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물처럼 담박하게, 수택절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던 다른 누군가에게는 천국 같던 설 연휴가 갔다. 아마 많은 사람이 연휴병(?)에서 미처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헤롱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운 내시라 주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설날에 웃기고도 슬픈 만평 하나를 봤다. 글로 재연해보자면 떡국을 먹으려는 청년을 가운데 두고 가족 친지들이 둘러앉아 한 마디씩 묻는다. // 삼촌 : 너 여자 친구는 있냐? // 고모 : 우리 딸은 대기업 취직 성공적 // 사촌 형 : 너 취업준비는 하고 있쥬? // 엄마 : 아빠 명퇴라 전해라 // 사촌 누나 : 그래 아프니까 청춘인 거야 // 할머니 : 너무 상심하지 마라. 정말 간절하게 노오오력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단다. // 떡국마저 거들고 나선다. 떡국 : 이제 몇 살?(떡국 너마저!)
이 살벌한(?) 만평의 제목은 <설날 취조실 : 이러지 않으실 거죠?^^>다. 하지만 만평의 바람과 달리 많은 이들이 취조를 했고, 당했을 것이다. 나도 취조를 당해야 할 죄인(?)이지만 다행히 외국에 있는 덕분에 고통을 면하게 되었다. 사실 취조를 당하는 사람만큼 취조를 하는 사람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시작되는 중요한 시점에서 ‘저 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올해를 어떻게 보낼지 계획은 있을까?’ 그런 답답한 마음에 상대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물어보는 것이리라.(그렇겠지?) 물론 돌아오는 답은 뻔하다. 불분명하고 두루뭉술한 답. 이 시대 청춘들 중에서 취조에 당당히 응하고 그곳을 벗어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결국 취조실에서는 취조를 하는 자도, 당하는 자도 상처만 입을 뿐이다.
이렇게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청춘들을 위한 수많은 지침서(자기계발서)가 있다. 얼마나 친절하고 세심한지 나이별로 해야 할 일들이 빼곡하다. 십대에는 무엇을 하고, 이십대에는 무엇을 하고, 삼십대에는 무엇을 하고... 지침서를 읽는 그 순간에는 내 삶도 지침서가 그려내는 대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벌써 몇 번이나 당했는가! 이제는 안다. 지침서의 말과 실제 삶은 괴리가 크다는 걸. 지침서의 ‘특별한 방법’으로는 내 삶의 지도를 찾을 수 없다는 걸. 이때가 고전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고전에는 잠깐 반짝하고 마는 지침서와는 다른 ‘말씀’이 들어있지 않을까?
수택절 괘사 : 마디가 있는 것은 형통하다
지금 여러분은 <주역서당>을 읽고 있다. 그러니 ‘말씀’도 당연히 고전 중의 고전인 주역에서 찾을 것이다. 주역의 64괘 중에서 60번째 괘인 수택절(水澤節)이 적당한 것 같다. 먼저 수택절의 중심 문장인 괘사를 보도록 하자.
節은 亨하니 苦節은 不可貞이니라.
절은 형하니 고절은 불가정이니라.
절은 형통하니, 쓴 절은 가히 바르지 못하느니라.
절(節)은 마디를 말한다. 마디란 대나무의 마디처럼 묵은 것이 끝나고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 세상에 있는 것치고 마디가 없는 건 없다. 동물은 관절이 있고, 식물은 마디가 있다. 4계절, 24절기, 72절후 같은 천지자연의 변화도 하나의 마디라고 할 수 있다. 마디가 있는 덕에 천지 만물은 제각기 주어진 운동을 할 수 있다. 만일 마디가 없다면 천지 만물은 형체를 유지할 수 없어 흐물흐물해졌거나 끝없이 팽창하다가 터져버렸을 것이다. 천지 만물이 분수에 맞게 절도를 지키는 건 전적으로 마디의 덕분이다. 고로 주역에서는 수택절을 형통하다고 한다. 형통하지 못한 경우는 앞서도 말했듯 분수를 지키지 못하는 것인데 뒤에 살펴볼 상육이 그렇다.
象曰 澤上有水 節이니
상왈 택상유수 절이니
상전에 이르길 못 위에 물이 있는 것이 절이니
君子가 以하야 制數度하며 議德行하나니라.
군자가 이하야 제수도하며 의덕행하나니라.
군자가 이로써 도수(법도, 역수)를 지으며 덕행을 의논하느니라.
지을 제(制), 법도 도(度)
상전은 수택절의 모양을 보고 풀이한 것이다. 수택절은 연못(☱) 위에 물(☵)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알맞게 찬 모양이다. 성인은 그 모습을 보고 인간도 매 순간 출렁 되는 인욕을 다스릴 법도를 세우고 덕행을 의논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연못을 보고 인간을 다스릴 법도(마디)를 생각한 것이다.
수택절 효사
初九는 不出戶庭이면 无咎리라.
초구는 불출호정이면 무구리라.
초구는 호정을 나서지 않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초구는 가장 아래에 있는 효이다. 방으로 치자면 집안에서 가장 깊숙한 방. 초구는 이 방에서 나설 때가 아니다. 방 안에서 조용히 있어야 허물이 없다고 한다.
象曰 不出戶庭이나 知通塞也니라.
상왈 불출호정이나 지통색야니라.
상전에 이르길 불출호정이나 통하고 막힌 것을 아느니라.
살다 보면 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아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쓸데없이 나섰다간 일을 그르치게 되고, 때가 됐는데도 쭈그리고 앉아 있다간 낭패를 당한다. 초구는 양이 양자리에 있어 현명하므로 통하고 막힌 것을 잘 구분하여 절도에 맞게 행동하므로 허물이 없다.
