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약선생의 도서관]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걷기, 증여의 마음을 연습하다

프레데리크 그로,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오랜만에 고향인 제주에 갔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옛 담임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좀 일찍 도착한 나는 남은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제주 시내를 무작정 걸었다. 제주라면 자연경관부터 떠올리는 이들은 언뜻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곳에서 나고 자란 나에겐 시내 골목골목이 더 강렬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제주도도 역시 사람 사는 마을인 것이다. ‘사람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 나면 제주로 보낸다’는 말은 그래서 무책임하다.


관덕정에서 동문시장까지 이곳저곳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먹어대던 낡은 자장면 집, 술 취한 내가 기대어 토악질 해대던 옛 술집의 담벼락, 그리고 중간고사 마지막 날이면 몰래 숨어 들어간 에로영화 동시상영관. 동문시장 명패 앞에 서자 극장 안에 웅크리고 있던 그 시절의 감각들이 되살아나 나를 다시 덮쳤다. 문득 이 건물이 오랜 시간 나를 기다렸다가, 그간 품어 놓았던 감각들을 기쁨과 함께 베푼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제주 관덕정과 그 너머 풍경. 나에게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라 고향이다.



그것은 일종의 ‘증여’(贈與)와도 같다. 씨족사회에서 일어나는 ‘증여’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를 매개로 한 ‘상품교환’은 서로 다르다. 말 그대로 상품교환은 쌍방이 주고받는 것이라면, 증여는 일방이 주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형태만 다르지, 교환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상품교환은 화폐를 매개로 한 상품 간 교환이다. 그것은 서로 거래하고 나면 바로 끝나는 좀 야박한 관계다. 하지만 증여는 다르다. 부모와 자식 간의 교환이 그 예다. 부모는 아이가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증여한다. 아이는 바로 답례하지는 않는다. 답례할 수도 없다. 아이는 커갈수록 부채감이 커진다. 물론 자라서 부모에게 그것을 갚기도 하겠지만, 그 큰 은혜를 다 갚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답례는 자기 아이에게 하거나, 공동체 내 다른 누군가에게 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미지의 타자와 교환하는 것이다. 결국 증여와 답례는 공동체적으로 일어난다. 씨족사회에서는 이 증여가 의무를 이행하는 일과도 같았다. 또 증여를 할수록 의무를 덜어 지위도 높아지고, 마음도 평화로워졌다고 한다. 가진 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야 지위가 높아지는 사회라니!


그런데 나는 증여가 사람들 간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향의 극장 앞에서 나는, 옛 건물들이 사람들의 기쁨을 품고 있다가 내게 증여한다고 느꼈다. 누군가 건물을 통해 나에게 기쁨을 증여하고 의무를 다했을지도 모른다. 시내를 거닐며 옛 건물들을 보고 내가 기뻤다면,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나도 기쁨을 누군가에게 이어서 증여해야 할 의무감이 생긴다. 여기에 이르면 증여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뭔가를 우리에게 증여한다. 우리는 이런 감각들을 증여받고서야 삶을 삶답게 살아간다.


그러나 사회생활이 끊임없이 이어지다보면 이 증여의 마음을 잊게 된다. 삶다운 삶을 살아내기 위해 이 마음을 끊임없이 되살릴 필요가 있다. 푸코 철학의 대가, 프레데리크 그로(Frédéric Gros)는 이 마음의 회복을 철학자들의 걷기를 통해서 전달해준다.


프레데리크 그로는 푸코의 마지막 강의 중 하나인 『주체의 해석학』을 책임편집하고 책 끝에 이 강의가 이루어진 정황들을 ‘강의상황’으로 설명해준 사람이다.[각주:1] 나는 그가 쓴 ‘강의상황’을 무척 좋아한다. 특히 나는 그가 푸코의 말년을 ‘개념적 가속화의 장소’이자 ‘문제틀들이 분출하는 증식의 장소’였다고 평가한 장면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덧붙여서 그는 푸코의 이 시기를 들뢰즈가 ‘사유의 속도’라고 불렀던 바가 명료하게 드러난 때라고도 말한다.[각주:2] 그러니까 ‘푸코의 생성’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책(혹은 강의)으로 『주체의 해석학』을 드는 것이다. 그로는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라는 책으로 이 생성의 현장을 걷기의 현장에서 더 다채롭게 보여주려 하였다.


