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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의 고전분투기

증자가 말하는 효 - 부모님을 걱정시키지 않기위한 '전전긍긍'

by 북드라망 2016. 3. 2.


증자의 전전긍긍(戰戰兢兢)




1. 효(孝)의 아이콘, 증자
 

『논어(論語)』는 공자의 어록(語錄)이다. 하지만 공자가 직접 쓴 것은 아니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 사후 정리한 기록이다. 그리고 우리가 공자, 순자, 맹자와 같이 ~자를 붙이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스승에 대한 호칭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공자왈”은 “공선생님이 말씀하셨다.”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 『논어』는 대부분 ‘공자왈’로 시작한다. 그런데 『논어』에 공자 이외에 등장하는 선생님이 몇 있다. 바로 증자(曾子)와 유자(有子)이다. 이는 『논어』가 주로 증자나, 유자의 제자들에 의해서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증자(曾子)는 공자의 후기 제자로 알려져 있고, 이름은 삼(參)이다. 앞에서 본 자장, 자하, 등과 같은 시기에 공자에게 배운 것으로 생각된다. 증자에 대한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다. 『사기(史記)』에는 “증삼의 자는 자여(子輿)이고, 남무성 사람이고 공자보다 마흔 여섯 살 아래고, 효성이 지극하여 공자가 『효경(孝經)』을 짓게 했다.”고만 나와 있다. 『논어』에 증자에 대한 기록은 14번 등장하는데 대부분이 자기 성찰과 효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가 효성이 지극했다는 직접적인 이야기는 『논어』보다 『맹자(孟子)』에 더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요새였다면 TV에 나왔을 소문난 효자, 증자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에 특히 증자가 그의 아버지 증석을 모신 이야기가 유명하다. 증자는 아버지를 위해서 상을 차릴 때 늘 고기와 술을 준비했다. 그리고 밥상을 치울 때 매번 아버지께 남은 음식을 누구에게 주시겠느냐고 물었다. 증자의 아들 증원도 아버지를 위해 상을 차릴 때 늘 고기와 술을 준비했다. 하지만 상을 물릴 때 증자와 달리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증자가 남은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늘 없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서 맹자는 증자가 매번 아버지께 묻고 늘 남은 음식이 있다고 대답한 것은 항상 아버지께 새로운 음식을 해드리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에 반해 증원은 증자와 같이 고기와 술을 가지고 부모를 봉양하지만 늘 남은 것이 없다고 답하는 것은 남은 음식이 있을 때 부모님께 다시 드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면서 증자가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모두 따라 할 수 있지만 증자의 ‘부모를 모시는 뜻’은 따라 하기는 어렵다고 맹자가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금방 이해하기 어렵다. 증자와 증원은 똑같이 부모를 고기와 술을 매번 상에 빠뜨리지 않았다. 그 만큼 증자와 증원이 부모님을 잘 봉양했다고 할 수 있다. 차이는 증자는 상을 물릴 때 매번 남은 것을 누구에게 주시겠냐고 아버지께 물은 반면에 증원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맹자는 이것을 가지고 증자의 ‘부모를 모시는 뜻’은 따라 하기 어렵다고 했다. 부모를 모시는 데 있어서 물질적으로 잘 해드리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증자가 했던 것과 같이 매번 부모님의 뜻을 묻고, 매번 새로 지은 밥을 해 드리는 그 마음일 것이다.



2. 증자가 전전긍긍하는 까닭


증자가 병이 깊어지자, 제자들을 불러 말했다. “이불을 걷어서 내 발을 보아라! 내 손을 보아라! 『시경』에 이르기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깊은 연못가에 서 있는 듯, 살얼음을 밟고 가는 듯‘이라고 했다. 이제야 몸을 손상시킬까 염려하는 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을 알겠구나. 얘들아!”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 『논어』. 『태백


