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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도서관

[약선생의 도서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향한 두 시선, 알튀세르와 푸코

by 북드라망 2016. 5. 3.

경계인의 해방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새벽 출근 시간, 졸린 눈을 비비며 들어가 샤워를 할 때면 거울에 비친 내 몸을 익숙한 듯 찬찬히 뜯어보게 된다. 얼굴에 주름이 좀 생기긴 했지만 그리 나이 들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옆구리까지 흘러넘친 뱃살이 볼수록 끔찍하다. 이제는 도무지 저 놈들을 걷어내질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에 좀 서글픈 느낌이 솟아나기도 한다. 저 늘어진 살덩이가 방구석에 틀어박혀 이제는 하찮아진 나의 생명을 끔찍하게 보여주는 듯해서다.


언젠가 오십 살이 가까워가는 내 자신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먼저 차변(借邊)쪽 자산(資産). 평범하지만 꼬박꼬박 월급 나오는 직장은 내게 과분하다. 이걸로 네 식구를 먹여 살렸으니 저평가할 수는 없다. 더구나 승진도 늦지 않게 해 왔으니, 회사일로 무료하진 않았다. 이리 보면 운이 그리 나빠 보이진 않는다. 지금껏 저축을 다 빨아 먹고 빚만 남은 아파트 한 채. 그래도 퇴근하고 돌아갈 방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늦은 나이에 철학을 공부하고 나서, 한동안 나는 그런 푸근한 일상(살아갈수록 이게 환상에 가깝다는 것을 눈치껏 알게 된다)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해석한 철학책에 비추어, 푸근한 일상에 감추어진 문제들이 불쑥 불쑥 드러나서이다. 그러니까 인생 대차대조표의 대변(貸邊) 항목들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다. 특히 그간 보이지 않던 정신계에 푸근함이라는 자산 오른편에 다양한 부채들이 가득한 걸 보고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런 걸 모르고 오십년 가까이 살아왔다니. 아마도 내가 무의식중에 은폐해 왔던 삶의 부채들을 철학이 집중적으로 부각시켜준 탓일 게다. 당시에는 철학이 그렇게만 해석되어졌다.


그래서인지 그때는 그런 부채들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억지로 도덕적 결론을 내는 글만을 쓰게 되었다. 물론 삶의 부채들을 갚아 나가는 것이 중요할 터이지만, 모든 것이 하나의 도덕으로 단죄되는 것 같아 또 괴로웠다. 철학으로 정신이 해방되어야 하는데, 역설적으로 일상과 공부에 괴리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공부와 일상의 괴리는 은폐된 부채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런 경직된 마음을 풀어준 책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군주국에 대하여)』(Ll Principe-De Principatibus)이다. 그때 나는 연구실에서 ‘맑스 정치철학 강좌’를 듣고 있었는데, 강의에서 강사 한분이 맑스주의자인 알튀세르(Louis Althuser, 1918~1990)가 마키아벨리를 높이 평가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가 쓴 마키아벨리에 대한 글을 찾아 읽고, 내친김에 『군주론』도 읽게 되었다.


알튀세르가 쓴 『마키아벨리의 고독』을 읽고 내친 김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읽게 되었다.


우선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가 낯설지만은 않으면서, 동시에 그저 친숙하지만도 않은 묘한 느낌, 그러니까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낯선 친숙함’(umheimlichkeit)에 빠지게 한다고 말한다.[각주:1] 왜 낯설지만 친숙한 것일까? 내가 느끼기에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무척이나 현실주의적인 세계관을 숨기지 않고 까발리기 때문일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럽고, 기만적이라고 단언한다. 내가 그들을 잘 대우하면, 그들도 나를 잘 대해 줄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힘 있는 자리에 있거나, 내가 뭐라도 도움이 될 만하다면 나서서 내게 뭔가 해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위험에 처하면 반드시 등을 돌릴 것이다! 대체로 이런 생각이다.


심지어 이런 말도 한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두려워하게 만들 때보다(makes himself feared) 스스로를 사랑받게 만들 때(makes himself loved) 더 거리낌 없이 해를 입힌다.”[각주:2] 즉, 두려움이 주는 통제력이 해체되어 버리면, 심지어 사랑하면 할수록 더더욱 그들은 거리낌 없이 나를 공격한다는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 지하 만화방에서나 보던 이현세나 박봉성식 현실주의 아니던가. 모두 알면서도 대놓고는 말하지 않던 그 사실을 까발리는 시원함이 이 안에는 있었다. 그에게서 이런 문장을 볼 때 마다 웬일인지 나도 그간 가책(?)이 일거에 사라지는 해방감을 느꼈다.


