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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백수는 고전을 읽는다

백수들이여, 그릇을 깨라!

by 북드라망 2012. 4. 23.
백수불기(白手不器)

류시성(감이당 연구원)

子曰 君子不器(爲政 12)
자왈 군자불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君子)는 그릇(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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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에서 내가 처음 배운 문장이다. 그래서 몹시 애착이 간다. 아니 사랑한다! 왜냐. 일단 짧다. 우리 이런 거 좋아한다. 짧아서 외우기 쉽고 강한 임팩트가 있는 것들. 그런데 단 여섯 글자로 된 문장에 무슨 임팩트가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아이들은 이렇게 물어온다. “군자는 그릇 장수였나요?”(헉!) 헌데『논어』의 베스트 문장을 추릴 때면 어김없이 이 문장이 뽑혀 나온다. 더구나 난 세상의 모든 백수가 이 문장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체 뭣 때문에?

공자가 살던 시대. 군자(君子)는 지배계급을 의미한다. 반대로 소인(小人)은 피지배계급이다. 그런데 공자는 이 구도를 과감히 깨 버린다. 나중에 더 살펴보겠지만 공자에게 ‘군자’는 남을 다스리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데 능통한 인간이다. 사리사욕을 절제하고 지배계급으로서 지켜야 할 덕목에 충실한 인간. 반면 ‘소인’은 이걸 깡그리 무시하고 자기 배 채우기에 급급한 인간이다.

그런데! 이 작업은 실로 위험하다. 지배계급이 생사여탈권을 모두 쥐고 있던 이 시대. 일개 사(士)계급이, 아니 백수 주제에 이렇게 외친다고 상상해 보라. ‘니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어디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지만 계급을 분별하는 언어에 윤리적 축을 부과해 버린 이 사건 이후. 정치지도자가 군자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그는 소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만다. 그러니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보면 ‘반동’이 따로 없지 않은가.

그럼 공자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군자의 용법을 달리했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욕망의 재배치다. 땅이 있는데도 더 많은 땅을 갖겠다고 전쟁을 벌이는 놈들. 사람 목숨이 파리보다 못한 것으로 취급되는 시대. 공자는 이 시대의 폭력이 지배계급의 사욕(私慾)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니 우리 같은 속인들의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려면 그들의 욕망이 바뀌어야 한다. 공자는 정치에 나가 그들의 사욕을 제어하고자 했다. 비록 아무도 그를 써주진 않았지만 그에게 정치란 폭력의 세기와 결별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절묘한 건 여기다. 공자는 사(士)다. 그는 무엇보다 사(士)계급의 철저한 수신을 요구한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사욕을 제어할 힘을 자기 내부에 갖추라. 그 힘을 확장시켜 집안을 다스리고 나아가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라.

전쟁만 하던 놈들과는 다른 욕망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라는 요구. 공자는 이 요구에 부응하는 이들이 정치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이들을 군주 주변에 배치해 그의 사욕을 제어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믿음은 곧 실현되고야 말았다. 공자 이후 동양은 사(士)의 세상이 되지 않았던가. 그가 죽는 순간까지 사(士)의 교육에 매진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자의 ‘군자’(君子)는 여기서 탄생한다.

그럼 불기(不器)란 무엇인가. 일단 직역하면 ‘그릇이 아니다’다. 그럼 그릇이란 뭔가. 쉽게 생각하면 된다. 머그잔, 밥그릇, 국그릇, 쟁반 등등. 그런데 이 그릇들은 대부분 용도가 정해져 있다. 밥은 밥그릇에 국은 국그릇에 먹는 게 보통이다. 군자가 그릇이 아니라는 말은 이 용도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밥그릇도 되었다가 국그릇도 되었다가. 수시로 변하는 그릇.

사용자 삽입 이미지고정된 '그릇'에 갇히게 되면, 우리의 사유는 그 '그릇'이라는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사실 이 부분이 흥미롭다. 일단 불기(不器)는 그릇이다. 뭐든 담아낼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릇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그릇은 담기는 것에 따라 자기 모양을 바꿀 줄 안다. 담기는 내용물에 딱 들어맞는 그릇이 되는 것. 그럼 이 그릇이 처음부터 ‘불기’상태로 존재했던가. 아니다. ‘불기’는 만들어진다. 밥그릇이었다가 국그릇이 되기 위해선 먼저 밥그릇인 자신을 깨야 한다. 즉, 매순간 그릇을 깨고 만드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하는 것, 이것이 ‘불기’의 경지다. 이 점에서 군자는 쉼 없이 자기 그릇을 깨고 있는 존재다.

그럼 군자는 왜 불기여야 하는가. 지배계급으로서 그는 만백성의 마음을 담아야 한다. 지금도 정치인들은 앵무새처럼 말하지 않던가. ‘국민을 위해!’ 그렇다. 모든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보다 잘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뿐이다. 이건 비단 동양의 군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지도자가 스스로 떠안은 의무다. 지도자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대신 백성들은 이 의무를 지도자에게 요구한다. 그런데 이렇게 물어보자. 당신에게 그런 존재가 되라고 한다면? 권력을 줄 터이니 세상의 그 누구와도 불화 없이 살아갈 존재가 되라고 한다면? 그 상태까지 자신을 밀고나가라고 요구한다면? 아무리 권력의 맛이 달다 해도 좀 머뭇거려지지 않는가.(나만 그런가?) 그런 점에서 불기(不器)란 지배계급에겐 커다란 족쇄다.

여기서 좀 헷갈린다. 그럼 왕은? 그저 왕으로 태어났을 뿐인데 군자에 불기까지 해야 한다? 이건 너무 고달프다. 그래도 왕인데……. 그래서 이 가련한(?) 왕들을 놀게 한다.^^ 군주는 단지 그릇(전문가)을 활용해 세상을 평안하게 하면 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서도 안 된다. 아랫사람들이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배치할 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왕이 놀아도 세상은 저절로 돌아가는 것. 이걸 동양에선 무위(無爲)의 정치라고 불렀다. 이때 왕은 좀 다른 의미에서의 불기다. 그는 그릇들을 쓸 뿐 스스로 그릇이 되진 않는다. 그러니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불기’하는 방식이 다 다르다. 천개의 불기가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공자가 살던 시대. 무위(無爲)하는 군주가 없다. 다 지들 배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지가 다 한다(有爲). 더구나 백성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 불기하는 지배계급도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권력을 갖고 무위(無爲)하고 불기(不器)하기 무지 힘들다. 그래서 공자도 솔직하게 말한다. 성인(聖人)도 군자불기(君子不器)는 어려웠다고. 성군(聖君)이라고 불리던 요순(堯舜)도 늘 이것을 근심하였다고. 그러나 그것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이 세상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공자는 그 누구도 차기 꺼리는 이 족쇄를 선뜻 자신에게 채운다. 군자불기(君子不器)!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 백수들은 왜 이 문장을 읽어야 하는가. 사실 요새 백수들은 공자시대의 사(士)계급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배운 것은 많으나 일자리는 없고 출세는 요원하다. 그렇다고 돈이 많은 것도 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공자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미천한 계급출신으로 평생 떠돌이 백수로 살아야 했던 공자. 우리는 이 선배-백수에게서 뭘 배워야 하는가. 공부? 글쓰기? 예법? 아니다. 그것은 나중 일이다. 오히려 권력을 불편하게 만드는 불순한 욕망. 자기 그릇을 과감히 내던지는 깡다구. 이것이 우리 시대의 사(士), 백수에게 필요한 것이리라.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단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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