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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

『논어』라는 텍스트 - 배움에 뜻을 둔 자들의 책③

by 북드라망 2017. 4. 27.

『논어』라는 텍스트 - 배움에 뜻을 둔 자들의 책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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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시습 불역열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않은가.

벗이 먼 데서 찾아오면 즐겁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나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말 나온 김에 이제 『논어』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기도 한 이 첫 번째 문장을 얘기해보죠.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않은가.’ 배우고 익히다. 학과 습, 학습이죠. 즉 학습하는 것은 기쁘다, 라는 말입니다. 글쎄요. 여기가 지금 중고등학교 교실이라면 이 말에 어떤 반응이 왔을지 짐작이 대충 갑니다...(웃음) 암튼 일단 통과. 우리는 지금 『논어』의 첫 번째 문장을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이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벗이 먼 데서 찾아오면 즐겁지 않은가.’ 즐겁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완전! 내용상 딱히 어려운 구절은 아니죠. 그 다음이 마지막 세 번째 구절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나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여기 사람 인(人)자는 타인들을 뜻합니다. 온(慍)이란 글자는 마음 심(忄=心)자가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부글부글하는 끓는 겁니다. 남이 몰라준대도 부글부글 ‘끌탕’하지 말라, 그러면 군자다, 이런 말인 셈이죠. 이게 『논어』의 첫 번째 문장입니다. 어쩌면 이 글귀는 제자들(물론 편집에 참여한 제자들)에 의해 선택된 스승님이 평소 강조했던 단 한 마디일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만큼 의미가 적지 않다는 말씀인데요. 평범하고 밋밋해 보이시나요?


학이시습. 배우고 때 맞춰 익히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 식으로 말해보면 배운 것을 때를 놓치지 않고 익힌다, 입니다. 여기에서 일단 볼 것은, 학과 습이 함께 있다는 점입니다. 간단하게만 설명을 할게요. 학과 습이 다르다는 거죠. 배운다는 것은 무엇이고 익힌다는 것은 무엇이냐.



배우는 것과 익히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논어』 주석에 보면 배움(學)이란 지행(知行)을 겸한 것이라는 말이 있어요. 아니 지행이니 뭐니 하는 건 둘째치고. 저는 『논어』가 이 배움을 일종의 존재 조건 같은 것으로 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말이 거창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공자께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배움이었다는 겁니다. 산다는 게 배움의 연속이라는 건데, 이 말은 단순히 사람은 계속 배워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가 아니라, 일종의 존재 원리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늘 일어나는 일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얼핏 배운다고 하면 더 많이 아는 사람(스승)에게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배움은 그런 게 아닙니다. 『논어』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삼인행(三人行)이면 필유아사(必有我師)라. 세 사람이 같이 있으면 거기에 반드시 나의 스승 되는 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나보다 나은 사람들과 사귀어라 그런 뜻일까요? 실제 『논어』에 그런 구절이 있어요. 친구를 사귈 때는 나보다 나은 사람과 사귀라는. 하지만 그 말은 벗 사귐의 자세를 말한 것이지 여기서 말하는 배움의 의미와는 결이 다릅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이렇습니다. 세 사람이란 말은 아마 활동이 이루어지는 작은 단위를 가리키는 말일 겁니다. 두세 사람 정도에서 공동체적 활동이 가능하겠죠. 그런데 거기에 반드시 내 스승 됨이 있다는 것은, 어디에서나 나 혼자가 아닌 곳에서는 반드시 내가 배울 게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저는 이게 아주 의미 있는 통찰이라고 봅니다. 일단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복수의 인물들이 엮인 상황이 전제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활동을 보는 겁니다. 훌륭한 이에게는 따라가면서 배우고, 그렇지 못한 이에게는 나 자신에게 돌이켜 성찰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디에서나 언제나 배움이 있게 되는 거예요. 배움은 일종의 존재의 배경 같은 거죠.


『논어』 「리인」(里仁)편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견현사제언(見賢思齊焉), 견불현이내자성야(見不賢而內自省也). 견현(見賢), 어진 사람을 보면, 사제언, 나도 그 사람처럼 되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견불현, 즉 안 어진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하느냐. 내자성야, 안으로 돌이켜 자신을 스스로 성찰한다고 합니다. 나는 어떤가를 봐야 한다는 거죠. 이게 무슨 뜻일까요. 배운다는 게 특별한 이들의 활동이 아니라, 누구나의 것이라는 메시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배움에 대한 편견도 빨리 깨야 돼요. 동아시아 유학은 마치 스승과 제자 관계가 고정되어 있는 것 같고, 스승이 항상 제자들에게 상명하달식으로 가르치는 것 같죠? 스승님은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되는 분이라 무조건 막 복종하는 제자들의 모습도 떠오르고요. 해서 유학에서 배움이라는 것은 마치 사람을 억압시키는 것 같은 그런 갑갑함이 일기도 하고요. 하지만 천만의 말씀. 공자는 제자인 안회가 자기보다 낫다고 말하는 인물입니다. 자로의 용기는 자기보다 낫다고 그러시죠. 그러니까 배움은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어요. 내가 배우고자 하는 한.


