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스쿨’에서 공부하다
1. 『논어』를 다시 보다
『논어(論語)』는 한 사람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 아니다. 공자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의 제자들의 말과 행동 또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해 놓은 책이다. 스승의 사후에 제자들이 스승을 기억하며 논찬(論纂)한 것이다. 여러 사람의 기록을 정리해 묶다보니 중복된 구절도 많고, 연관성이 없는 문장들의 나열 같아 보이기도 하다. 누가 편찬했는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논어』에 공자(孔子)이외에 증자(曾子)와 유자(有子)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제자들이 편찬에 깊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책이 『논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도 한(漢)나라 때이다.
『논어』는 총 20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편의 이름은 그 편의 첫머리에 나오는 두 글자를 취해서 붙였다. 『맹자(孟子)』의 경우만 보더라고 보통 각 편의 이름이 그 편의 주제를 나타내고 있지만 『논어』는 문장들이 하나의 주제로 묶여지지 않다보니 편명을 그냥 첫머리에 나오는 글자로 붙였다. 그래서 문장의 구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첫 편인 「학이(學而)」편을 보면 총 16개의 문장 중에 공자의 말이 8개이고 나머지 7개는 유자(有子), 증자(曾子), 자하(子夏), 자공(子貢) 등 공자의 제자들의 말이고, 하나는 공자와 자공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분명 『논어』가 공자의 어록이라고 했으니까 몽땅 ‘자왈(子曰)’로 되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실제 『논어』에는 제자들의 말이 상당수 등장한다.
다시 「학이」편을 잘 보면 ‘자왈’ 다음에 ‘유자왈’, 다음에 ‘자왈’ 그 다음에 ‘증자왈’ 그리고 다시 ‘자왈’, 다시 ‘자왈’ 다음에는 ‘자하왈’의 순서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순서는 사실 공자 사후에 각 제자들이 세운 학파들 간에 힘겨루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노나라 사람이었던 유자(有子)의 경우 그의 용모가 공자와 비슷해서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다른 제자들이 유자로 하여금 스승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했다고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논어』에서 딱히 드러나지 않지만 아마도 상당히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스승인 공자의 뒤를 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유자를 공자 대신 모시자는 의견에 강력하게 반대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증자이다.
『논어』의 편찬에 가장 깊이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유자와 증자의 제자들이 이왕이면 자기 스승의 말을 앞에 넣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공자 사후에 진행된 『논어』의 편찬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통합되고, 정리되어 『논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은 후한(後漢) 때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온전히 전해지는 판본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공자의 고향인 노(魯)나라에서 통용되던 『노논어』, 제(齊)나라에서 통용되던 『제논어』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논어』가 한 종류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크다. 만약 이들을 정리해서 하나로 통일한다고 하면 각 학파의 제자들이 서로 자기 스승을 돋보이게 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래서 「학이」편 장의 순서가 정해졌다면 『논어』는 정말 각 제자들이 박 터지게 싸운 결과일 수도 있다.
2. 일상의 지혜를 배우다
그래서 『논어』를 읽으면서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 중에 하나는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앞서 본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여러 에피소드를 보면 단지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생생한 모습들이 있다. 우둔해 보이기 조차했던 안회나 급한 성격으로 매번 혼이 나는 자로, 뭘 그렇게 자꾸 물어대는 자공, 낮잠 자다가 혼이 나는 재아 등 우리 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스승 공자 역시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모습으로만 쓰여 있지 않다. 공자도 때로는 실수도 하고, 화도 내고, 제자와 논쟁으로 상처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점들이 『논어』가 ‘별 것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다면 2,500년이라는 시간동안 『논어』가 읽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1차적인 이유는 『논어』가 한(漢)대에 관리 시험 과목에 채택되었기 때문이겠지만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이렇게 오랜 세월 읽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별 것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것들,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항상 고민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읽힌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석을 달았던 것은 아닐까?
『논어』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듯이 공자가 내내 이야기하는 것도 ‘사람’에 대한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새와 짐승과는 어울려 살아갈 수는 없으니,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 누구와 어울리겠는가?” 우리는 혼자 살 수 없다. 누구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과 어우러져 잘 사는 것이 공자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잘 사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공자가 배움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지혜를 배우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서도 배우고, 자기를 돌아보면서도 배운다.
