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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백수는 고전을 읽는다

부모의 죽음,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by 북드라망 2012. 4. 9.
아버지는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는 내 몸을 기르셨네

류시성(감이당 연구원)

宰我問 三年之喪 期已久矣 君子三年不爲禮 禮必壞 三年不爲樂 樂必崩
재아문 삼년지상 기이구의 군자삼년불위례 례필괴 삼년불위악 악필붕
舊穀旣沒 新穀旣升 鑽燧改火 期可已矣
구곡기몰 신곡기승 찬수개화 기가이의
子曰 食夫稻 衣夫錦 於女安乎 曰 安
자왈 식부도 의부금 어녀안호 왈 안
女安則爲之! 夫君子之居喪 食旨不甘 聞樂不樂 居處不安 故不爲也 今女安則爲之!
여안즉위지! 부군자지거상 식지불감 문악불락 거처불안 고불위야 금여안즉위지!
宰我出. 子曰 予之不仁也 子生三年 然後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재아출. 자왈 여지불인야 자생삼년 연후면어부모지회 부삼년지상 천하지통상야
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陽貨 21)
여야유삼년지애어기부모야

재아가 물었다. “삼년상의 기간이 너무 깁니다. 군자가 삼 년 동안 예(禮)를 행하지 아니하면 예(禮)가 반드시 무너지고, 삼 년 동안 음악을 연주하지 아니하면 음악도 반드시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묵은 곡식이 동나고 햇곡식이 이미 익었으며, 불붙이는 나무를 한 차례 바꾸어 사용하였으니 일 년에 상(喪)을 끝낼 만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쌀밥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는 것이 네 마음에 편하겠느냐?” “편합니다.” “네가 편하다면 그렇게 해라! 대체로 군자가 상(喪)을 입을 때에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거처함에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네가 편하다면 그렇게 하거라!”

재아가 나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재여는 인(仁)하지 않구나! 자식은 태어난 지 삼 년 된 뒤라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난다. 삼년상은 천하의 공통적인 상례(喪禮)다. 재여도 자기 부모로부터 삼 년 동안 사랑을 받지 않았던가?”

『논어』「리인」(里仁)편에 등장하는 문장. 子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자왈 부모지년 불가부지야 일즉이희 일즉이구) 부모의 나이를 알면 한편으로는 기쁘고(喜) 한편으로는 두렵다(懼). 부모 나이를 알아도 별다른 감흥조차 없는 요즘. 아니 부모 나이도 모르는 대학생이 절반에 이른다는 요즘. 참 이상한 취급받기 딱 좋은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지 궁금하다. 나이 든 부모가 아직 내 곁에 있어서 기쁜 마음, 부모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두려워하는 마음. 이게 대체 뭔지. 이 희구(喜懼)의 감정이야말로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인데 이것과는 담을 쌓고 사는 게 요즘이니 말이다. 사실 어떤 물질적 보답보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원하는 건 이 마음이 아닐까 싶다. 허나 이 마음이 있다고 해도 어디 부모가 마냥 기다려 주시던가. ‘있을 때 잘해’라는 유행가 가사를 꼭 떠올리게 하는 부모의 죽음. 오늘 우리가 만나 볼 문장은 바로 이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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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문장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등장인물부터 좀 파악하자. 그래야 왜 ‘저놈’이 저런 당돌한 질문을 서슴없이 날리는지 감을 잡을 테니까. 재아(宰我)는 공자의 제자로 공자보다 29세 연하다. 공자가 주유천하를 할 때 끝까지 공자를 모신 4인방 가운데 한 명이다. 또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뛰어난 제자 베스트10(공문십철)을 뽑을 때면 으레 이름을 올리는 제자다. 그의 주특기는 언어(言語). 쉽게 말하자면 ‘말빨의 달인’이다. 공자가 살던 시대엔 무엇보다 ‘말’이 중요한 시대였다. 군주를 설득하고 제자들을 꼬시는 거, 이게 다 ‘말’로 처리되던 시대였으니까. 그러니 재아는 기본적으로 먹고살 만한 ‘자격증’ 하나는 제대로 구비한 셈이다. 더구나 그 힘들었다는 주유천하에 스승과 동고동락까지 했으니 총애를 받아 마땅한 제자다. 그런데!『논어』에서 재아는 시종일관 쿠사리만 먹는다. 재아와 관련된 문장에 쿠사리가 들어있지 않은 문장이 없을 정도. 그럼 왜 이렇게 훌륭한 스펙(!)을 자랑하는 제자는 매번 쿠사리만 먹고 살았단 말인가.

