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궁한 길
기원전 497년, 공자는 노나라를 떠난다. 노나라 정치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14년 동안의 길고 긴 방랑이 시작된다.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군주를 찾아 천하를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노나라를 떠날 때 공자의 나이는 5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50대 중반의 나이에 자신의 존재지반을 떠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고향도 집도 다 버리고 떠나는 길이다. 사람들은 공자의 이 ‘무한도전’을 비아냥거렸다. 심지어 이 시기의 공자를 ‘상갓집 개’ 같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주유천하는 공자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사상과 그의 시대가 얼마나 큰 간극을 형성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이 간극이 쉽게 좁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간파했다.
노나라를 떠난 공자는 위나라로 간다. 위나라는 공자와 인연이 깊은 나라다. 공자가 처음으로 간 곳도 위나라였지만 주유천하를 끝내고 귀향할 것을 결심한 것도 위나라에 있을 때였다. 방랑의 시작과 끝에 위나라가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노나라가 아니라면 위나라에서 정치를 하고 싶다고 누누이 말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노나라와 위나라의 정치는 형제처럼 비슷하다.” 위나라는 주(周)나라가 세워지면서 강숙에게 봉해진 제후국이다. 반면 노나라는 주공에게 봉해진 나라였다. 주공과 강숙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였다. 공자는 피를 나눈 형제국인 위나라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곧 실망으로 되돌아왔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날 때의 정치현실과 위나라의 상황은 마치 ‘형제처럼’ 비슷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날 당시 노나라의 실권자들은 제나라에서 보낸 미녀들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있었다. 위나라의 제후 영공도 다르지 않았다. 영공은 당시 음탕하기로 유명했던 남자(南子)라는 여자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하고 있었다. 공자 또한 이 남자(南子)로 인해 숱한 곤욕을 치른다. 공자가 위나라에 도착하자 남자(南子)는 공자에게 만날 것을 제안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눈총은 따가웠다. 공자가 남자(南子)를 만나자 자로는 발끈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위나라에 머문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영공은 남자(南子)와 함께 수레를 타고 환관인 웅거를 시위관으로 옆에 태우고 궁문을 나서서 가는데, 공자는 뒤차를 타고 따라오게 하면서 거드름을 피우고 뽐내며 시내를 지나갔다.”* 공자는 영공과 남자(南子)의 카 퍼레이드 들러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영공이 기획한 일종의 퍼포먼스로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공자를 적절히 이용한 것이었다. 공자는 뼈 있는 말을 던지고 위나라를 떠난다. “나는 덕(德)을 좋아하기를 여색(女色)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광(匡)땅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공자는 곧 위나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영공이 군대의 일(軍旅之事)을 묻은 것도 이때다. 헌데 무슨 기막힌 인연인지 이 또한 남자(南子)와 관련된 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나라 태자가 남자(南子)를 살해하는 데 실패하고 진(晉)나라로 도망가 있었기 때문에 영공이 용병(用兵)하고자 공자에게 군을 배치하고 진을 치는 것을 물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남자(南子)와의 인연도 보통 깊은 게 아니다. 더구나 이 상황에 처해 있는 영공에게 예(禮)에 의한 정치(俎豆之事)가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영공과 공자의 대화는 공자와 그의 시대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전쟁의 시대에 군주들은 부국강병(富國强兵)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 목숨과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군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공자는 그 ‘당연’을 문제 삼는다. 왜 인간은 서로를 죽여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가. 그 ‘당연’이란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가. 경쟁이 삶을 좀 더 고귀하게 만들어주는가. 공자의 대답은 NO다. 오히려 공자는 누구나 남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때 폭력의 세기도 끝이 날 거라고 믿는다. 인간의 삶은 거기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사실 공자의 인(仁)이나 예(禮)는 완전히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강력한 요구다.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마음의 회로를 바꾸지 않는 한 존재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 공자는 ‘당연’한 것을 의심하고 그것이 인간의 길인지 심사숙고하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이러한 공자의 요구는 그 시대에 철저히 외면당했다. ‘다음날 영공이 공자와 더불어 이야기하다가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자 그것을 우러러보며 공자의 말에는 열중하지 않았다. 공자는 그곳을 떠나 다시 진(陳)나라로 갔다.’*
