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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

『논어』라는 텍스트 - 배움에 뜻을 둔 자들의 책

by 북드라망 2017. 3. 30.

『논어』라는 텍스트 - 배움에 뜻을 둔 자들의 책

 

 

텍스트로서의 『논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너무 쟁쟁한 제자-편집자 그룹들이 함께 역사적인  『논어』 편집을 공동으로 하게 된 게 비극이 아닐까. 예컨대 아무리 능력 있고 훌륭한 그룹들이었다고 해도 사공이 많다 보니 배가 산으로 간 격이 아니냐는 겁니다. 우리 생각엔, 그래도 공자님 제자들인데 서로 잘 합의했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실제로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고요. 엄밀하게 스승님의 말씀을 지켜내고 타협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스승님을 기리는 길이라고 여겼을 겁니다. 결정적으로 이미 각자 다 어른들이었고, 스승들이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예가 적절할진 모르겠는데, 예컨대 나훈아와 남진? (웃음) 나훈아랑 남진이 동시대에 라이벌로서 인기가 있었는데 한 음악 프로에서 동시에 초대를 했다. 그럼 누가 마지막 무대를 설 건가? 합의가 되겠습니까 이게? 안된다고요. 나훈아랑 남진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계시는군요. 신승훈과 김건모로 예를 들면... 에이쵸티(H.O.T)와 젝스키스 라고 하죠.(웃음) 같은 프로 나왔는데, 누가 마지막 무대를 서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개인적으로 양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수많은 팬클럽이 있고 기타 등등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겁니다.

 

그럼 이게 그냥 무능력인가. 즉 드세고 말 많은 제자 그룹들의 합의 실패가 낳은 참극인 건가. 예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장자』 같은 책은, 물론 『논어』보다 후대의 책입니다만, ‘내편’이 모두 7개의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제목이 주제별로 되어 있습니다. 「소요유(逍遙游)」, 「제물론(齊物論)」, 「양생주」, 「덕충부」, 「응제왕」 ... 뭐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들



소요. 어슬렁어슬렁하며 노는 경지라는 겁니다. 장자 철학의 큰 이미지를 보여주죠. 제물론. 갖가지 물(物)들의 가치에 관한 철학적 논술들인데, 장자 철학의 핵심이죠, 이 제물 사상이. 이에 비해  『논어』는 아무리 선의로 해석해 주려고 해도 그편에서 제일 앞에 있는 구절의 두 글자를 따놓은 것일 뿐입니다. 어떤 구절들은 그나마 그것이 주제처럼 보이지만, 어떤 편의 제목은 정말 너무 성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는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게 공자님 말씀을 기록한 책인데, 이럴 리가 없는데 라고 자꾸 말하는 것은 공자와  『논어』에 대한 하나의 상이 있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이 말에는 이미 그럴 텐데 라는 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논어』라는 책은 일찌감치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사람들에게 굉장한 콩깍지로 보게 만들어진 텍스트였다는 겁니다. 그냥 놓여 있는 대로 보는 게 아니라, 자꾸 의미를 만들어 주려고 했다는 겁니다. 저는  『논어』의 편집-제자들이 무능력했다기보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그 많은 제자들이 엄선한 글귀들이고 엄정하게 편집에 공을 들인 텍스트인데, 그런 책이 왜 각 편의 제목 하나 제대로 주제화시키지 못하고 지리멸렬해졌을까.

 

이 얘기는 그 제자들이 갖고 있었던 무능력함이 아니고 거꾸로 그 제자들이 얼마나 스승님의 가르침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애를 썼는가를 역으로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공자의 각 제자 그룹들은  『논어』라는 책을 편집해야 할 즈음에는 이미 스승=공자님의 말씀들이 특정하고 일정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없는 상태로, 이를테면 전원이 동의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말은 다시 생각해 보면 스승=공자님의 말씀들은 이미 당시의 제자들에게 역사화 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각자의 이해관계나 조건·상황· 기타 등등에 의해 해석된 텍스트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의 고정된 범주나 고정된 의미로 묶어낸다고 하는 것이 이미  『논어』를 편집하는 사람들의 시대에 어려웠다는 것. 그것을 오히려  『논어』라는 텍스트가 반증해 주고 있다는 겁니다. 텍스트(text)라는 말, 이 말은 텍스츄어(texture) 즉 직물이라는 말과 어원이 같습니다. 짜 나아가는 겁니다. 단순히 글자가 묶인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글이 이루어진 시대의 역사성과 지금의 역사성, 그리고 지금 이 책을 읽는 나의 독자성을 통해 해석해야 하는 대상인 겁니다. 해석은 선택이 아니라 전제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논어』는 이미 텍스트였던 거죠.