사실 이만큼만 말했어도 공자가 멋진 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익힌다(習)는 말을 붙여 놨습니다. 그것도 그냥 익히는 게 아니라 시습(時習), 즉 때를 놓치지 않고 익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제가 지금 이 익힌다는 말은 ‘익혀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제 느낌으로 배운다는 말은 배워야 한다가 아니지만 익힌다는 말은 익혀야 한다의 뉘앙스입니다.


일단 습이라는 말은 가만히 보시면 이 글자는 깃털(羽)과 흴 백(白)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익힌다는 것은 새가 날갯짓을 익히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왜 흴 백자가 붙어 있느냐? 그게 어디 책에선가 보면, 새의 겨드랑이 쪽이 하얗다고 하더라고요. 즉 새가 날갯짓을 익히려 날개를 파닥거리는 것은 겨드랑이의 흰 곳이 보이도록 계속 움직여야 한다는 거죠. 저는 흰 백자를 스스로 자(自)자로 읽고 싶은데요. 그렇게 되면 익힌다는 말은 결국 자기 것이 되도록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한 마리의 새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요. 처음 새끼가 알에서 태어나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는 어미 새가 둥지로 먹을 것을 물어다 줍니다. 아예 입에 넣어주죠.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새는 스스로 둥지를 떠나 먹이를 구해야 하는 때가 옵니다. 존재가 되는 거죠. 아마득한 높이의 둥지에서 막상 허공을 향해 몸을 던져야 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얼마나 두렵고 긴장되는 순간일까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지요. 그러니까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건 이처럼 떨리고 두렵고 용기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새는 자기 날갯짓(비행의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죠.


배움을 향한 날갯짓​


우리가 지금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살았던 한 인물의 말을 얘기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무려 이천오백 년 전에 하신 말씀인 겁니다. 새가 날갯짓을 익힐 때 보면 어미 새가 계속 먹을 것을 날라다 준단 말이에요. 계속 먹을 것을 받아먹어요. 어느 순간이 되면 더 이상 어미 새는 자기 새끼 새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지 않아요. 그럼 이 새는 어느 순간 이 어마어마한 세상을 향해서 엄청난 용기를 내야 하는 거죠. 떨어져 죽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거는 가르쳐줄 수가 없어요. 어미가 날 수 있는 힘을 키워 주는 계기들은 계속 주죠. 그리고 어미가 마침 비행 조교사 출신이에요. (웃음) 그래서 가서 먹고 있을 때마다 “아이야, 하늘을 날 때 날개를 4분의 3의 각도로. 분당 몇 회를 강약강약 강강약으로 휘저어야 한단다. 역풍이 불 땐 고개를 15도쯤 외로 틀고 허리를 비틀면서....”  뭐, 이런 식의 매뉴얼을 만들어 줄... 수도 없겠지만, 설사 그런 비행 매뉴얼이 있다 해도, 그건 결코 자기의 날갯짓이 될 수 없어요. 이승엽, 추신수 선수가 리틀야구단에 가서 아무리 좋은 타격 코치를 한다고 해도, 이 선수들이 한 명의 선수가 된다는 건 결국 자기 타격 자세를 익히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익힌다는 것은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때’를 잃지 않고 익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 이것을 일컬어 기쁜 일이라 그랬어요. 배우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내 것이 되도록 익히는 것, 이것은 기쁘다. 학교 다니는 젊은 친구들이 들으면 기겁을 할 얘기에요. 학습이 기쁘다고? 학습이란 말만 들어도 노이로제가 걸리겠는데 말이야. 이게 공자 말이었어? 이럴 줄 알았네!(웃음) 근데 실은 그 친구들도 알고 있어요. 요즘 학교는, 아니 사실 제가 요즘 학교는 잘 모릅니다, 제가 다니던 예전 학교는, 배워야 할 것을 정해놓고 배우라고 하는 곳이었어요. 배워야 할 게 나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고 정해져서 주어지는 형태죠. 그러니 엄밀히 말해 공자님이 말한 학습이 아니에요. 그런데 가만히 놔두면 젊은 친구들도 사실은 끊임없이 배우러 다니고 배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배우러 찾아다녀요. 학원 얘기하는 거 아닙니다. 스마트폰, 게임, 뭐 이런 것들을 그 친구들이 어떻게 배우는 줄 아세요? 기가 막히게 찾아서 배워요. (웃음) 자기가 배우려고 하는 것들은 기가 막히게 배운다고요. 절대 때를 놓치는 법이 없이요.(웃음). 신생아를 생각해봐도 좋아요.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는 끊임없이 주변의 것들을 보면서 서는 것, 우는 것, 말하는 것 등등을 끊임없이 배워요. 왜? 배우고 익히면 기쁘거든요. 배워서 내 것이 되는 것은 굉장히 기쁜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도 인문학 강의 들으러 오셨잖아요. 이만큼 배운다는 게 기쁜 일이란 말이에요. 배운다는 것은, 배워서 익힌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배움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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