문제는 위나라를 떠나면서부터 발생한다. 공자는 진(陳), 채(蔡), 섭(葉) 땅을 옮겨 다니며 곤궁한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런데 공자가 채(蔡) 땅에 있을 때 초나라 군주로부터 초청장이 날아든다. 공자를 초빙해서 등용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채(蔡)와 진(陳)의 대부들은 공자 일행을 억류한다. 공자가 초나라로 가서 정치를 하게 되면 초나라가 강성해질 것이 분명하고 그렇게 된다면 소국(小國)인 자신들의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를 따르던 제자들이 쓰러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자로가 나서서 묻는다. ‘군자도 이렇게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역시 이런 상황에서 스승에게 대들 만한 제자는 자로가 유일하다. 그런데 자로의 주장 또한 일리가 있다. 이론상으로는 군자가 되면 이러한 시련을 겪지 않아야 하는 게 옳다. 인격을 수양하고 공부해서 군자가 되면 세상에 크게 쓰일 수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공자가 꿈꾸던 세상 또한 이러한 군자들이 다스리던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상황은 스승의 말과는 영~ 딴판이다. 정치에 나가기는커녕 계속해서 떠돌아야 하고 심지어는 후배들이 병들어 눕는 사태까지 발생했으니 말이다.
공자는 자로의 질문에 군자라야 곤궁할 수 있다고 답한다. 그러나 이 대답은 애매하기 그지없다. 왜 군자라야 곤궁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쓰러져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꾸며낸 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공자가 생각하는 군자란 액면 그대로다. 공자는 군자가 시중(時中)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고 믿는다. 즉, 그는 때에 맞게 중(中)을 지킬 줄 아는 인간이다. 가난할 때는 가난한 채로, 부유하면 부유한 채로 그 조건에 맞게 자신의 도(道)를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곧 군자의 삶인 것이다. 그러니 곤궁함에 처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군자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는 곤궁함 속에서도 삶의 행복을 찾기 위해 분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군자는 단지 곤궁함을 참고 견디는 존재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 매순간 ‘칼날 같은’ 중도(中道)의 길을 가는 존재다.
공자의 시대는 누구도 이렇게 힘든 군자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삶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자기 삶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의 삶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없다. 공자는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다 바쳐서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주희는 공자의 모습을 이렇게 풀어내고 있다. “성인(聖人)이 마땅히 떠나야 할 경우에는 떠나가서 돌아보고 염려하는 바가 없고, 곤경에 처해서도 형통하여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바가 없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으니, 배우는 자들은 깊이 음미해야 한다.” 주희는 떠나야 할 상황에 떠나고 곤경에 처해서도 그 상황을 원망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공자의 마음 또한 이러했을 것이다. 자신이 기대를 걸었던 위나라를 떠나야 했고 계속된 방랑은 그에게 좌절만을 안겨줬다. 이 상황에서 공자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헛헛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공자는 그 길을 피하거나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길을 편안히 여기며 거기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찾아 천하를 떠돌았다.
* 『사기』, 「공자세가」(※ 판본이 많아서 페이지를 수록하지는 않았습니다.)
류시성(감이당 연구원)
衛靈公問陳於孔子 孔子對曰 俎豆之事 則嘗聞之矣 軍旅之事 未之學也 明日遂行
위령공문진어공자 공자대왈 조두지사 즉상문지의 군려지사 미지학야 명일수행
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衛靈公 1)
재진절량 종자병 막능흥 자로온현왈 군자역유궁호 자왈 군자고궁 소인궁사람의
위령공문진어공자 공자대왈 조두지사 즉상문지의 군려지사 미지학야 명일수행
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衛靈公 1)
재진절량 종자병 막능흥 자로온현왈 군자역유궁호 자왈 군자고궁 소인궁사람의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공자에게 진법(陳法-병법)을 물었다. 공자께서는 “조두(俎豆)[제기(祭器)]에 대한 일은 일찍이 들었거니와, 군대에 관한 일은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하시고, 다음날 마침내 떠나셨다.
