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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의 고전분투기

마지막글 [대학]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천명은 아무것도 아니다

by 북드라망 2016. 3. 9.



천명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峻命不易(준명불이)




『대학』의 마지막장은 전 10장으로 治國平天下(치국평천하)장이다. 결국 대학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平天下(평천하)인 것이다. 격물치지에서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의 최종목표는 결국 평천하를 위한 것이었다. 平天下(평천하)! 평평할 平(평)자가 있어서 이 말이 꽤 그럴듯한 것 같지만 사실 천하를 정복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우리같이 작은 나라 백성들에게는 平天下(평천하)는 썩 유쾌한 말이 아니다. 무슨 권리로 평천하를 운운할 수 있다는 말인가? 평천하 뿐 아니라 치국의 군주도 마찬가지다. 그는 무슨 권리로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가? 아비가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야 자식을 낳았기 때문이라 치자. 하지만 군주의 통치는 소위 “쎈놈”이니까 함부로 대들다간 큰일 난다는 것 외에 어떤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17세기 홉스는 교황청의 권위를 벗어버린 영국황실의 정당성을 대기위해 사회계약론을 주장했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모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권리를 자연권으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이 악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사회는 필연적으로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그래서 안녕을 위해서 자신의 주권을 모두 군주에게 위탁하는 것이 사회의 존립근거라는 것이다. 백성은 자신의 안녕을 군주에게 맡기는 대신 군주의 명령과 군주가 제정하는 법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약은 함부로 파기할 수 없는 절대적 권한을 가지게 된다. 


'군주'의 몸은 수 많은 개인들로 이루어져있다. 이것이 사회계약론에서 말하는 군주의 모습이다.


治國平天下(치국평천하)장의 첫 구절 역시 평천하의 정당성 정도는 이야기해야 한다. 제나라 잘 다스린다고, 천하를 평정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治國平天下(치국평천하)장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른바 평천하가 그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다는 것은 윗사람이 부모께 효도하면(老老) 백성에게서 효가 일어나고(興孝), 윗사람이 웃어른을 제대로 모시면(長長) 백성에게서 공경함이 일어나고(興悌), 윗사람이 홀로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恤孤) 백성이 배신하지 않는다.(不倍) 이러한 까닭에 군자는 絜矩(혈구)의 道(도)가 있다.” 아니 또 효 타령이다. 군주가 老老(노노), 자신의 부모(老)를 부모답게 잘 모시고(老), 군주가 長長(장장), 자신의 웃어른(長)을 웃어른답게 잘 대하고(長), 군주가 恤孤(휼고), 홀로된 이를 불쌍히 여기면, 백성이 따라하고, 배반하지 않는단다. 이것은 평천하의 정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당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 같다. 정당성은 당연한 권리라는 말인데, 백성의 마음을 움직여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이미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유가에서는 천자의 정당성을 하늘의 명령이라는 天命(천명)에서 찾는다. 하지만 이 문장 어디에도 천명은 없고 백성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의미로 흥(興)자를 쓰고, 백성의 마음이 돌아선다는 의미로 배반할 배(倍)자를 쓰고 있다. 말하자면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천명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과 진배없다. 심지어 이것을 직접 언급하고 있는 문장도 있다.


詩云(시운) 시에서 말하기를
殷之未喪師(은지미상사) 은나라가 민심을 잃지 않았을 때는
克配上帝(극배상제) 상제와 짝할 수 있었다.
儀監于殷(의감우은) 마땅히 은나라를 거울로 삼을지니,
峻命不易(준명불이) 천명을 보존하기는 쉽지 않다 하였으니,
道得衆則得國(도득중즉득국) 失衆則失國(실중즉실국) 백성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백성을 잃으면 나라를 잃음을 말한 것이다.