물론 알튀세르가 이런 문장들을 가지고 마키아벨리가 낯설고 친숙하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마키아벨리가 ‘새로운 형태의 지식 발명자’라고 생각했다. 마키아벨리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선험적인 정체론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정체(政體, government)를 자의적으로 분류하고 정상적인 정체(좋은 정부)와 병리적인 정체(나쁜 정부)를 사전적으로 나누는 고리타분한 유형론에 빠지지 않는다.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가 통일되지 않은 이탈리아에서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전제조건, 즉 어떤 정체가, 어느 누가 그 임무를 달성할 수 있는지를 새롭게 질문한다는 점을 끄집어낸다. 마키아벨리는 기존 유형에 의존하지 않은 채 자신의 목표에 맞는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 낸 ‘발명자’였다. 그는 당대의 친숙한 주제인 군주를 완전히 낯선 질문 속에서 다루었다. 아마 나를 시원하게 해준 해방감은 그의 현실주의가 이 위치에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특이성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때 드러난다.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이 정치적 과제는 현존하는 어떤 군주국에 의해서도 완수될 수 없다. 현존하는 군주국들은 모두 낡았으며, 또 이미 모두 봉건제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장하길, ‘오직 새로운 군주국의 새로운 군주만이’ 이 과제를 완수할 수 있다고 자신의 질문에 급진적으로 답한다.[각주:3] 낡은 군주국은 새로운 군주를 ‘낡음의 포로’로 사로잡아두기 때문에, 오직 새로운 군주국의 새로운 군주만이 이 어려운 과제를 완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오직 새로운 군주국의 새로운 군주만이’



이 의미에서 더욱이 주의해야 할 것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오로지 ‘혼자’(!)여야 한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의 첫 번째 계기인 군주주의적 계기 혹은 독재적 계기를 발견하였다. 물론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정통 맑스주의적 주제를 끌어내려는 알튀세르의 의지를 쉽게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독재론을 다른 감각으로 받아들이곤 ‘혼자’(!) 기뻐했다.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 해석이 개인과 사회 간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한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층위와 접한다. 가족, 회사, 친구, 친척 등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복잡한 관계들이 구성된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이런 저런 관계를 그럭저럭 이끌고 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관계들이 파편화되고 분열적으로 개인을 압박한다. 특히 관계들 사이의 기만적인 모습들이 인식되면 혐오감마저 느낄 수도 있다. 지극히 모순적인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아마 내가 공부와 일상에 괴리가 발생하는 것도 이런 상태 중 하나일 것이다.


삶의 어느 국면에는 반드시 이 관계들을 풀어내고 돌파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 그러나 이 과제를 돌파하는 것은 기존의 주체와 욕망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방식을 대입하여 생각해보면, 낡은 주체는 새로운 욕망조차 낡음의 포로로 사로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주체의 새로운 욕망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 그 새로운 욕망은 단 하나의 욕망이어야 한다! 오로지 하나의 군주적 욕망이 다른 모든 욕망을 다스릴 때, 비로소 새로운 주체가 구성될 수 있다는 것, 오로지 홀로된 새 욕망만이 파편화된 관계들을 돌파하고 새로운 생(生)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주 신기한 깨달음이다. 이른바 욕망의 독재적 계기라고 할 수 있었다. 나에게 ‘혼자’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이다.


오로지 홀로된 새 욕망만이 파편화된 관계들을 돌파하고 새로운 생(生)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시간은 흘러 이런 생각으로 마키아벨리를 읽었던 시절이 지나고, 또 다른 계기가 찾아왔다. 미셸 푸코의 마키아벨리 독해를 읽은 것이다. 푸코는 알튀세르와 달리 마키아벨리를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알튀세르를 중심으로 한 현대 좌파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과정에서 마키아벨리는 근대를 연 사상가가 아니라, 어떤 시대의 종말을, 혹은 영토적 문제계의 정점에 있는 옛 사람에 불과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각주:4] 그도 그럴 것이 마키아벨리는 16세기 공국들이 영토를 두고 싸우고 통일하는 것을 대상으로 사유한 사람이다. 인구와 순환을 문제계로 두고 사유하고자 했던 푸코에게는 마키아벨리의 사유가 이미 낡은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흥미로웠던 부분은 푸코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16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만연했던 반(反)-마키아벨리 문헌들을 일일이 찾아 분석하는 장면이다. 그런 문헌들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카톨릭 진영, 특히 예수회에서 나온 책들이고, 다른 하나는 당대의 통치론자들에게서 나온 책들이다. 특히 후자에게 반마키아벨리 문헌은 하나의 장르이다. 통치론자들은 ‘반 마키아벨리적 글쓰기’를 통해서, 마키아벨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만의 생각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재구성하고(이렇게 재구성된 마키아벨리가 맞냐 틀리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재구성된 군주론에 입각해서 마키아벨리의 이론을 반대하고(궁극적으로 제대로 반대했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자신들의 주장을 설파하는 식인 것이다(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는 공국 밖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군주와 공국 사이에 자연적이거나 법률적 연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군주는 단지 상속 혹은 병합, 정복을 통해서 공국을 얻었을 뿐이다. 그는 공국에 대해 소유권이 근본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빼앗길 위협에 빠진다. 그러므로 군주는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서의 공국, 더 특정하여 말한다면 자신이 소유한 ‘영토’와 자신에게 복종하는 ‘신민’과의 연결고리를 계속 유지하는 것만이 문제일 뿐이다.