진(陳)나라에 있을 때에 양식이 떨어지니, 종자(從者)들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자로가 성난 얼굴로 공자를 뵙고, “군자(君子)도 또한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라야 본래 곤궁할 수 있으니, 소인(小人)은 곤궁하면 넘친다.”
진(陳)나라에 있을 때에 양식이 떨어지니, 종자(從者)들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자로가 성난 얼굴로 공자를 뵙고, “군자(君子)도 또한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라야 본래 곤궁할 수 있으니, 소인(小人)은 곤궁하면 넘친다.”
기원전 497년, 공자는 노나라를 떠난다. 노나라 정치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14년 동안의 길고 긴 방랑이 시작된다.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군주를 찾아 천하를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노나라를 떠날 때 공자의 나이는 5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50대 중반의 나이에 자신의 존재지반을 떠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고향도 집도 다 버리고 떠나는 길이다. 사람들은 공자의 이 ‘무한도전’을 비아냥거렸다. 심지어 이 시기의 공자를 ‘상갓집 개’ 같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주유천하는 공자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사상과 그의 시대가 얼마나 큰 간극을 형성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이 간극이 쉽게 좁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간파했다.
노나라를 떠난 공자는 위나라로 간다. 위나라는 공자와 인연이 깊은 나라다. 공자가 처음으로 간 곳도 위나라였지만 주유천하를 끝내고 귀향할 것을 결심한 것도 위나라에 있을 때였다. 방랑의 시작과 끝에 위나라가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노나라가 아니라면 위나라에서 정치를 하고 싶다고 누누이 말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노나라와 위나라의 정치는 형제처럼 비슷하다.” 위나라는 주(周)나라가 세워지면서 강숙에게 봉해진 제후국이다. 반면 노나라는 주공에게 봉해진 나라였다. 주공과 강숙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였다. 공자는 피를 나눈 형제국인 위나라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곧 실망으로 되돌아왔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날 때의 정치현실과 위나라의 상황은 마치 ‘형제처럼’ 비슷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날 당시 노나라의 실권자들은 제나라에서 보낸 미녀들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있었다. 위나라의 제후 영공도 다르지 않았다. 영공은 당시 음탕하기로 유명했던 남자(南子)라는 여자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하고 있었다. 공자 또한 이 남자(南子)로 인해 숱한 곤욕을 치른다. 공자가 위나라에 도착하자 남자(南子)는 공자에게 만날 것을 제안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눈총은 따가웠다. 공자가 남자(南子)를 만나자 자로는 발끈했다.
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雍也 26)
자견남자 자로불열 부자시지왈 여소부자 천염지 천염지
자견남자 자로불열 부자시지왈 여소부자 천염지 천염지
공자께서 남자(南子)를 만나시자, 자로가 불쾌하게 여겼다. 이를 보신 공자께서 맹세하시기를 “내 맹세코 잘못된 짓을 하였다면 하늘이 나를 버리시리라! 하늘이 나를 버리시리라!”