 

 

텍스트는 직물처럼 짜 나아가는 것

 

  

그러니까  『논어』를 읽을 때 우리가 특히 주의해서 봐야 할 점은 이 텍스트가 어찌 보면 지금 산만하게 흐트러뜨려 놓은 듯 보이는 지점들, 즉 이 제자들이 도저히 자기들 능력으로는 합의에 이르지 못해 펼쳐놓게 된 이 구절들이야말로 원석중의 원석들이리라는 사실입니다. 이 책이 만약 깨끗하게 다듬어져서 매끈한 주제로 묶여 있었다면 우리는  『논어』를 읽는 결들을 크게 도움받을 수는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 굉장히 단조롭게  『논어』를 읽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논어』야말로 실은 공자 제자그룹들(엄밀히는 편집-제자들의 시대)의 역사적 해석으로서의  『논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격렬하게 논쟁하면서 편집본을 만들었으면서도 다행히(!) 끝내 그 합의에 실패한 열정적인 편집자들 덕분에,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는 스승 공자의 정예 사유들을 담은 문장들을  『논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거죠. 그 위대한 실패에 충심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죠?  『논어』의 미정형성은  『논어』를 읽는 우리가  『논어』 해석의 유일한 독서인이 되어야 한다는 신호라는 말입니다.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다

그럼 용기를 내서 다시 한 번  『논어』를 읽어볼까요. 이번에는  『논어』를 통해서, 즉  『논어』 안에서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찾아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볼 대목은 「위정」편에 있는 기록입니다. 「위정」편은  『논어』 두 번째 편인데요, 여기에 공자 연구가들이 보면 아주 좋아할 만한, 그리고 굉장히 귀중한 기록이 있습니다. 

 

 

“나는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 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에 어떻게 살 것인지 입장을 세웠다 / 三十而立 

마흔에는 세상일에 어지러이 의혹되지 않게 되었고 / 四十而不惑 

오십에 하늘의 명(命)을 깨달았다 / 五十而知天命

예순에는 들리는 말들에 거슬리는 게 없었고 / 六十而耳順 

일흔 살이 되니 마음이 내키는 대로 따라도 지나치지 않았다 /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 『논어』, 「위정」

 

이 글은 공자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고 평가한 구절로서 특히 주목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이 칠십의 자신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공자 만년의 기록인 점도 이 구절의 권위를 높이고 있지요. 중고등학교 때 한자 시험이나 기타 등등 여러 곳에서 활용되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나이 묻는 물음 말이죠. 사십 불혹, 오십 지천명 등등. 


지금 미리 좌절하고 그러는 분 혹시 계신가요? ‘아! 공자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는데, 나는 나이 서른이 넘도록...’, ‘아! 공자는 사십에 불혹이었는데 나는 사십이지만 아직도 불면 혹하고 넘어가는 불혹이니...’(웃음), 아니면 거꾸로 이렇게 상심하는 분들은 없으세요? ‘난 이제 겨우 서른인데 벌써 지천명을 해서 어쩌지? 요즘 마음 내키는 대로 내질러도 지나치거나 그러지 않는데 이제 겨우 사십 대니 너무 빠른 것 아닌가?...’(웃음) 다들 너무 걱정 마세요. 본문에 보면 공자님이 일단 자신의 말씀을 하고 계신 거니까요. ‘내 나이 열다섯에...’ 하고 계시죠? 사람이면 누구나 열다섯에 지우학(志于學)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닐 겁니다. 아니라고 믿습니다.(웃음) 제 목소리가 지금 살짝 떨렸나요?

