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의 용법
몇 년 전에 스피노자의 『윤리학』 세미나를 하는데, 중년의 남성분이 참여하셨다. 스피노자가 기하학적 증명의 방법으로 자신의 철학을 펼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정도면 신뢰할 만 하다고 세미나에 참여하신다는 분이었다. 근데 이 분이 『윤리학』 1부 초반에서 소위 멘붕에 빠지셨다. 『윤리학』의 증명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윤리학』은 공리와 정의를 제시하고, 정리를 도출하는 방식이다. 그 선생님왈, 최초의 공리와 정의 역시 임의적인 것은 신학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해 여러 토론이 있었지만, 그 분은 영 개운치 않으신지 더 이상 세미나에 나오지 않으셨다.
17세기 유럽에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신의 존재 증명을 시도했다. 두 사람 모두 기존의 철학과 신학의 부당한 전제를 문제 삼았고, 신의 본질로부터 신의 존재함을 증명하고자 했다. 데카르트는 절대적 완전성을 신의 본질이라고 정의했고, 스피노자는 절대적으로 무한함을 본질로 정의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불완전함은 결핍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인간과 같은 결핍된 존재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결핍도 없는 절대적 완전함이 있다는 증거라는 논리를 폈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자기원인과 실체의 개념에서부터 실체의 절대적 무한함을 증명함으로써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신의 존재가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름의 논리적인 정합성이 보장된다고, 현실에서 실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의 본질이라고 하는 절대적 완전함이나 절대적 무한함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명제의 참,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년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재론은 그냥 픽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 세미나에 참석하신 선생님의 이의제기는 일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실증주의적 입장이 지지하는 과학은 과연 픽션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천동설은 도그마적인 신학의 주장이고, 지동설은 과학적 진실이라고 배운다. 하지만 물리학적으로 운동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러니까 어디를 기준점으로 하느냐에 따라 지구가 돈다고도, 태양이 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천동설을 바탕으로 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도는 지금도 그 정확도를 자랑하고 있다. 천동설이든 지동설이든 각기 나름의 설명력을 확보하고 있고, 무엇이 더 우월한지 판별할 객관적 기준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과학이론은 대개 실험(경험)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라 믿지만, 그게 말처럼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까마귀는 검다’는 과학이론이 있다고 하자. 이를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있는 까마귀를 모두 조사해야 한다. 단 한 마리라도 다른 색깔이 있으면 이론은 틀린 것이다. 온 세상의 까마귀를 다 조사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앞으로 태어날 까마귀 중에 까만 색깔이 아닌 것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처럼 과학의 객관적 진리성이라는 것도 엄밀히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난감한 지경에 봉착해 버리게 된다.
그러니까 비트겐슈타인 말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면 우주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 논고』를 발표하기 전까지 존재론이 픽션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모두 철학에 속아온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랬다면 장구한 세월을 철학이 그렇게 이어져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 논리적인 픽션에 불과하다면 사람들은 철학의 진리성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철학을 수용했을까? 철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대개 논리적 정합성이나 설명력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하지만 논리적 정합성이나 설명력이 철학이 수용되는데 결정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철학자들조차도 반대자의 논리에 좀처럼 승복하지 않는다. 그건 철학자들이 특별히 편협한 자들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각기 나름의 논리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설명력 또한 과학이론과 마찬가지로 각기 나름으로 상당한 정도의 설명력을 확보하고 있기에, 판단을 위한 객관적인 기준을 설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논리적 정합성도 설명력도 철학이 수용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면, 도대체 사람들은 철학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그 숱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철학은 왜 지금도 여전히 연구되고, 토론되고, 지향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론적 정합성이나 설명력 때문이 아니라 그의 철학이 생산하는 삶의 양식과 비전 때문일 것이다. 주자의 성리학 또한 마찬가지다. 정작 송나라에서는 사문난적으로 핍박을 받았지만, 원나라에서 국학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철학이 제시하는 비전 때문이다. 사실 과학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과학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것은 그것이 가져온 풍요로운 결실 때문이지 객관적 진리성 때문이 아니다. 요컨대 철학이든, 과학이든 진리성이란 그 자체의 논리적 정합성이나 설명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삶을 낳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존재론은 픽션이다. 하지만 존재론은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낳는다.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를 말하는 철학이 윤리학이라면, 국가의 존립근거가 무엇이고 법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가 기대 살고 있는 정치의 근거를 묻는 것이 정치철학일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론은 단지 픽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낳는다. 『중용』의 첫 구절은 존재론과 윤리학 그리고 정치철학의 관계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간명하게 드러내어 주는 것 같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하늘이 만물에게 부여해 준 것을 성(性)이라 한다.