그렇다면 16세기 통치론자들에게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군주의 수완은 새로운 통치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반-마키아벨리주의자들이 말하는 ‘통치’의 목적은 영토, 신민이라기보다 군주가 관리하는 모든 사물들과 관계들이기 때문이다. 통치에서 영토와 신민은 통치의 대상인 ‘관계들’의 주요한 구성요소일 뿐 다른 구성요소(이를테면 인구, 경제 등)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이 의미에서 마키아벨리에게는 ‘통치술’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통치론자들에게 마키아벨리는 ‘영토 보전술’이 있을 뿐이었다. 통치술의 시대에 마키아벨리는 끝내 반박되었다.


그러나 푸코는 마키아벨리가 다양한 가치, 때로는 부정적이고 때로는 거꾸로 긍정적인 가치를 지니며 논쟁의 핵심에 있었다고도 말한다. 푸코의 놀라운 통찰력은 이 지점에서 이어지는데, 그것은 ‘통치술’을 정의한 것은 마키아벨리가 아니지만, 그가 말한 바를 통해 통치술이 탐구되었다는 지적이다. 새로운 통치론자들은 마키아벨리가 말한바 때문에 논쟁이 일어난 것도, 그에 의해서나 그를 통해서 통치술이 발견된 것도 아니다. 새로운 통치술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는 오로지 마키아벨리를 통해서만, 그의 언어를 반대항으로 내세워야만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마키아벨리는 맑스이겠죠. 맑스에 의해서는 아니지만 맑스를 통해 말들이 나오니까요.”[각주:5] 마키아벨리는 새로운 담론들이 나오는 출구였던 것이다. 맑스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통치술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오로지 마키아벨리를 통해서만, 그를 반대항으로 내세워야만 가능했다.



조롱인지 평가인지 모를 푸코의 이 말에서 나는 오히려 마키아벨리의 위치를 재성찰하게 된다. 그는 맑스주의자들에게는 근대의 출발을 이루는 경계에 고독하게 존재하는 점으로 인식되지만, 새로운 통치론자들에게는 고대의 마지막 경계를 이루는 정점으로 인식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곳저곳에서 시차를 두고 바라본 경계, 그 선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자신만의 사유로 새로운 시대를 돌파하고 있었다. 알튀세르도 이렇게 말한다. “<혼자>, 즉 그는 자신이 말하는 항해자처럼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는 모험을 하고 새로운 이론을 세우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말하자면 구세계에 지배적인 자명한 진리로부터 결국 단절되고, 그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판명되어야 했습니다.”[각주:6]
 
그로부터 단절되어 시작하였든(알튀세르), 그를 정점으로 단절되었든(푸코), 그의 ‘군주(=혼자)’야말로 내가 철학의 해방감을 되찾아 온 귀중한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출구로 삼아 어떤 담론도 가능하게 할 엄두를 낸 첫 걸음이기도 하다. 어떤 비난이나 조롱도 나의 이야기를 멈추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경계에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경계에 있기 때문에 어떤 비난과 조롱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게 마키아벨리가 내게 준 경계인의 해방감이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1. 각주 1) 루이 알튀세르 지음, 『마키아벨리의 고독』, 김석민 옮김, 새길, 1992, 225쪽. [본문으로]
  2. 각주 2)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군국에 대하여)』, 곽차섭 옮김·주해, 도서출판 길, 2015, 211쪽. ;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권기돈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08, 108쪽 ; Niccolo Machiavelli (1469–1527).『The Prince』.The Harvard Classics(PDF). 1909–14. P. 32 [본문으로]
  3. 각주 3) 루이 알튀세르 지음, 『마키아벨리의 고독』, 김석민 옮김, 새길, 1992, 227쪽. [본문으로]
  4. 각주 4) 미셸 푸코 지음, 『안전, 영토, 인구』, 오르트망 옮김, 도서출판 논장, 2011, 103쪽. [본문으로]
  5. 각주 5) 미셸 푸코 지음, 『안전, 영토, 인구』, 오르트망 옮김, 도서출판 논장, 2011, 338쪽. [본문으로]
  6. 각주 6) 루이 알튀세르 지음, 『마키아벨리의 고독』, 김석민 옮김, 새길, 1992, 23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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