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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

<논어> - 공자와 그 제자들의 공부법, 즉문즉설!

by 북드라망 2017. 3. 2.

 <논어> - 공자와 그 제자들의 공부법, 즉문즉설!


  

스승, 질문을 만드는 자

<논어> 열한 번째 편인 ‘선진(先進)’편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공자님이 자로, 염구, 공서화라는 제자들과 같이 있었는데, 자로라는 제자가 불쑥 선생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 어떤 말을 들었다면 실행에 옮겨야 하겠죠?”

그러자 공자 선생님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다. 부모 형제가 계시는데 그렇게 듣는 대로 바로 행동에 옮겨서야 되겠는가. 심사숙고해야지.” 

그러자 곁에 있던 염구가 묻습니다.  

“선생님! 어떤 말을 들었다면 실행에 옮겨야 하겠죠?” 

그러자 공자 선생님께서 대답합니다.

“콜!” (웃음) “당연하지, 들으면 실행해야지!” 

그러자 공서화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묻습니다.

“선생님! 조금 전에 자로 형님이 ‘들었으니 실천해야죠?’ 라고 물으니까 ‘부형이 계시다’고 말씀하시고선, 지금 다시 염구가 ‘들으면 실천해야죠?’라고 물으니 ‘실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니 1분도 안 지났는데, 한 입으로 두말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여기서 공자님이 “그래, 공서화야, 네 말도 맞다” 라고 말하면 황희 정승이 됩니다.(웃음)

공자님은 이렇게 대답하시죠.

“자로는 남을 누르고 너무 나서는 기질이라 좀 눌러 앉힌 것이고, 염구는 자꾸 물러나려고 하기에 나아가게 해 준 것이다.”

 

<논어>라는 책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멋진 구절입니다. 다른 건 둘째치고 이 <논어>라는 책은요, 여기서 보듯 스승 공자와 제자들이 이렇게 바로바로 얘기하고 자기 생각들을 나눕니다. 이 배치만 봐도 그렇습니다. 염구와 공서화는 나이가 비슷하지만, 자로는 이들에 비하면 한 세대가 앞서는 선배입니다. 이렇게 선배와 후배가 함께 공부하는 거죠. 아니, 공부라기보다는 스승+동료와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논어>에서 스승과 동료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살피다.


그런데 이 내용이 재미있어요. 원문을 보면 똑같습니다. 문사행저(聞斯行諸)? 들었으면 곧 실행해야죠? 라는 뜻입니다. 자로의 이 질문과 염구의 이 질문이 원문으로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이 대화의 묘미는 이 질문에 대한 공자의 대답에 있습니다. 자로한테는 ‘참아라. 워워’ 한 거고, 염구한테는 ‘롸잇 나우!’라고 한 거거든요.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보통은 이 구절을 이렇게 봅니다. 자로와 염구의 기질이 달랐기 때문에, 성인께서는 같은 질문에 다른 대답으로 각자를 이끌어주신 것이라고요. 맞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구절이야말로 <논어>라는 책을 읽는 방법과 관련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 볼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요컨대 이 구절은 같은 질문에 다른 대답을 했다고 볼 게 아니라, 이미 다른 질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거죠. 이미 다른 질문이었으니 당연하게도 다른 대답을 할 수밖에요. 

 

생각해볼까요. 자로는 동네 왈인(건달) 출신이고, 나이는 많고, 거칩니다. 이런 자로가 “들었으면 곧 실행해야죠?”라고 했던 말과 평소 얌전하고, 아직 나이도 어린 염구가 “들었으면 곧 실행해야죠?”라고 하는 말이 과연 같은 질문일까요? 이 말은 자로와 계열화되는 순간 이미 자로의 질문인 것입니다. 염구와 계열화되면 이미 염구의 질문인 것이고요. 그러니 당연히 다른 질문에 다른 대답이지 않을까요?

 

 

같은 질문, 다른 대답? 다른 질문, 다른 대답?