그로는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를 통해 '생성의 현장'을 더 다체롭게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로에게 걷기는 일종의 일탈이다. 평소 구속되어 있는 일과 습관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사회를 감싸고 있는 ‘교환의 이불’을 걷어 내기, 켜켜이 쌓인 정보와 이미지, 상품들로부터 도망가기. 걷기는 그런 체계들과 정보들이 살아가는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교사다. 다시 말하면 걷기는 기존의 관계와 가차 없이 끊기를 권하는 충고인 것이다. 특히 흔히들 ‘사교’라고 말하는 그 세계, 그러니까, “살다보니 무엇보다 인간관계가 중요해”라고 했을 때, 그 인간관계를 끊어 보라고 유혹하는 행위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좀 더 나은 관계를 복원하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개’를 뜻하는 그리스어 kunos에서 유래한 견유학파(犬儒學派) 철학자들. 그들은 항상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어슬렁거렸다. 학파의 이름처럼 ‘개 같은 생활’(kynicos bios)을 했던 것이다. 지팡이를 손에 들고, 양쪽 어깨에는 담요와 망토, 두꺼운 천 조각을 걸친 채, 허리에는 볼품없는 바랑을 차고, 신발도 없이 도시 곳곳을 걷고 또 걷는다. 


설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말 그대로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행복을 전하기 위해 돌아다녔다면, 견유학파 철학자들은 그 반대다. 그들은 도발하고 불안하게 만들기 위해 걷는다. 그들은 설득이 아니라 독설의 기술을 구사했다.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공격했다. 사람들은 이를 듣고 개그인양 즐거워하기도 하지만, 그중에 어떤 이들은 불안을 느낀다. 그 독설에 비추어 자신의 습관과 확신들을 되돌아보게 돼서다. 신랄한 빈정거림에 자신의 삶이 대상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견유학파의 걷기는 다이너마이트다. 걷는 곳마다 삶을 두껍게 덮고 있던 껍질들이 폭발하여, 날 것 그대로를 노출시킨다. 어쩌면 ‘날 것’이야말로 혁명적인지 모른다. 자신의 정신적 풍요를 위해 웅크리고 작업하는 강단 철학자들의 진리나 혁명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단번에 드러내 보여준다. 진리가 사람을 경악하게 만드는 폭풍우라는 것을 그들만큼 일관되고 보여주는 철학자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보기 드물다. 그들의 걷기는 우리들의 일상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착시켜주는 혁명적 걷기다.


견유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디오게네스.



어떤 이에게는 걷기가 치료이다. 니체는 끔찍한 두통에 시달렸다. 15분 동안 글을 읽거나 쓰면 몇 시간씩 두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더군다나 눈까지 지독히 나빴다. 이런 사정을 알고 나면 니체의 글들이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런 때 니체는 걸었다. 위대한 시기라고 부를 수 있는 1879년부터 1889년까지, 그러니까 질스마리아에서 ‘영원회귀’를 깨달았던 시기이자, 위대한 문장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그 시기에 니체는 최고의 건각(健脚)이 되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걷기를 통해서 “자기가 자신의 자연과 자신의 원소를 발견했다”[각주:3]고 말한다. 걷기는 그에게 새로운 건강을 가져다주었다. 검은 숲을 걸으며 생각하고 상상한다. 그 생각들이 그에게 기존의 건강과는 확연히 다른 건강 개념을 안겨 주었다. 그는 걸으며 ‘사유의 여행자’가 된 것이다. “나는 다시 은둔자가 되어 하루에 열 시간씩 걷는다네.”[각주:4] 


걸으면서 생각하고 상상하는 사람은 자유롭다. 걷기와 함께 책의 노예에서 벗어난다. 그동안 나를 억눌렀던 확신과 의견, 지식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다. 걷는 순간에는 참고할 문헌도, 토론할 상대도 없다. 물론 약간의 메모는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로지 나의 생각, 나의 언어로만 생각이 진행된다. 어느 무엇보다 가볍고 경쾌한 것이다. 니체가 얻은 건강법이란 바로 이런 경지에 들어서서 ‘걸으면서 사유하기’, ‘사유하면서 걷기’였다. ‘영혼회귀’는 이 걷기 건강법에 빚을 진 걷기의 사유이다.


루소도 걸어야만 정말로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는 책상과 종이, 책만 봐도 지겨워진다고까지 말한다.[각주:5] 그는 ‘옛날 인간’을 자신 속에서 발견하기 위해서 걷는다. 그가 찾는 것은 ‘절대적인 원시성’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찾은 것은 아니다. 걷기를 통해서 내 안에 있는 그것을 찾는다.