이게 끝이 아니다. “위나라에 머문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영공은 남자(南子)와 함께 수레를 타고 환관인 웅거를 시위관으로 옆에 태우고 궁문을 나서서 가는데, 공자는 뒤차를 타고 따라오게 하면서 거드름을 피우고 뽐내며 시내를 지나갔다.”* 공자는 영공과 남자(南子)의 카 퍼레이드 들러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영공이 기획한 일종의 퍼포먼스로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공자를 적절히 이용한 것이었다. 공자는 뼈 있는 말을 던지고 위나라를 떠난다. “나는 덕(德)을 좋아하기를 여색(女色)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광(匡)땅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공자는 곧 위나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영공이 군대의 일(軍旅之事)을 묻은 것도 이때다. 헌데 무슨 기막힌 인연인지 이 또한 남자(南子)와 관련된 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나라 태자가 남자(南子)를 살해하는 데 실패하고 진(晉)나라로 도망가 있었기 때문에 영공이 용병(用兵)하고자 공자에게 군을 배치하고 진을 치는 것을 물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남자(南子)와의 인연도 보통 깊은 게 아니다. 더구나 이 상황에 처해 있는 영공에게 예(禮)에 의한 정치(俎豆之事)가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영공과 공자의 대화는 공자와 그의 시대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전쟁의 시대에 군주들은 부국강병(富國强兵)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 목숨과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군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공자는 그 ‘당연’을 문제 삼는다. 왜 인간은 서로를 죽여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가. 그 ‘당연’이란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가. 경쟁이 삶을 좀 더 고귀하게 만들어주는가. 공자의 대답은 NO다. 오히려 공자는 누구나 남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때 폭력의 세기도 끝이 날 거라고 믿는다. 인간의 삶은 거기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사실 공자의 인(仁)이나 예(禮)는 완전히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강력한 요구다.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마음의 회로를 바꾸지 않는 한 존재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 공자는 ‘당연’한 것을 의심하고 그것이 인간의 길인지 심사숙고하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이러한 공자의 요구는 그 시대에 철저히 외면당했다. ‘다음날 영공이 공자와 더불어 이야기하다가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자 그것을 우러러보며 공자의 말에는 열중하지 않았다. 공자는 그곳을 떠나 다시 진(陳)나라로 갔다.’*
문제는 위나라를 떠나면서부터 발생한다. 공자는 진(陳), 채(蔡), 섭(葉) 땅을 옮겨 다니며 곤궁한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런데 공자가 채(蔡) 땅에 있을 때 초나라 군주로부터 초청장이 날아든다. 공자를 초빙해서 등용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채(蔡)와 진(陳)의 대부들은 공자 일행을 억류한다. 공자가 초나라로 가서 정치를 하게 되면 초나라가 강성해질 것이 분명하고 그렇게 된다면 소국(小國)인 자신들의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를 따르던 제자들이 쓰러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자로가 나서서 묻는다. ‘군자도 이렇게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역시 이런 상황에서 스승에게 대들 만한 제자는 자로가 유일하다. 그런데 자로의 주장 또한 일리가 있다. 이론상으로는 군자가 되면 이러한 시련을 겪지 않아야 하는 게 옳다. 인격을 수양하고 공부해서 군자가 되면 세상에 크게 쓰일 수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공자가 꿈꾸던 세상 또한 이러한 군자들이 다스리던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상황은 스승의 말과는 영~ 딴판이다. 정치에 나가기는커녕 계속해서 떠돌아야 하고 심지어는 후배들이 병들어 눕는 사태까지 발생했으니 말이다.
공자는 자로의 질문에 군자라야 곤궁할 수 있다고 답한다. 그러나 이 대답은 애매하기 그지없다. 왜 군자라야 곤궁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쓰러져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꾸며낸 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공자가 생각하는 군자란 액면 그대로다. 공자는 군자가 시중(時中)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고 믿는다. 즉, 그는 때에 맞게 중(中)을 지킬 줄 아는 인간이다. 가난할 때는 가난한 채로, 부유하면 부유한 채로 그 조건에 맞게 자신의 도(道)를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곧 군자의 삶인 것이다. 그러니 곤궁함에 처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군자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는 곤궁함 속에서도 삶의 행복을 찾기 위해 분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군자는 단지 곤궁함을 참고 견디는 존재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 매순간 ‘칼날 같은’ 중도(中道)의 길을 가는 존재다.
공자의 시대는 누구도 이렇게 힘든 군자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삶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자기 삶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의 삶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없다. 공자는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다 바쳐서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주희는 공자의 모습을 이렇게 풀어내고 있다. “성인(聖人)이 마땅히 떠나야 할 경우에는 떠나가서 돌아보고 염려하는 바가 없고, 곤경에 처해서도 형통하여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바가 없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으니, 배우는 자들은 깊이 음미해야 한다.” 주희는 떠나야 할 상황에 떠나고 곤경에 처해서도 그 상황을 원망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공자의 마음 또한 이러했을 것이다. 자신이 기대를 걸었던 위나라를 떠나야 했고 계속된 방랑은 그에게 좌절만을 안겨줬다. 이 상황에서 공자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헛헛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공자는 그 길을 피하거나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길을 편안히 여기며 거기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찾아 천하를 떠돌았다.
* 『사기』, 「공자세가」(※ 판본이 많아서 페이지를 수록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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