 

그런데 그건 그렇고! 제가 지금 이 구절을 가지고 온 이유는 좀 다른 뜻에서입니다. 같이 한 번 생각해보죠. 나이가 칠십이 넘은 원숙한 스승이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본다고 생각해 봅시다. 정 상상이 안 되면 지금 각자 자기 자신의 일생을 한 번 공자처럼 되짚어서 거점들을 말해본다고 가정해봅시다. 어떤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시겠습니까? 사람마다 살아온 삶은 다르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공유점이 있습니다. 즉 각자 자신의 지금으로부터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게 된다는 거죠. 요컨대 공자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보면, 저 같은 경우는 지금 인문학 공부를 하고 강의하고 세미나 하면서 인문학 공부 공동체 활동을 중심에 놓고 있으니까 이러한 지금의 제 자신을 관통하는 어떤 기원점을 찾아 회상하겠죠. 고전에 어떻게 뜻을 두게 되었고, 공부는 어떻게 전환되었으며, 공동체와 어떻게 인연이 되었고 등등. 즉 만년의 공자는 만년 공자의 현재, 다시 말해 많은 제자들의 존경을 받는 현자로 자신을 아이덴티파이(identify)하는 겁니다. 그 결과 나온 말이 바로 십유오이지우학(十有五而志于學) 즉 ‘열 하고도 다섯에 배움(學)에 뜻(志)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지우학(志于學): 배움(學)에 뜻(志)을 두다


 

여담입니다만, 지금 강의 듣는 분 중에서 아마 지학사란 출판사 기억하는 분들 있으실 거예요. 기억나시죠? 하이라이트 국어!(웃음) 저랑 연배가 비슷하신 분이시겠네요, 그 지학사가 여기 지우학에서 유래합니다. 이처럼 곳곳에  『논어』 흔적이 있습니다. 지금 동양고전관련 출판하는 모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책 중에 시리즈 이름이 ‘나루를 묻다’라는 게 있어요. 이게 나루터를 묻는다는 말인데, 이것도 역시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공자님의 제자 자로가 공자님과 같이 길을 가다가 밭 가는 노인들에게 나루터를 묻는 대목입니다. ‘자로 문진(問津)’ 자로가 나루터를 묻는다는 뜻인데, 길을 묻는다 즉 도를 묻는다는 뜻입니다. 말 나온 김에 또 하나 더 얹을까요? 「학이」편에 증자의 말로 이런 구절이 있어요. 일일삼성오신(一日三省吾身). 증자께서 자신은 하루에 세 번 자신을 성찰(반성)한다는 구절입니다. 삼성(三省). 휴대전화 만드는 회사 아닙니다. 동아시아 한자문명권 나라엔 죄 삼성출판사가 있지 않나 싶어요(웃음). 예전에 한국에도 집집이 삼성출판사판 세계문학전집이 있었죠. 언젠가 일본에 갔더니 큰 서점가를 갔는데, 거기에서 제일 큰 서점 이름이 삼성당(三省堂)이더라고요.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여기 이 지우학이에요. 우(于)는 어조사로 ‘...에’라는 뜻입니다. 즉 배움(學)에(于). 지(志)는 그냥 지향한다라고 일단 알아두시면 돼요. 의지거든요. 배움에 뜻(의지)을 두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공자가 자기 자신을 어디서 출발시켰는가를 유심히 보셔야 합니다. 칠십이 된 공자가 자신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잖아요. “아, 나도 한번 내 일생을 돌이켜 볼까. 음, 나 태어날 때에 우리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야합하셨지.”(웃음)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죠. “아, 난 다섯 살 정도 때에 놀이를 해도 전쟁놀이 이런 거 하지 않고 제기 그릇을 예에 따라서 제사상을 놓는 걸 하고 놀았지.” 공자의 기록에 이런 예가 있거든요. 요컨대 이런 일화들로 자신의 일생을 출발할 수도 있는데, 공자는 무엇으로 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배움에 뜻을 두었다는 말입니다. 일단 이게 첫 번째. 그럼 두 번째를 봅시다.


문리스 (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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