걸으며 수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들이 내 안에 있는 껍질을 벗겨 낸다. 왜냐하면 질문들은 사회생활을 통해 두텁게 형성되었던 통념들을 깰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부자연스럽고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던 상류사회를 떠나서 오로지 혼자 걸음으로써 유목인의 충만감에 이르려했다. 그 순간 에고이즘도 아니고, 그렇다고 편애도 아닌 진정한 자기 사랑(amour de soi)을 발견한다. 사실 사회와 더불어 자기 사랑이 편애로 퇴행하고 말았다. 편애는 사랑이 아니다. 거짓 사랑인 편애를 지우고 자기 사랑으로 돌아가려면 걷고 또 걸어야 한다. 걸으며 통념의 껍질을 벗겨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 육십이 넘어가자, 이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걷는다. 더 이상 ‘대단한 인물’이 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존재들이 흐르는 실개천이 자신을 관통해 지나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둔다.[각주:6] 마침내 다음과 같은 상태에 이른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그냥 걸을 뿐이다. 그러면 주변의 모든 것이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겁이 많아 사방을 살피는 새에게도 관대함을 발휘하고, 연약해서 구부러지는 꽃에게도 관대함을 발휘하고, 새로 돋아난 나뭇잎에게도 관대함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평온하게 걷는 그 순간, 자신을 내맡기고 자신을 주고 자신을 버리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덤으로, 현존에 대한 무상의 축복으로 주어진다.

-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책세상, 2014, 120쪽.




걷기 위해서는 ‘밖’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평상시 어느 ‘안’에서 다른 ‘안’으로 건너가기만 한다.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자기 집에서 근처 가게로. ‘진짜배기 밖’에 나가고 싶다. 그래서 밖에 나가 걷는다. 지도를 뒤져보고, 배낭을 메고, 오솔길을 찾아보고, 방향을 가늠하며 걸어간다. 손과 발의 규칙성에 몸을 맡긴 채 끊임없이 걷는다. 그러나 걷다 보면 ‘안’과 ‘밖’이 더 이상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진짜배기’라는 것 자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걸 깨닫는 순간 나를 둘러싼 모든 풍경이 천천히 다가와 내게로 젖어든다. 이제 모든 ‘안’의 풍경들과 우정이 깊어지는 것이다. 내 식대로 말한다면, 풍경이 내게 증여하는 것이다. 내가 그에게 나를 증여하니까, 풍경이 나에게 그들을 증여한다. 나를 사로잡았던 교환체계가 사라지고, 한 순간에 증여 체계가 내게 스며드는 것이다.


제대로 걸으려 한다면 혼자 걸어야 한다. 그러나 혼자 걸어도 완전히 혼자인 법이 없다. 그로는 걷는 것은 자연 속에 잠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무들과 꽃들, 길들이 나에게 말을 걸고 인사를 한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 빗소리들은 나의 길 동무이다. 어떤 감각들을 불러일으키며 그들과 독특한 관계가 구성되면서 어떤 도취감이 생긴다.


이 순간 ‘소유’의 긍정적인 면이 열린다. 산꼭대기까지 낑낑대고 기어오르는 수고를 통해 내 눈 아래 펼쳐진 모든 정경이 내 것이 된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나의 소유, 온전히 긍정적인 소유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착취가 아닌 소유, 나와 그것들이 함께 하는 소유이다. 어쩌면 자연이 나를 소유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공동소유란 서로 소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걷기는 혼자가 아니다. 걷는 즉시 둘이 된다. 혹시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나의 다리에게 격려를 하며 걸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 동무가 된다. 걷기는 끊임없는 관계망의 장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도대체 걷기의 증여가 주는 혜택은 끝이 없다.


 * * *


다시 고향 제주다. 저녁이 되자 약속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안부를 전하고, 서로 흥을 돋우기 바쁘다. 이미 은퇴하신 선생님도 즐거우신지, 옛 노래를 한껏 흥얼거리신다. 가라타니 고진 같은 철학자는 씨족사회의 교환양식인 ‘증여-답례’를 “고차원적으로 회복하자”고 말한다. 이런 친구들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세상 야박한 걸 탓하지 말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먼저 증여의 마음을 연습해야하지 않을까. 그게 세상을 바꾸는 출발일 테니 말이다. 프레데리크 그로의 제안대로 바로 당장 걷기부터 시작해보자. 풍경과 나누는 그 증여를 우선 연습해보자.



※ 이 글은 이전 썼던 짧은 글을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와 연결하여 개고한 것입니다. 평소 그 글이 아쉬워, 걷기라는 주제와 연결하여 좀 더 확장하고 싶었는데, 이 기회에 실행하게 되었습니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 10점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이재형 옮김/책세상


  1. 각주 1) 프레데리크 그로의 주저는 『푸코와 광기(Foucault et la folie)』이다. 푸코의 전 사유에 있어서 ‘광기’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본문으로]
  2. 각주 2) 미셸 푸코 지음,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옮김, 동문선, 2007, 545쪽. [본문으로]
  3. 각주 3)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이재형 옮김, 책세상, 2014, 30쪽. [본문으로]
  4. 각주 4)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같은 책, 32쪽. [본문으로]
  5. 각주 5)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같은 책, 101쪽. [본문으로]
  6. 각주 6)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같은 책, 11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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