하늘이 부여한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도를 세상에 펴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이 문장은, 존재자가 천부적인 성(性)을 가진다는 존재규정으로 시작해서, 존재자의 삶은 마땅히 따라야할 길(道)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방안으로 교(敎)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 문장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정치의 존립근거가 무엇인지 하는 것들은 전적으로 천부적인 성(性)에서 도출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주자가 쓴 『中庸章句序(중용장구서)』에는 자사(子思)가 도학(道學)이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하여 이 책을 지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물론 이는 주자가 구성한 스토리일 뿐이지만, 공자 사후에 이미 2세대가 지나고 있을 즈음에 자사(子思)가 존재론으로 시작하는 텍스트를 저술한 것은 의미심장한 것 같다. 『논어』의 「공야장」에는 자공(子貢)이 ‘선생님의 문장(文章)은 들을 수 있으나, 선생님께서 성(性)과 천도(天道)를 말씀하심은 들을 수 없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문장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니 윤리학이나 정치철학이라 할 수 있다. 주자는 이 구절에 대해 자공이 비로소 공자께 존재론을 들을 수 있을 만큼 학문수준이 높아졌음을 기뻐하는 말이라고 주석한다. 문장(文章)의 토대는 존재론이지만, 맞춤 교육을 하신 공자는 그 깊이를 이해할 수 없는 제자들에게는 성(性)이나 천도(天道)같은 존재론은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니 공자제자라고 모두 공자에게 존재론을 얻어들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자사가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즉 존재론으로 『중용』을 시작하는 이유는 “자왈(子曰)”이라는 성현의 말씀에만 기대어서는 공자의 가르침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사가 걱정한대로 말이란 세월이 가면 형체가 허물어져 왜곡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존재론에서 시작하면 그로부터 공자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연역해 낼 수 있다. 비록 공자가 생전에 하시지 않은 말씀일지라도 존재론에서 시작하면 그의 말씀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존재론은 단지 픽션이 아니라, 삶을 산출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을 ‘추상기계’라고 했다. 기계는 언제나 무언가를 낳기 때문이다. 『중용』의 첫 문장,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는 바로 추상기계의 작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용』의 첫 구절,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의 한글 번역은 “하늘이 만물에게 부여해 준 것을 성(性)이라 한다.”로 했는데, 주자의 주석을 따른 것이다. 원문인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에는 만물이라는 말은 없다. 존재를 특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존재라는 말과 다름없기에 주자는 하늘이 만물에 부여한 것이라고 주석을 한 것 같다. 만물에 천부적인 성(性)이 부여되어 있다는 의미는 성(性)이 존재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그 존재조건을 따라 사는 것이 바람직한 길[道, 도]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도(道)는 윤리학을 제시한다. 하지만 개별적 존재의 윤리학만으로 충분치 않다. 군주와 신하의 근거는 무엇이고, 법의 근거는 무엇이고, 예의 근거는 무엇인가? 『중용』은 그 근거를 성(性)에서 찾는다. 군주와 신하가 필요한 이유, 법이 필요한 이유, 예가 필요한 이유는 백성들의 성(性)을 잘 발현시키기 위해서다. 이른바 교(敎)를 통해서 윤리를 지키고, 더 나아가 천부적인 성(性)을 실현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가르친다는 뜻의 교(敎)를 썼을까? 문물, 제도는 그것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물, 제도를 통해 만물은 천부적인 성(性)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것을 또한 몸에 새기게 되는 것이다. 파스칼이 말했고,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말하면서 인용했던, “무릎 꿇고 기도하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처럼, 문물, 제도는 관념의 현실태다.
주자는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을 풀이하면서 성(性)은 이치(理)와 같다는 주석을 했다. “性則理也(성즉리야)”, 이것이 성리학의 핵심 테제다. 주자는 기(氣)와 리(理)를 구분해서 말하는 데, 하늘이 음양오행으로써 만물을 낳고, 기(氣)로써 형태를 만들고 리(理)를 또한 부여한다고 풀이한다. 여기서 주자의 리(理)는 다소 특권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리(理)를 명령으로서의 형상이라는 서양의 ‘질료형상론’과 무리하게 겹치는 것은 온당치 않은 것 같다. 이치(理)는 ‘질료형상론’처럼 어떤 목적성에 따라 부여되어서 무정형의 질료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다. 만물은 음양오행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저절로 그러하게 생성되는 것이고, 이치는 저절로 그러함이 가장 잘 발현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치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그러하도록 질료에 주어진 능력인 것이지 기(氣)를 초월하는 명령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부당할 뿐 아니라, 동양적 사유의 특이성을 무시하고 질료형상론의 틀에다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식에 다름 아니다. 인간적인 의미에서 명령은 언제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될 터이지만, 음양오행의 작용에 어떤 목적성이 들어 올 여지는 없다. 그래서 리(理)는 언제나 질료적인 의미의 기(氣)와 함께 있는 것이고, 기(氣)의 능력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통상적인 의미의 명령이 아니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이라는 전제는 솔개는 솔개대로 인간은 인간대로의 천부적인 특질을 긍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천부적인 능력이 있다고 모두 다 동등하게 발휘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주자는 이를 기품(氣禀)으로 설명하는데 발휘의 정도는 모두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건 존재는 언제나 외부와 접속되어 있으므로 외물에 능력의 발휘가 가로막히기도 하고, 천부적으로 빠르고 느림의 정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부여한 천부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바깥으로 드러난 기품에 의지해서 능력 자체를 의심하기도 한다. 그래서 주자는 사람들이 스스로 성(性)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하늘에서 부여된 것임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모두가 순임금 같은 기품을 타고나지는 않았지만, 능력의 측면에서는 동일하기에 노력하면 순임금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자는 여기서 교(敎)의 필요성을 이끌어 낸다. 저마다 기품의 차이가 있지만 타고난 능력을 긍정할 수 있는 공적인 시스템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문물제도 즉, 군주, 법, 예 등의 역할은 기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능력을 잘 발현시켜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주자는 사람들이 교(敎)가 성인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각자 부여받은 성(性)의 발현을 위해 재단되어 진 것이라는 사실은 모른다고 주석하고 있다. 이 주석은 군주나 법, 예의 절대적 권위를 말한다기보다, 오히려 그 권위를 해체하는 듯하다. 성인이 정하신 것이기에 당연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군주나 법, 예의 존재이유는 타고난 백성들이 성(性)을 잘 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이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의 마땅한 용법이다.
글_최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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