은나라는 대제국이었는데, 주나라 무왕에게 정복을 당했다. 이 구절이 언급하는 시는 『시경』의 「문왕편」인데, 주나라 황실에서 자신의 후손들에게 대제국 은이 망한 이유를 명심하라고 가르친 시다. 그래서 得衆則得國(득중즉득국)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失衆則失國(실중즉실국)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고 말한다. 상제란 초월적 힘을 가지고 그에게 천명을 부여하는 자가 아니라, 백성의 마음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 峻命不易(준명불이), 지엄한 명, 곧 천명은 지키기가 쉽지 않다고 후손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문장 역시 정복군주에게 평천하의 정당성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정복군주의 힘마저도 부정한다. 네가 잘나서 그 나라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정복당한 그 나라 군주가 민심을 잃는 바람에 네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러니 정복으로 천하를 차지하게 된 군주가 할 일은 힘자랑을 할 것이 아니라 첫째도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고, 둘째도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는 것을 이 문장은 말하고 있다.


"그 마음 내가 얻고 싶은데..."


그렇다면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가? 치국평천하장의 첫 구절에서는 老老(노노), 長長(장장), 恤孤(휼고)하는 군자에게는 絜矩(혈구)의 道(도)가 있다고 했다. 그래야 백성은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때 絜(혈)은 치수를 잰다는 뜻이고, 矩(구)는 제도를 할 때 쓰는 기역자로 꺾어진 곱자를 말한다. 곱자는 길고 짧음을 판별하거나 굽었는지, 쭉 펴진 것인지를 판별하는 것이니 혈구지도는 ‘곱자로 재는 방법’, 즉 판단의 척도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판단하는 것일까? “(네가) 윗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너의)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며, (네가) 아랫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너의) 윗사람을 섬기지 말며, 앞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뒷사람에게 부가하지 말며 뒷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앞사람을 따르지 말며, 오른쪽에게 싫었던 것으로 왼쪽과 교류하지 말며, 왼쪽에게 싫었던 것으로 오른쪽과 교류하지 말라. 이를 일러 絜矩之道(혈구지도)라고 하는 것이다.” 참으로 깨알 같은 설명이 아닐 수 없다. 백성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자기마음으로 미루어보는 수밖에. 군주 네가 싫었던 것은 당연히 백성도 싫은 것이니 네가 싫은 것을 백성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 혈구지도의 의미다. 


다음 구절은 혈구지도의 지향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데, “시에서 이르기를 ‘즐거운 군자여, 백성의 부모이다’ 했으니, (군주는) 백성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바를 싫어한다. 이를 일러 백성의 부모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부모란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그 자식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 자식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라고 아예 못을 박는다. 군주는 오직 백성만을 바라봐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군주가 제 맘대로 하면 어쩔 것인가? 군주에게 이렇게 권고할 수는 있지만,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자이니 제 맘대로 하더라도 뭐 어쩔 도리가 없는 것 아닐까?
 하지만 『대학』의 平天下장은 이를 놓치지 않는다. 또 시경을 빗대서 말하는데, “시에 이르기를  ‘깍아지른 저 남산이여 바위가 높고도 높구나. 용감하신 윤장군이시여~ 백성들이 모두 너를 우러러 보고 있다’ 하였으니, 나라를 소유한 자는 삼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가 삼가지 않고) 편벽되면 천하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로 맺고 있다. 사실 시의 인용 내용은 저 높은 바위산의 위용에 찬 모습처럼 늠름한 윤장군을 백성들이 우러러 본다는 평범하다면 평범한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포인트는 백성이 보고 있다는 것이다. 높이 있으니 어디 숨을 곳 하나 없이 일거수일투족이 다 드러나는 자리가 바로 군주의 자리라는 것이다. 만약 군주 된 자가 누가 보랴 방심하고 제멋대로 하다간, 천하에 죽임을 당한다고 경고한다.  이때 죽임을 당한다는 의미로 쓰는 글자를 ‘베다’, ‘죽이다’의 뜻이 있는 殺(살)자를 쓰지 않고, ‘욕보이다’, ‘죽이다’의 뜻이 있는 僇(륙)자를 썼다는 것은 그 죽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 죽임은 자객에게 사사로이 살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공개적으로 목숨도 잃고 나라도 잃어서 천하에서 욕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왕은 백성의 부모라는 말이 어떤 권위를 주는 말이 아니라, 제대로 못하면 너도 죽고 나라도 잃는다는 엄청난 경고를 숨기고 있는 말이다. 그러니까 峻命不易(준명불이)는 하늘의 이름을 빌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복자 자신이 가진 힘조차도 부정하면서 천명은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 하시면 바로 '퇴장'입니다