저는 이런 점이 대화로 구성되어 있는 책 <논어>의 묘미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고속도로 화장실 같은 데서 불쑥 만나는 것처럼 맥락이나 상황이 전혀 없이 맞닥뜨리는 경구가 아니라, 대단히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어떤 상황 등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말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역으로, 지금 우리가 <논어>를 읽는다는 것은 한 마디 한 마디에서 그런 상황과 배경 등을 가능한 한 충분히 고려해서 읽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아니 그렇게 읽을 때, 그런 상황들을 상상할 수 있을 때, <논어>는 훨씬 더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텍스트가 될 거라는 말입니다. 그런 맥락 등을 지워버리거나 괄호 쳐버리고 읽는 것은, <논어>를 그냥 도덕 교과서로 만들고 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간단한 사실을 종종 혹은 쉽게 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공자님의 <논어>라는 생각에는 익숙하지만, 사실 이 책이 공자님과 제자들이 분리될 수 없는 방식으로 함께 등장하고 있는 책이라는 점에 관해서는 의외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아요. 미리 한마디 하자면 공자의 제자들은 절대 <논어>의 조연들이 아닙니다. 조연이 아닐 뿐 아니라 단순한 공동 주연 정도도 아닙니다. <논어>는 비록 공자님 말씀으로 이루어진 책이지만, 엄밀히 말해 공자님은 <논어>에 한 글자도 쓰지 않으셨어요. 공자님은 <논어>를 본 적도 없지요. 공자님 돌아가고 나서도 한참 후에 만들어진 책이니까요.

 

말이 또 좀 돌았네요. 여하튼 <논어>는 묻고 답하는 대화의 책입니다. 대화라는 말, 무엇인가에 대응한 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미 복수적 상황에서 한 말들이라는 거죠. 독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복수적 말씀들의 의미는 단순히 수적으로 둘 이상이라는 뜻이 아니라, 앞의 대화에서 보듯 스승께서 항상 제자들의 질문을 이제까지 없었던 단 하나의 질문으로 만들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게 바로 <논어>가 보여주는 스승의 모습인 거겠지요. 스승은 대답하기 위해 질문을 받는 자가 아니라, 질문을 단 하나의 질문으로 만들어 내는 자라는 것. 그렇게 단 하나의 질문이 만들어질 때마다 <논어>는 바로 ‘너에게’만 응답하는 스승님의 말씀이 되는 겁니다.

 

 

야합(野合)

이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좀 마무리 짓고, <논어>라는 책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 할 듯합니다. 여하튼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좁게는 이 강의 전체에 관해서 넓게는 우리가 만나는 유학에 관해서 일종의 밑그림 같은 것을 세팅하는 작업입니다. 유학의 공통감각을 좀 갖고 싶다고 할까요. 그 일환으로 우선 공자라는 인물을 좀 살펴본 것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공자님은 그저 성인군자셨거든요. 보통 사람으로선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고, 사실은 그 바람에 그다지 엄두를 내고 싶지 않은 정도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던 거죠. 왜냐하면 굉장히 도덕적인 분이어서 아주 고리타분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는 공자님은 그렇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공자 이미지로 인해 손해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공자님을 지나치게 성역화하거나 신성시하는 게 꼭 공자님을 존경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공자님에 관해 인간적인 여러 풍모들(거기에는 단점이나 약점이 될 만한 무엇도 있을 수 있겠죠)을 강조한다고 해서 이것이 공자님에 대한 폄훼나 공격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공자의 그런 면모들이 강조된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냐 하는 점일 겁니다. 저는 공자나 <논어> 혹은 유학에 관한 논의가 다양화될 수 있는 근저에는 기본 자료들에 대한 해석과 상상력의 스펙트럼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때, 그 가능성을 열어두고 또 그 다양한 해석들을 포용할 수 있게 되는 만큼 고전에 관한 우리 시대의 이해와 실제적 효용은 섬세하고 깊어질 것이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제 생각이 특별한 게 아니라 사마천 때부터 유래하는 지극히 정통적인 해석적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또 예를 들어보라고요?

 

공자나 <논어>, 유학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을 시도해 보자.


