.’ 유학이나 공자의 말이 답답증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일단 모든 문제의 핵심엔 언제나 자기 자신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우리가 그토록 숭상하는 신이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학은 외부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자들에게 매서운 채찍을 휘두른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남을 탓하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면서 사회를 탓하는 것. 거기엔 답이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매달려 있는 건 소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공자와 유학자들은 이 요상한 마음에 끊임없이 반발해왔다.
『논어』엔 이런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재밌는 문장이 있다. 군자는 덕(德)을 품고, 소인은 땅(土)을 품는다. 군자는 법(形)을 품고, 소인은 은혜(惠)를 품는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지만 곱씹어보면 참 멋진 말이기도 하다. 덕은 득(得)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덕이란 선(善)을 행함으로써 후천적으로 얻는 것이라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다. 군자가 덕을 품는다는 건 그것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의미다. 반면 소인은 땅을 품는다. 자신이 거처하는 곳의 편안함, 조건이 주는 안락함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군자는 법을 품지만 소인은 은혜를 품는다. 군자가 세상의 법이 될 만한 것을 만들어내는 존재라면 소인은 늘 남이 만든 밥상에 단지 숟가락 하나 얹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아마도 니체가 이 문장을 보았더라면 ‘귀족과 노예’의 삶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공자는 군자라야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편안함을 구하려는 자기 마음과 끊임없이 싸운다. 자기 문제를 어떻게든 자기 식으로 넘어 보려고 부단히 애쓴다. 자기로부터의 혁명! 군자는 혁명의 주체가 오로지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 전장 또한 자신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 인간이다. 군자는 자신 안의 전장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묻는다. 그렇게 빡세게 살 필요가 있느냐고, 즐기면서 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맞다. 그게 군자의 모습이고 시중(時中)의 진정한 의미다. 시공간에 맞는 리듬으로 살아가는 것, 삶의 춤꾼이 되는 것. 그래서 나는 가끔 되묻곤 한다. 진정한 춤꾼이 되기 위해선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어떻게 빡세게 살아가지 않을 수 있겠냐고, 자기 삶을 춤추게 만들려면 그만한 강도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우린 그 앞에서 지금 겁내고 있는 건 아니냐고.
다른 시공간으로 들어가면 엇박이 먼저 생긴다. 그게 생리(生理)적이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갑자기 콧물이 주르륵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전과는 다른 리듬으로 들어왔기에 몸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허물이란 이런 콧물과도 같은 것이리라. 새로운 리듬 안으로 들어왔다는 표시이자 그것 때문에 생긴 엇박 같은 것 말이다. 그렇다면 이 허물 앞에서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저 주저앉아 울기만 해야 할 것인가, 스스로 자기 허물을 비관하여 목숨을 내팽개쳐야 하는가? 그저 콧물을 닦듯이 닦아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허물로 생각하지 않는 것, 삶이 다른 조건에 처했기에 생기는 마디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공자가 생각한 진정한 용기(勇)이자 군자의 길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허물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다만 당당해질 뿐이다.
류시성(감이당 연구원)
子貢曰 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焉 過也 人皆見之 更也 人皆仰之(子張 13)
자공왈 군자지과야 여일월지식언 과야 인개견지 갱야 인개앙지
자공왈 군자지과야 여일월지식언 과야 인개견지 갱야 인개앙지
자공이 말하였다. “군자의 허물은 일식(日蝕)·월식(月蝕)과 같아서 잘못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고, 허물을 고쳤을 때에는 사람들이 우러러본다.”
군자(君子)는 공자가 생각한 ‘이상적 인간’이다. 그는 늘 때에 맞게 행동하며[時中]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私慾)보다 인(仁)을 앞세우는 존재다. 그래서 이 엄친아와 마주하고 있으면 괜히 갑갑해지고 자꾸 주눅이 든다. 완벽한 인간 앞에 선 소인(小人)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더구나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우리들의 옆집에 반드시 한둘은 살고 있는 이 엄친아들 덕분에 얼마나 길고 긴 오욕(!)의 시간을 견뎌야 했던가.^^ 그런 우리에게 공자는 병도 주고 약도 준다.
군자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군자는 하나의 고정된 상(象)이 아니다[君子不器]. 군자는 자신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求諸己].
그러면서 공자는 남을 의식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고 주문한다. 그렇다. 군자는 우리 자신의 삶에 있을 뿐 저 멀리, 아주 멀리에 있는 분이 절대 아니다. 헌데 부모들은 왜 이 평범한 진리를 애써 외면하려고 하시는지, 우리는 그 앞에서 왜 당당해지지 못하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자의 말처럼 군자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그 역시 실수투성이에 좌충우돌하는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 그와 우리가 같다고? 워워~~ 섣불리 결론짓지 말자. 중요한 건 군자와 우리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매우 작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자신의 허물에 대처하는 방법에서 드러난다. 일단 군자의 허물은 ‘월식과 일식’ 같아서 천하에 다 드러난다. 그게 그의 운명이기도 하다. 유명한 ‘스타’의 허점, 아니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인간들의 허물은 트위터(?)를 타고 천하에 공개되지 않던가.^^ 그런데 군자는 그런 현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허물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을 허물이라고 한다[過而不改 是謂過矣].
어떻게든 자신의 허물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우리들과는 정반대의 태도다. 군자는 자신의 허물이 드러난 자리를 그 허물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버린다.(이 엄친아!!) 공자는 군자의 이런 태도를 용(勇)이라고 불렀다. 용기란 무력으로 남을 다 때려눕히는 힘이 아니라 사지(死地)에서도 자신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인 것이다.