九二는 不出門庭이라. 凶하니라.
구이는 불출문정이라 흉하니라.
구이는 門庭을 나서지 아니함이라. 흉하니라.
초구와 달리 구이는 나가야 하는 때이다. 때가 왔으니 나서기만 하면 영화를 누리게 된다. 이때 초구처럼 쭈그리고 있다간 하늘이 주신 기회가 오히려 재앙이 된다. 한데 많은 사람이 그렇듯 구이는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는 걸 모른다. 그래서 흉하다고 하는 것이다.
象曰 不出門庭凶은 失時니 極也일새라.
상왈 불출문정흉은 실시니 극야일새라.
상전에 이르길 불출문정흉은 때를 잃음이 극하기 때문이라.
구이가 흉하게 된 것은 나아가야 할 때를 놓쳤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앞서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를 잘 알아야 한다.
六三은 不節若이면 則嗟若하리니 无咎니라.
육삼은 부절약이면 즉차약하리니 무구니라.
육삼은 절제하지 않을 것 같으면 곧 슬퍼하리니, 허물할 데가 없느니라.
탄식할 차(嗟)
육삼은 음이 양자리에 바르지 못하게 있는 데다 짝인 상육과도 음양이 맞지 않는다. 게다가 내괘인 택(☱)의 끝자리에 있다. 절도를 지키지 못하니 슬퍼할 일이 생기고,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니 다른 누구를 허물할 수도 없게 된다.
六四 安節이니 亨하니라.
육사 안절이니 형하니라.
육사는 편안한 절이니 형통하니라.
육사는 음이 자신에 자리에 바르게 있다. 이웃인 구오와 짝인 초구와도 음양의 조화가 맞다. 자리가 바르니 편안하고 형통할 수밖에 없다.
象曰 安節之亨은 承上道也라.
상왈 안절지형은 승상도야라.
상전에 이르길 안정지형은 위의 도를 이음이라.
주역에서는 다섯 번째 자리를 왕의 자리라고 하고 네 번째 자리를 신하의 자리라고 한다. 신하인 육사가 임금인 구오를 도와 도를 펼치므로 형통하다.
왕의 자리와 신하의 자리가 바르니 편안하고 형통하다.
九五는 甘節이라. 吉하니 往하면 有尙하리라.
구오는 감절이라. 길하니 왕하면 유상하리라.
구오는 즐겁게 절제함이라 길하니 가면 숭상함이 있으리라.
구오는 왕의 자리다. 구오를 감절, 달고 맛있는 절도라고 하는데 이건 설명이 좀 필요하다. 오행 목·화·토·금·수를 방위로 배정하면 목은 동쪽, 화는 남쪽, 금은 서쪽, 수는 북쪽이다. 토는 중앙에서 목, 화, 금, 수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하여 토를 왕의 자리라고 보는데, 토에 해당하는 맛이 단맛이다.(목-신맛, 화-쓴맛, 금-매운맛, 수-짠맛) 중앙 토의 성격답게 구오는 백성을 달고 기름지게 보살피니 자연히 민심이 구오를 따른다.
象曰 甘節之吉은 居位中也일새라.
상왈 감절지길은 거위중야일새라.
상전에 이르길 감절지길은 거한 위가 가운데 하기 때문이라.
앞서 설명했듯이 구오가 달달한 정치를 할 수 있는 건 가운데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上六은 苦節이니 貞이면 凶코 悔면 亡하리라.
상육은 고절이니 정이면 흉코 회면 망하리라.
상육은 쓴 절이니 고집하면 흉하고 뉘우치면 (흉함이) 없어지리라.
상육은 고절이라고 한다. 고절은 쓴맛이 나는 절도란 말이다. 상육은 수택절의 끝자리다. 자리가 변하고 시간이 흐르니 구오의 달달한 절도도 쓰게 변질한다. 그런데도 상육이 계속 고집을 부리면 흉해지는 수밖에. 다행인 건 상육이 자신의 과실을 뉘우치면 쓰디쓴 고절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 고진감래! 주역은 부정이 없는 긍정의 텍스트다.
"쓴맛이 사는 맛이다.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채현국)
눈치를 챘겠지만 수택절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효는 구오다. 구오가 중심을 잡고 절도를 지키는 덕분에 수택절이 형통한 것이다. 한데 구오가 어떻게 중심을 잡고 절도를 지키는지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단맛이 도는 절도, 감절이다. 여기서 말하는 단맛은 패스트푸드 같은 자극적인 음식의 단맛과는 다르다. 밥과 물을 먹을 때 느껴지는 담담하고 담백한 맛이 구오가 풍기는 단맛이다. 아무리 패스트푸드가 맛있어도 매일 삼시 세끼를 먹을 수는 없다. 반면 밥과 물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언제 어느 때나 절도에 맞는 음식, 그래서 밥과 물을 주식(主食)이라고 하는가 보다.
우리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도 밥과 물처럼 담백한 단맛 같은 게 아닐까. 자극적이고 근사해 보이는 방법(지침)이 아니라 담백하고 담담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천변만화하는 주역처럼 각자에게 맞는 방법이 다르므로 꼭 집어서 뭐라고 말해줄 수는 없다.(나도 나의 방법을 찾고 있다) 다만 조건은 밥과 물처럼 매일 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병신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 삶을 살찌울 ‘단맛’을 찾기를.(감이당에서 밥과 물처럼 공부한다는데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글_곰진(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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