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왈 군자식무구포 거무구안 민어사이신어언 취유도이정언 가위호학야이
1587년 명나라 말기. 절친하던 두 사람, 이세달과 이탁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진다. 이세달은 이탁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한다. 이러한 마음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아야 학문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탁오는 이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편안하고 배부른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품성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는 오직 학문 한 가지 일이 중요한 까닭에 때로 서둘러 그것을 추구하느라 저절로 배부름과 편안함을 모르게 된 것이지, 그런 것들의 추구에 마음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배불리 먹고 싶은 욕망,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욕망. 이세달은 이 욕망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서의 학문을 꿈꾸고 이탁오는 학문이 그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한다. 이들의 논쟁, 이들의 차이. 그 한가운데 오늘 우리의 문장이 자리 잡고 있다.
먼저 주목해서 봐야할 것은 이 문장의 구조다. 이 문장은 군자(君子)로 시작해 호학(好學)으로 끝난다. 군자가 전체 문장의 주어라면 호학은 그 서술어에 해당한다. 도식적으로 풀면 ‘군자는 배우기를 좋아한다’라는 뜻이 된다. 문제는 군자와 호학 사이에 끼어 있는 나머지 구절들이다. 사실 이세달과 이탁오의 차이도 여기서 생겨났다. 그러니 그들의 논쟁을 제대로 보려면 이 구절들에 집중해야 한다. 흥미로운 건 군자가 되기 위한 미션(!)들이 등장한다는 것. 공자는 이 미션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하달(?)한다.
일단 군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미션은 과식금지다. 이것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아우성이 들리지만 군자가 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 과식을 표현하는 글자가 재밌다. 너무 많이 먹어서 더는 먹을 수 없다는 뜻을 가진 포(飽). 이 포(飽)는 먹을 식(食)과 꾸러미 포(包)로 이루어져 있다. 포(包)는 아직 팔이 생기지 않은 아이(巳)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상태를 그린 글자다. 그러니 너무 먹어서 여자가 아이를 밴 것처럼 배가 뽈록하게 나온 모습. 이게 포(飽)의 상태다.(갑자기 아랫배를 쳐다보게 된다. 쩝!)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바로 이 똥배(?)와 군자 사이의 관계다. 왜 공자는 배 나온 군자를 싫어했는가. 일단『논어』에서 군자는 보통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지배계급 혹은 공자가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 하지만 그 어디에도 이건 지배계급, 저건 이상적인 인간이라는 표지가 없다. 즉, 문맥에 따라 감으로 때려 맞춰야 한다는 것. 그런데 여기, 군자를 지배계급으로 볼 경우. 매우 흥미로운 결과가 도출된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당시 지배계급은 타워팰리스에 살면서 늘 산해진미를 입에 달고 살 수 있는 존재들이다. 과거 통통한 몸이 미인(美人)으로 취급됐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오동통한 몸은 잘 먹을 수 있는 좋은(부유한) 집안의 여자를 의미했다. 헌데 지배계급이 ‘몸매의 종결자’가 될 수 있었던 건 백성이 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제때 세금 내주고 전쟁에 나가 죽어 준 대가로 얻어진 게 바로 지배계급의 안락함이다. 그럼 당연히 백성을 위해 뭔가 해야 할 터인데 똥배가 나오도록 먹고만 있다? 이거 눈 뜨고는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일이다. 과거 유학자들은 이런 인간을 일러 자신의 ‘직분’을 망각한 처사라고 비난했다.
공자가 지배계급에게 욕심을 줄이라고 말하는 것. 사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는 다르다. 일단 그 말이 놓여있는 배치가 다르다. 공자가 한 이 말은 공적인 장에서 활동하는 정치인을 표적으로 한다. 공인을 향해 던지는 지식인의 비평인 것이다. 또한 ‘너네가 그렇게 살면 우리 다 굶어죽는다’는 엄포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렇다면 이 탐심(貪心)으로부터 어떻게 해방될 것이냐에 있다. 이에 대한 공자의 해답은 간단하다. 공부하라! 탐심과의 거리를 만들어 내려면 먼저 그 탐심이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걸 알아가는 게 바로 공부다. 내가 살아가는 데 얼마나 필요한지, 아니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이런 걸 모르고서는 배에 지방이 잔뜩 끼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첫 번째 미션의 핵심은 ‘너 자신을 알라!’다.
지금 나를 구성하고 있는 배치는 어떤 것인지, 나의 환경이 나를 말해준다.
군자가 되기 위한 두 번째 미션! 일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신중하라! 좀 과격하긴 하지만 알고 나면 이 미션도 흥미진진하다. 일단 여기서도 글자를 좀 배우고 가자.