그런데 왜 老老(노노), 長長(장장), 恤孤(휼고)를 첫 번째로 들었을까? 백성이 좋아하는 일이란 세속적으로 생각하면 잘 먹고 잘사는 일 아닐까? 히틀러가 1차 대전으로 쫄딱 망한 게르만민족에게 옛 영광을 회복하자고 외쳤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광기에 휩싸였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제국의 도를 말하면서 “德者(덕자) 本也(본야) 財者(재자) 末也(말야)”라고 하고 있다. 덕이 근본이고 재물은 말단이라는 말이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제대로 사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군주는 당연히 영토를 더욱 확장하고 싶고, 왕실의 재정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도 늘 경제대국을 꿈꾸지 않는가? 그러나 『대학』은 군주가 덕보다 재물을 우선시 하게 되면 하면, 爭民施奪(쟁민시탈), 즉 백성을 서로 싸우게 하고, 빼앗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못 박는다. 재물은 궁핍하지 않을 정도면 족한 것인데 그것을 우선시 하고 나라가 오히려 장려하기까지 한다면 백성들에게 몹쓸 짓을 가르치는 꼴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글자그대로 재물이 근본이 되는 사회, 자본주의에 사는 우리가 맨 날 아귀다툼을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보고 배운 것이 그것 밖에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재물이 풍족하지 않으면 고아나 홀아비, 과부 같은 사회의 대표적 약자인 홀로된 자를 어떻게 보살펴 준다는 말일까? 『대학』에서는 “재물을 생산함에도 바른 길이 있으니, 생산하는 사람이 많고, 그것을 쓰는 사람이 적으며, 그것을 생산함에는 때를 놓치지 않게 하고, 그것을 사용함에는 수입을 헤아려 쓸 곳에 쓰게 하면, 재물은 항상 풍족할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재물을 생산하는 것은 다다익선이 아니라 도에 맞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자를 생산하는 백성보다, 그것을 뜯어먹는 자들이 많게 되면 안되고, 군주가 제 욕심으로 농사철에 부역을 시킨다든지 전쟁에 동원한다든지 하지 않고, 쓰는 것도 용도에 맞게 쓸 곳에 쓰면 정치를 위한 재정을 확충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약자를 보살피는 것은 남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인 것이다.


성리학이 국학이 된 이후에, 『대학』은 학문에 뜻을 둔 성인이 된 자가 처음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자, 제왕이 될 자를 가르치는 책이었다. 사실 왕권이란 힘이 있어야 얻는 것이고, 무력을 동반하기에 언제나 많은 피를 뿌린다. 그래서 그 힘은 곧 지배의 권리다. 그런데 『대학』은 제왕이 될 자들에게 그 힘은 실상 아무것도 아님을 가르친다. 힘이란 언제나 유지될 수는 없는 법이기에 더 강한 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믿을 건 백성 밖에 없는 것이다. 군주의 덕으로 백성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누가 군주 너를 위해 일을 할 것이며, 누가 군주 너를 위해 기꺼이 전쟁터로 달려가겠는가를 깨우치게 하는 것이 대학이다. 그 당연한 이치를 깨우치기 위해 격물치지에서 성의 정심으로 수신, 제가까지를 달려오면서 거듭거듭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치국이든 평천하든 한번 도모해 볼 수 있는 것이다. 峻命不易(준명불이)! 스스로 자신의 토대를 허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조차 없다는 것을 웅변하는 말이다.


글_최유미


☆ 오늘의 『대학 』 ☆

* 『대학』 전 10장

  

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老老而民 興孝하며 長長而民興弟하며恤孤而民不倍하나니 是以 君子有絜矩之道也니라.

 

(소위평천하재치기국자, 상 노노이민 흥효, 상 장장이민 흥제, 상 휼고이민 불배, 시이군자 유혈구지도야)

  

이른바 평천하가 그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다는 것은 윗사람이 부모께 효도하면 백성에게서 효가 일어나고, 윗사람이 웃어른을 제대로 모시면 백성에게서 공경함이 일어나고, 윗사람이 홀로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 백성이 배신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군자는 혈구의 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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