 사마천의 <공자세가>를 다시 참조해 보겠습니다. 공자의 출생에 관해서 사마천이 기록을 남기고 있는 대목이 있는데요. 거기 강의안에도 적어 놓았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사마천은 공자와 공자 제자들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을 정도로 공자에 대해 높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인데요, <공자세가>에 보면 사마천도 차마 더는 어떻게 존경심을 표해야 할지 난감했을 대목이 있습니다. 그게 공자의 출생에 관한 부분인데요. 공자가 출생할 때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 어른이 거의 70세 정도였어요. 그런데 안 씨 집안 따님이었던 공자의 어머님은 나이가 얼마였느냐 하면 고작 열다섯이었습니다. 심해도 좀 많이 심하죠? 아무리 공자님이 특별한 분이시긴 해도, 이건 너무 특별했던 거죠. 그래서였을까요. 사마천은 이 대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거기 강의안에 있습니다. 제가 한자 위에다가 혹시 몰라서 작은 글씨로 한글을 달았는데 기분 나쁘시면 지우시면 됩니다. 한자를 지우면, 한글만 남습니다.(웃음)

 

흘여 안씨녀... 찾으셨어요? ‘흘여안씨녀야합이생공자(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 ‘흘(紇)’은 공자 아버지 숙량흘을 말합니다. ‘여(與)’는 and(그리고)이고, ‘안씨녀(顔氏女)’는 공자의 어머니를 말합니다. 안씨 집안 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뒤에 뭐라고 써놨냐면 ‘야합(野合)’이라고 되어있어요. 야합해서 생공자(生孔子), 즉 공자를 낳았다는 겁니다. 즉 숙량흘과 안씨 집 딸이 야합해서 공자를 낳았다 이런 겁니다. 이것이 사마천의 기록입니다. 공자를 그렇게 존경하는 사마천이 보기에도 이 만남은 좀 잘못된 만남 같다는 그런 표현이지 않았을까요? 이 대목을 두고 연구자들이 여러 해석을 내리기는 합니다만, 어찌 됐건 안씨 집 딸이 숙량흘의 정식 정혼녀, 즉 정식 부인은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게 대체적인 시선입니다.

 

이 ‘야합’이라는 단어, 이 단어는 오늘날에도 그다지 좋은 뉘앙스로 쓰이는 말이 아닙니다. 보통 적절치 못한 관계를 이르는 단어죠. 그런데 사마천이 그 존경하는 공자님의 출생을 두고 이런 단어를 써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대충 완화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딱 까놓고 말하면, 숙량흘과 안씨네 딸이 야합, 즉 들에서(야외에서) 일을 치렀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냥 이렇게 담백한(?) 해석을 좋아합니다.(웃음) 어찌 됐건 이 야합이라는 말, 사마천이 공자를 미화하거나 두둔하려고 쓴 걸까요? 그럼 앞으로 우리 이러면 되겠네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어이. 넌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런 야합질을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듣는다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엄청 우쭐해지는 거죠. ‘어, 저 사람이 지금 나를 공자님으로 대우해주시네.’ 이러면서 말이죠.(웃음). 문제는 그분이 그 말을 전혀 모르고 썼을 확률이 크다는 거겠지만요.(웃음) 아니면 반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들 많이 해주시자구요. 이를테면 공자의 품격을 보이는 친구에게 ‘어이 친구, 자네는 야합 출신이시구먼.’ 이러는 거죠.(웃음)

 

우리는 어느 이상 사마천의 본래 의도(?)를 알 수 없어요. 해석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해석은 단순히 주관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 맥락과 정황 등등에 대한 근거와 이유들의 연결 위에서 창조된다는 뜻입니다. 공자도 <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마천의 기록은 공자와 <논어>에 대한 하나의 역사적 해석인 겁니다. 맹자도 마찬가지고요, 당연히 주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너무 자극적인 이야기를 처음부터 했던 것 같은데요, 예컨대 키가 9척 6촌이고, 14년 동안 천하를 개고생하시면서 돌아다니셨고, 육체적으로 굉장히 건장했고, 자로를 압박할 정도의 체력을 갖고 있었고, 부모님이 야합 결과 출생했고 등등 이런 얘기를 강조했던 이유는 그렇게 해서라도 좀 다른 쪽 편에서도 생각을 작동시켜볼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아무리 반복해서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쉬었다가, <논어>라는 책에 관해 좀 얘기해 보겠습니다. 


문리스 (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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