『논어』에 등장하는 증자의 모습에서 효(孝)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이 문장은 “전전긍긍(戰戰兢兢)”이라는 사자성어로도 유명하다. 전전긍긍은 어떤 일에 두려워하며 걱정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로 일상에서 자주 쓰인다. 그런데 위의 문장을 보면 우리가 흔히 쓰는 ‘전전긍긍’의 의미와 『논어』에서 보이는 ‘전전긍긍’이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증자의 전전긍긍은 단순히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적극적으로 삼가고 조심함으로써 두려운 마음까지 갖게 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증자가 살았던 시대는 지금보다 전쟁이 많았고, 죄를 지으면 신체를 훼손하는 형벌이 많았다. 특히 발이 잘리는 형벌이 많아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 특수 제작된 신발이 잘 팔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따라서 증자가 제자들에게 자기의 손과 발을 보여 준 것은 자기가 부모에게 받은 수족(手足)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서 얼마나 행동을 조심하고, 말을 가려하는데 힘을 썼는가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증자가 이제 죽을 때가 되어서 이러한 걱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에 이르면 읽는 사람까지 ‘증자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부모에게 받은 손발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도 효였던 시절!



지금 우리도 효도(孝道)의 가장 기본이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은 것이라고 많이들 생각한다. 그래서 자식이 큰 병에 걸리면 연로하신 부모님에게는 알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증자가 자기의 수족을 잃을까 전전긍긍했다는 것은 그가 항상 효(孝)를 행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이후 유가(儒家)에서는 부모에게 받은 신체를 손상하는 것을 큰 불효로 여겼다. 물론 그러다보니 신체적인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이 본인의 잘못으로 된 것이 아닌데도 늘 불효자가 되어 살아가야하는 부작용이 생기기는 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증자가 부모에게 받은 수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늘 전전긍긍하는 태도로 세상을 살았던 것처럼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수족을 꼭 보전해야 하는 가의 문제가 아니라 마치 깊은 연못가에 서 있듯이, 얇은 얼음을 밟고 가는 것처럼 늘 조심조심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3. 효(孝)에서 시작하는 세상


공자가 열었던 ‘공자스쿨’의 제자들은 대부분 육예(六藝)를 배워서 관직에 나가는 것이 목표였다. 공자 역시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은 정치를 통해서 세상을 바로 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말년의 그는 과거의 문헌을 정리하면서 후대에 자기 이상이 실현되기를 기대했다. 공자의 전기 제자들이 대부분 관직에 나갔던 것에 비해 공자의 후기 제자들은 대부분 말년의 공자처럼 제자들을 거느리고 스승의 가르침을 전수하는데 힘을 썼다. 특히 증자의 경우 그가 『논어』에서 주로 언급하고 있듯이 주로 성찰을 통한 자기 수양에 힘을 썼다.


우리는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꾼다. 그런데 그런 세상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 역시 그랬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고민이 그런 것이었다. 그 중 유가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것들을 사회로 확장시키면 모두 함께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가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효(孝)이다. 단순히 나의 부모를 모시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넓히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주변을 먼저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보니 유가에서는 자기를 성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증자가 말했다. “나는 날마다 나 자신을 세 가지로 되돌아본다. 사람들과 일하면서 충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벗과 사귀면서 미덥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배운 것을 익히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논어』. 「학이」




증자는 세 가지의 일을 통해서 매일 자기를 돌아본다고 했다.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 때 마음을 다해서 충실히 했을까? 친구들과는 믿음이 있을까? 배운 것이 있는데 제대로 익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말로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실 자기를 돌아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일에 닥쳤을 때 우리는 자기를 돌아보기보다, 먼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급급하다. 또 매번 마주치는 사람과, 앞에 닥친 일을 함에 있어서 마음을 다해서 해낸다는 것도 쉽지 않다. 자주 보는 사람에게는 소홀해지기도 쉽고, 어떤 일을 할 때도 늘 모든 일에 있어서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으로 임하기도 어렵다. 특히 매일 매일 하는 것은 어렵다. 오죽하면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을까? 아무리 마음을 다져 먹은 일도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그 다음날로 미루어버리기 일쑤이다.


세상이 나 하나 바뀐다고 무슨 변화가 있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이 달라진다고 해도 변화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내가 바뀌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과의 관계가 달라진다. 결국 세상이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가에서 말하는 효(孝)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단지 부모를 잘 봉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래서 자기와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에게 충실히 하는 것, 그런 생각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 그런 삶 속에서도 자기의 일상을 매일 점검하는 것,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태도가 증자가 말한 전전긍긍(戰戰兢兢)이다.


글_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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