민(敏). 민첩하다는 뜻을 가진 민(敏)은 매(每)와 복(攵)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每)는 비녀를 꽂은 어머니(母)를 그린 것이고 복(攵)은 회초리를 뜻한다. 즉,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맞는 장면이 담겨 있는 글자인 것. 그런데 회초리는 배운 것을 몸에 익히지 않고 반복해서 실수를 했을 때 찾아온다. 일에 있어서 민첩하게 한다는 것도 이런 정황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도 그렇지만 근대 이전, 군자에게 제일 많이 요구되었던 건 판단력과 실천력이다.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죽는 상황이라면 빨리 거기에 대처해야 한다. 버퍼링이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법! 만약 지도자가 버벅거리면 백성들은 금세 돌아선다.『논어』에서 군자를 이야기할 때 행동에 민첩함(敏於行)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다. 더구나 이 시절엔 아이폰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한 번 내린 결정을 돌이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니 정확한 판단력과 실천력은 군자에게 요구되는 필수덕목이었던 것.
말을 삼간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번은 자공이 공자에게 군자에 대해 물은 일이 있다. 그러자 공자 왈. “먼저 행동하고 말이 그 행동을 따라오게 하면 된다.” 또 한 대목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까닭은 실천이 내뱉은 말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서다.” 즉, 말로 하기에 앞서 그것을 먼저 실천하라는 주문이다. 군자도 마찬가지다. 한 국가의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행일치가 담보되어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 주변엔 언행불일치를 밥 먹듯이 하는 정치인들만 있지만,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리더는 말과 행동 사이의 어긋남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신뢰야말로 백성을 이끌어 가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다.
세 번째 미션! 이 미션은 앞의 두 미션의 수행을 전제한다. 두 미션을 착실히 수행했는데도 미진한 게 있을 때, 도(道)를 깨우친 사람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로잡는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계속 배우라는 의미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도(道)다. 군자가 자신을 개선시키기 위해 가까이 해야 한다는 도사님(!), 그가 깨우친 도(道)란 뭐란 말인가. 사실 동양에서 도(道)라고 하면 뭐든 다 통한다. 그래서 도(道)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다들 정신줄을 놓는다.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가에서의 도(道)는 그나마 좀 명확하다. ‘내면적 세계와 외면적 세계가 어긋나지 않는 상태.’ 유학에서는 자신이 꿈꾸는 세계와 살아가는 현실이 딱 일치하는 걸 도(道)라고 규정한다. 여기에 부차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일단 이 도(道)의 핵심은 현실과 이상의 완벽한 일치이다. 내가 저걸 꼭 사고 싶은데 현실이 받쳐준다. 이것도 도(道)에 해당한다.^^ 자기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따라도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상태. 공자는 이걸 일흔에 경험했다고 서술한 바 있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군자란 바로 이 상태를 지향하는 인간이다. 아니 자기 혼자 이런 세계를 경험하는 게 아니라 만민과 함께 그 세계로 나아가려는 인간이다. 그러나! 이거 쉽지 않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변한다. 그 안에서 도(道)를 실천하려면 매 순간 그 상황에 맞게 변주되어야 한다. 군자가 불기(不器)여야 한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헌데 이 도(道)로 나아갈 수 없다. 그때는? 배운다!^^ 불치하문(不恥下問)!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도(道)를 얻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낮은 신분의 사람에게라도 묻고 배운다!
언제 어디서든 배움은 가능하다!
결국 세 가지 미션은 자연스레 호학(好學)과 연결된다. 자신의 욕망을 알기 위해, 일을 민첩하게 하기 위해, 도(道)에 나아가기 위해. 호학(好學)은 필수적이다. 즉, 호학(好學)은 앞의 세 미션을 총괄하는 종합편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이세달과 이탁오의 차이도 이 호학(好學)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생겼다. 이세달에게 호학(好學)은 가학(可學)의 형태다. 특별한 조건에 들어가야만 학문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에게 학문은 고원하고 저 멀리 있는 순수한 무엇이다.
그러나 이탁오에게 호학(好學)은 좀 다르다. 그는 일단 호학(好學)한다는 게 뭔가에 대해서 다시 묻는다. 아니 학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학문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그가 도달한 결론은 학문이란 언제나,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탐심(貪心)이 일어나는 그 자리, 실수와 구설수로 점철된 인생일지라도 그 자리. 이 자리에서 공부하는 것. 그에게 호학(好學)은 특별한 무엇이 아니다. 자기를 넘어가려는 존재라면 지금 당장하고 있는 것. 그게 곧 학문인 것이다. 배움의 일상성!
이 문장의 내공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배부름과 편안함만을 구하지 않는 것, 일에 민첩하고 말에 정성을 다하는 것, 모르면 묻는 것, 즐겁게 공부하는 것.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여기에 군자의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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