한번은 재아가 낮잠을 잔 일이 있다. 공자가 이걸 보고는 제대로 갈구기 시작한다.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고, 썩은 흙으로 쌓은 담장에는 흙손질을 할 수 없는 법이다. 내 재여(재아의 다른 이름) 같은 이를 꾸짖을 것이 무에 있겠는가!” 말빨 좋은 제자를 찍어 눌러야했기 때문인지 공자의 언사도 지나치게 화려하다. 그냥 ‘넌 완전 쓸모없는 놈이야!’ ‘부숴 버릴 거야’(?)라고 말해도 될 것을 상당히 에둘러 주신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분이 덜 풀렸는지 이어서 말한다. “내 예전에는 사람을 대할 때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실을 믿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사람에 대하여 그 말을 듣고 다시 그의 행실을 살펴보게 되었다. 나는 재여 때문에 이렇게 고치게 되었다.” 전에는 말을 들으면 으레 그 사람의 행실이 말과 일치하겠거니 믿었는데 재아 때문에 그 사람의 행동까지 보고서야 믿게 되었다는 이 말. 스승의 사람 보는 눈을 바꿔 버린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

그런데 낮잠 좀 잔 걸 가지고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냐 싶다. 뭐 공부하다가 졸리면 좀 잘 수도 있는 거 아닌가!(여기에 왜 이렇게 힘이 들어가는지 알 사람들은 다 안다.) 하지만 우리 공자님 이런 거 못 봐준다. 더구나 재아가 꾸벅꾸벅 졸았던 건 밤새 심하게 음주가무를 즐긴 탓이라는 설도 있다. 나이트에, 부킹에, 2차, 3차까지 달려주셨단 말씀. 그러니 낮엔 졸거나 자거나 해야 할 거 아닌가.^^ 그러나『논어』에서 공자를 화나게 했던 건 비단 이런 태도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가 됐던 건 그의 ‘말빨’이다. 말은 청산유수처럼 잘하는데 그걸 실천으로 옮기는 일엔 지극히 게을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 참 공평하다. 그에게 화려한 말주변을 주셨으나 누추하기 그지없는 실천력도 함께 주셨으니.^^ 어쨌든 공자를 매번 진노하게 만들었던 건 바로 이거다. 언행일치를 강조했던 공자에게 언행불일치로 늘 반항했던 재아. 하지만『논어』에서 재아만큼이나 공자를 긴장시킨 제자도 드물다. 실수를 늘 달고 살긴 했으나 매번 독특한 질문으로 공자를 당혹스럽게 했던 제자. 그만큼 스승에게 화끈하게 대들 만한 배포를 가진 제자. 이 문장도 이런 재아의 인물 됨됨이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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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이렇다. 재아는 삼년상이 너무 길다며 1년으로 줄일 것을 제안한다. 그러자 공자는 그럼 니 마음이 편하겠느냐고 응수한다. 여기에 재아는 대뜸 ‘편합니다’라고 답한다. 아! 천추의 한으로 남을 이 한마디. 덕분에 재아는 2,500년간 공자에게 대든 ‘싸가지 없는 제자’로 낙인찍힌다(『논어』에서 잘못 낙인찍히면 기본이 천년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답하자 공자도 화가 났는지 ‘니 멋대로 하라!’고 말해 버린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고 재아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 버린 상황. 공자는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재아의 뒷담화 까기에 여념이 없다. 부모가 키워 준 게 삼년이니 뭐니. 핵심은 ‘이 썩을 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충돌은 단지 감정싸움이 아니다. 사실 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건 두 사람의 세계관이다.

우선, 재아의 논리는 매우 현실적이다. 삼년상을 하게 되면 집안이건 나라건 문화예술이건 다 말아먹는다. 그렇지 않겠나. 가장이 삼년상 지낸다고 시묘살이 해버리면 ‘소는 누가 키운’단 말인가.^^ 요즘이야 굶어 죽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이때는 상황이 다르다. 상을 당했다고 3년이나 일손을 놔 버리면 그대로 ‘죽음’이다. 현실적으로도 삼년상을 치를 만큼 경제적 자립도가 있었던 계급은 한정적이었다. 군주나 귀족계급, 돈 많은 재벌!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해도 삼년상이란 게 쉬운 게 결코 아니다.『묵자』엔 당시 삼년상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전하는데 한번 감상해 보시라.

임금이 죽어 3년, 부모가 죽어 3년, 처와 맏아들이 죽을 경우 3년, 도합 다섯 번의 삼년상과 나아가 백부, 숙부, 형제 및 자신의 기타 아들들이 죽었을 때 각각 1년, 그 밖의 친족은 각 5개월, 고모, 누이, 조카, 외삼촌 등은 각각 수개월의 상을 치러야 한즉, 뼈만 남게 할 제도임에 틀림없다. 얼굴은 마르고, 눈은 쑥 들어가고, 안색은 거무튀튀하고, 눈멀고 귀 먹고 손발은 기운이 없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일등 선비의 치상(治喪)은 부축을 받아야만 일어설 수 있고 지팡이를 짚어야만 걸음을 옮길 수 있을 상태로 3년을 계속한다.