그런데! 군자라고 칭송받고 퍼펙트라는 찬사를 받았던 공자도 실수를 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은 자유(子游)가 다스리는 작은 읍에 놀러 갔을 때 벌어졌다. 공자가 읍에 도착하자 거문고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자유를 조롱했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
이유인즉슨 이렇다. 공자는 한 나라를 다스릴 때는 예악(禮樂)으로써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자유가 작은 마을에서 예악의 정치를 펴고 있자 그 스케일이 작다고 놀려댄 것이다. 그러자 자유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들으니 ‘군자(벼슬아치)가 도(道)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백성)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하셨습니다.” 어디서나 도를 행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게[仁] 군자라고 배웠는데 작은 마을의 군자가 되어 그것을 행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자유의 대답에 공자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공자의 태도가 재밌다. 그는 함께 온 수많은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자유의 말이 옳으니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다.” 얼렁뚱땅 농담이라고 넘기는 공자의 센스, 역시 언변의 달인이시다.^^ 하지만 여러 제자들 앞에서 쪽팔림을 감수하고 자기 허물을 드러내는 공자의 태도는 군자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공자는 곤란함에 처해도, 쪽팔린 자리에 처해도 자신의 허물에 당당해지라고 말한다. 자기 문제에 용기 있게 부딪치고 그것을 넘기 위해 자신을 끝없이 갈고 닦으라는 것이다. 이 맛없는 충고.^^ 황당한 건 그 다음이다. 자기 문제가 확연히 드러나는 경우야 고치면 그만이다. 월식과 일식처럼 드러났는데, 안 고치면 어디 가서 살 수도 없다. 하지만 자기 문제가 드러나지 않을 때, 뭐가 문제인지 몰라 문제일 때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들려주는 답은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빠지게 만든다. 유학자들은 자기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겠다고 호소하는 이들에게 담담하게 말한다. “그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깊은 곳을 살펴보라고 한다. 가끔 주위의 친구들에게 이런 유학의 답을 들려주면 도끼눈을 하고 쳐다보곤 한다. 지금 괴롭고 힘든 상황을 쉽게 빠져나갈 위로와 비책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나 유학자들이나 그런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군자는 문제가 생기면 일단 자기를 먼저 돌아본다.『논어』에는 이런 뉘앙스의 문장들이 차고 넘친다.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으면 바람을 탓하거나 조건을 탓하는 게 아니라 일단 자신에게서 그 잘못을 찾는다.’ ‘안으로 자기를 돌아봐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지를 살핀다.’ 유학이나 공자의 말이 답답증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일단 모든 문제의 핵심엔 언제나 자기 자신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우리가 그토록 숭상하는 신이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학은 외부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자들에게 매서운 채찍을 휘두른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남을 탓하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면서 사회를 탓하는 것. 거기엔 답이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매달려 있는 건 소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공자와 유학자들은 이 요상한 마음에 끊임없이 반발해왔다.
『논어』엔 이런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재밌는 문장이 있다. 군자는 덕(德)을 품고, 소인은 땅(土)을 품는다. 군자는 법(形)을 품고, 소인은 은혜(惠)를 품는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지만 곱씹어보면 참 멋진 말이기도 하다. 덕은 득(得)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덕이란 선(善)을 행함으로써 후천적으로 얻는 것이라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다. 군자가 덕을 품는다는 건 그것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의미다. 반면 소인은 땅을 품는다. 자신이 거처하는 곳의 편안함, 조건이 주는 안락함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군자는 법을 품지만 소인은 은혜를 품는다. 군자가 세상의 법이 될 만한 것을 만들어내는 존재라면 소인은 늘 남이 만든 밥상에 단지 숟가락 하나 얹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아마도 니체가 이 문장을 보았더라면 ‘귀족과 노예’의 삶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공자는 군자라야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편안함을 구하려는 자기 마음과 끊임없이 싸운다. 자기 문제를 어떻게든 자기 식으로 넘어 보려고 부단히 애쓴다. 자기로부터의 혁명! 군자는 혁명의 주체가 오로지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 전장 또한 자신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 인간이다. 군자는 자신 안의 전장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묻는다. 그렇게 빡세게 살 필요가 있느냐고, 즐기면서 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맞다. 그게 군자의 모습이고 시중(時中)의 진정한 의미다. 시공간에 맞는 리듬으로 살아가는 것, 삶의 춤꾼이 되는 것. 그래서 나는 가끔 되묻곤 한다. 진정한 춤꾼이 되기 위해선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어떻게 빡세게 살아가지 않을 수 있겠냐고, 자기 삶을 춤추게 만들려면 그만한 강도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우린 그 앞에서 지금 겁내고 있는 건 아니냐고.
다른 시공간으로 들어가면 엇박이 먼저 생긴다. 그게 생리(生理)적이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갑자기 콧물이 주르륵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전과는 다른 리듬으로 들어왔기에 몸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허물이란 이런 콧물과도 같은 것이리라. 새로운 리듬 안으로 들어왔다는 표시이자 그것 때문에 생긴 엇박 같은 것 말이다. 그렇다면 이 허물 앞에서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저 주저앉아 울기만 해야 할 것인가, 스스로 자기 허물을 비관하여 목숨을 내팽개쳐야 하는가? 그저 콧물을 닦듯이 닦아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허물로 생각하지 않는 것, 삶이 다른 조건에 처했기에 생기는 마디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공자가 생각한 진정한 용기(勇)이자 군자의 길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허물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다만 당당해질 뿐이다.
※ <백수는 고전을 읽는다> 시즌 1의 마지막 편입니다. (시즌 2 언제 하느냐 이런 질문 받지 않아요~ ㅎㅎ) 6월 첫째주 월요일부터는 새로운 코너로 찾아뵙겠습니다. 이제까지 <백수는 고전을 읽는다>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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