『논어』 「자장」편을 보면 공자의 말이 아니라 전부 제자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자장(子張), 자하(子夏), 자유(子游), 증자(曾子), 자공(子貢)의 이야기들인데 자공을 제외하고 네 사람은 거의 비슷한 연배로 후기제자 그룹의 중요한 인물들이다. 이 편의 이야기들을 보면 이 들은 모두 각기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공부하는 방법에 조금씩 이견(異見)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는 자하의 제자들을 보고, 물 뿌리고 청소하고 손님 접대하는 것에 능하지만 근본은 모른다고 비판한다. 자하의 제자들은 자장에게 사람을 사귀는 방법을 물었는데 자장은 자하와 다른 대답을 해 준다. 예법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다른 여러 제자들과 다르게 증자는 ‘자기 성찰’과 ‘효(孝)’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 간에는 미묘하게 서로를 견제하는 기운이 있다.
당대에는 그다지 힘 있어 보이지 않던 증자학파는 한(漢)나라 때 한유(韓愈)에 의해서 공자, 증자, 맹자로 이어지는 도통(道通)을 얻게 되었고, 송(宋)대 신유학에 이르러서는 주희에 의해 중요한 학풍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에 의해서 다시 읽히고, 해석되어 지면서 2,500년이란 시간을 이어왔다. ‘별 것 없는 이야기’들이 전하는 일상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3. ‘공자스쿨’과 ‘파지스쿨’
나는 2014년부터 인문학 공동체 ‘문탁(問琢)’에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친구들과 『논어』를 읽었다. ‘파지(破地)스쿨’이라고 이름 붙인 작은 학교에서 우리는 마치 2,500년 전의 ‘공자스쿨’과 같이 밥을 함께 먹고, 함께 공부를 했다.
공자나 『논어』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젊은 친구들은 훨씬 자유롭게 『논어』를 보는 것 같았다. 특별할 것 없는 『논어』의 구절들과 친구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고 있었다. 집에서 아버지와 대화가 안 된다고 생각하던 친구는 『논어』를 읽으면서 효(孝)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관계를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고 했다. 다른 친구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문장을 보더니 대뜸 공자는 참 피곤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아침에 도(道)를 들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을 만큼 공자가 도를 구하는 자세가 엄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친구들은 당시 공자는 정말 『논어』에 나오는 예(禮)를 다 지키고 살았을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았는지 궁금해 했다. 그런가하면 『논어』를 읽으면서 사춘기 때에도 해 본적이 없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같은 것을 하게 되었다며 자기가 없으면서 있는 체 했던 것은 아닌지,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알고 있는 것인지 계속 묻게 된다고 했다.
논어를 통해 일상에 대해 계속 되돌아 보고, 묻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맥락 없이 던져지는 『논어』의 문장들은 때로는 마치 암호문처럼 우리를 미로 속에서 헤매게도 했지만 일상에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다시 질문하게 만들었다. 특히 가족이나 친구들과 같은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을 통해서 자기를 단단하게 만들어갔다. 공자가 다시 살아나서 마치 ‘공자스쿨’의 자로나 안회와 같은 제자들에게 해주었듯이 각자의 고민에 맞게 대답을 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공자스쿨’이 지금의 학교와 가장 다른 것은 배움이 단지 지식(知識)을 습득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일 것이다. ‘공자스쿨’의 제자들은 배운 것을 자신의 삶 속에 새겨서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송(宋)대의 유학자였던 정자(程子)는 “『논어』를 읽었을 적에 읽기 전에도 이러한 사람이요. 다 읽고 난 뒤에도 또 다만 이러한 사람이라면 이것은 곧 읽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다.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많이 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 변화를 가질 수 없는 지금 우리의 공부를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글_진달래
이 글을 마지막으로 원문을 중심으로 『대학』을 읽어주신 최유미 선생님, ‘공자스쿨’과 공자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논어』를 읽어주신 진달래 선생님의 <고전분투기>는 잠시 쉽니다. 봄이 절정일 5월, 최유미 선생님의 『중용』으로 다시 <고전분투기>가 다시 시작될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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