─ 『묵자』권6: 16~19쪽

과격하기 그지없다.^^ 일단 옆에 사람들보다 삼년상 지내는 본인이 먼저 죽을 판이다. ‘겨우’ 부축을 받을 정도로, 지팡이를 짚어야만 걸음을 걸을 수 있을 상태로 해야 한다니. 실제 조선시대엔 삼년상 지내다 몸을 버리고 죽은 양반들도 많았다. 더구나 상례만 치르다 죽을 팔자를 타고난 것인지 대충만 따져도 20년은 족히 상례에만 몰두해야 한다.(헉!) 이러니 누가 감히 삼년상을 하려고 했겠는가. 설사 누가 한다고 해도 반드시 뜯어 말려야 할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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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공자는 이런 현실을 몰랐단 말인가. 공자라면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았을 터인데 그는 왜 현실적이지도 않은 삼년상을 고집했단 말인가. 사실 이게 좀 의아하다. 아무리 부모의 죽음이 슬프다고 해도 일단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더구나 삼년을 팽개쳐 놓으면 공자가 그토록 사랑했던 예악(禮樂)도 다 무너질 게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대화의 핵심은 ‘시간’이 아니다. 1년이냐 3년이냐의 문제보다 본질적인 게 있다는 말이다.

일단 재아에게 군자(君子)란 예악을 사수해야 하는 계급의 칭호다. 귀족이나 제후, 재벌들로 구성된 지배계급. 하지만 공자가 생각하는 군자는 다르다. 군자란 상(喪)을 당하면 입맛을 잃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거처함에도 편안함을 느끼지 않는 존재다. 즉, 부모의 죽음을 온전히 슬퍼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군자다. 허나 재아의 군자는 이 마음보다 지배계급이라는 실리가 먼저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보다 지금 현실에서 내가 누리는 권리가 먼저인 존재들. 오로지 나밖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 이들에게 3년이란 시간은 길고도 불안한 시간이다. 생각해 보라. 지금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자들이 3년의 공백기를 가진다. 이거 누가 쉽게 받아들이려 하겠나. 그러나 아쉽게도 재아는 이들의 입장에서 부모와의 관계를 살핀다. 마치 본인이 지배계급이라도 되는 양! 공자가 재아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이런 태도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재아는 상례를 줄여야 한다는 근거로 자연의 리듬을 제시한다. 1년이면 모든 생명이 삶과 죽음을 겪고 새롭게 시작한다. 그 리듬에 인간도 맞춰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맞는 말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니까. 하지만 인간은 자연과 같아질 수 없다. 동물처럼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들처럼 강인한 운동능력을 가진 종도 아니다. 나약하기 그지없는 이 종족. 그들이 자연과 맞서며 살아가기 위해 숙명적으로 걸어야 했던 길, 그게 바로 문명(文明)이다. 하지만 재아의 사유엔 이 인간의 특수성이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오로지 자연의 리듬에 맞추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공자는 이 ‘덧없는 믿음’에 반대한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려면 인간으로서 가야 할 구체적인 길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공자. 그게 문(文)의 세계라고 생각했던 공자. 재아는 스승이 가고자 했던 이 길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려고 한 셈이다.

결정적으로 재아는 예악(禮樂)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그에게 예악은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당위에 불과하다. 그것이 무엇을 담아야 하는 그릇인지 그는 모른다. 공자가 재아를 ‘불인(不仁)한 놈!’이라고 질타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예악, 그것이 빈 깡통이라는 걸 모르는 제자. 그렇지 않은가. 내 마음이 실리지 않은 예의와 음악이 누구를 기쁘게 할 것이며 누구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예약은 그저 제도일 뿐이다. 그러나 우울하게도 재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 역시 예악을 사유하는 방식은 동일하다. 심지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봉양하는 데 있어서도 공경하는 마음 없이 그저 봉양만 하던 게 당시 모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절차와 형식만 남고 거기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모르는 빈곤한 시대. 공자는 재아를 통해 이 시대의 모습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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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냐 3년이냐!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1년이건 3년이건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실종된 시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이 마음보다 먼저인 게 너무나 많은 시대. 문명이라는 화려한 거죽에 현혹되어 그것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는 잃어버린 시대. 부모의 죽음 앞에서 공자는 묻는다. 너에게 효(孝)란 무엇인가. 인간의 길이란 무엇인가. 문명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父生我身 母鞠吾身 腹以懷我 乳以哺我 以衣溫我 以食飽我
부생아신 모국오신 복이회아 유이포아 이의온아 이식포아
恩高如天 德厚似地 爲人子者 曷不爲孝 欲報深恩 昊天罔極
은고여천 덕후사지 위인자자 갈불위효 욕보심은 호천망극

아버지는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는 내 몸을 기르셨네.
배로써 나를 품어 주시고, 젖으로써 나를 먹여 주시도다.
옷으로써 나를 따뜻하게 하시고, 밥으로써 나를 배부르게 하시도다.
은혜는 높기가 하늘과 같고, 덕은 두텁기가 땅과 같구나.
사람의 자식 된 자가, 어찌 효도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하나, 넓은 하늘과 같아 다할 수가 없구나.
-『사자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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