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끝이라고? 다시 시작이다! - 수화기제


끝이라고? 다시 시작이다!

- 수화기제



2013년 7월 19일, <주역서당>의 첫 번째 글이 북드라망 블로그에 올라온 날이다. 이후 격주로 주역 64괘를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풀어나가길 2년 5개월. 이제 대망의 64괘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오늘 63번째 괘인 수화기제(水火旣濟)를 보고 나면 남은 건 단 하나 화수미제 뿐이다. 모든 것은 끝이 있다더니 정말이구나! 아직 화수미제가 남았는데 벌써부터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실은 수화기제야 말로 주역을 마무리 짓는 진정한 결승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그럼 화수미제는? 다음 차례를 위해 과도한 스포일러는 금물. 수화기제가 결승 포인트라면 화수미제는 리턴 포인트라고만 설명해두겠다. 화수미제까지 완독한다면 이 알쏭달쏭한 말을 이해하시리라.



괘사 : 끝나면 형통할까? 


수화기제의 기제는 ‘이미 기(旣)’, ‘건널 제(濟)’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미 건넜다,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말이다. 휴.. 목적지에 도착했다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제 날 기다리는 건 길 위에서의 노고를 보상해줄 휴식과 달콤한 성공의 열매라는 생각에 흐뭇하다. 한데 주역은 여느 때처럼 우리의 통념을 가차 없이 배반(?)한다. 괘사를 보자.



산 넘고~ 물 건너~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旣濟는 亨이 小니 利貞하니 初吉코 終亂하니라.

기제   형    소    이정      초길   종란

기제는 형통할 것이 적으니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 처음은 길하고 마침은 어지러우니라.


아니, 모든 것을 이룬 기제인데 형통한 게 적다고? 게다가 처음은 길하지만 마침내는 흉하리라는 흉흉한 소리까지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기제가 모든 것을 이룬 괘이기 때문이다. 말장난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달도 차면 기울고, 꽃도 피면 지는 일만 남았다고, 기제도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 이제 차차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더는 올라갈 데가 없으면 내려올 일만 남았다”는 시쳇말의 원조는 고전 주역 속에 있었다. 이어서 수화기제를 여섯 가지 버전으로 설명해주는 효사를 보자. 



효사 : 끝인가 하면 시작이다


初九는 曳其輪하며 濡其尾면 无咎리라

초구    예기륜     유기미   무구

그 수레를 끈다. 그 꼬리를 적시니 허물이 없다.


초구는 화수기제에서 ‘완성’을 맛본 최초의 효다. 모든 것이 이루어진 때이니만큼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다 잘 될 거야라는 근거 없는 낙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초구는 모든 일을 이룬 상태에도 불구하고 더 앞으로 나아가려는 욕심을 부린다. 욕심은 화를 부르지 않는가, 당연히 막아야 한다. 주역에서는 그걸 ‘수레를 끈다’, ‘꼬리를 적신다’는 재밌는 말로 표현한다. 초구가 수레라면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초구를 뒤에서 잡아끌어서 막고, 초구가 여우라면 겁 없이 빳빳이 세운 꼬리를 물에 적셔 치성한 기를 꺾는 것이다. 그리하면 허물이 없다. 

 

六二는 婦喪其茀이니 勿逐하면 七日에 得하리라.

육이    부상기불     물축       칠일    득

육이는 지어미가 그 포장을 잃음이니, 쫓지 않으면 7일 만에 얻으리라.


육이는 음괘(陰卦)로 동양에서 음은 여자를 상징한다. 먼 옛날 여자들은 외출할 때 사극에서 나오는 장옷과 같은 가리개를 썼다. 그런데 육이는 이 가리개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하여 자신이 짝인 구오에게 갈 수 없는 상황. 주역의 예시는 무수히 전변한다. 남녀관계를 군신관계로 달리 해석해보자. 초야의 선비가 군주에게 나아가 벼슬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신하가 군신에게 가려면? 가리개를 되찾는 수밖에 없다. 한데 수화기제는 이미 모든 것을 이룬 괘이기 때문에 전전긍긍 애태우며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났는데 남녀상열지사는 무엇 하며, 벼슬은 무엇 하겠는가. 그렇게 태평하게 기다리면 잃어버린 가리개가 저절로 돌아온다. 그때 다시 ‘님’을 찾아가면 된다. 고로, 육이에게도 때가 임박할 때까지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태평하게 기다리면 잃어버린 가리개가 저절로 돌아온다.



九三 은 高宗이 伐鬼方하야 三年克之니 小人勿用이니라

구삼    고종    벌귀방     삼년극지    소인물용

고종이 귀방을 정벌한다. 삼년 만에 이기므로 소인을 쓰지 말라.


구삼은 완성의 시대가 막바지인 단계다. 곧 완성의 황혼이 끝나고 어둡고 혼란한 밤이 시작된다. 구삼의 주인공은 은나라의 폭군 주의 선대왕인 은 고종. 완성의 황혼을 다스리는 구삼과 은나라의 황혼을 다스린 은 고종의 오버랩이 적절하다. 혼란의 시작을 알리는 건 귀방(중국의 서쪽 변경 지방에 살고 있던 이민족)의 오랑캐. 한데 이 오랑캐가 얼마나 막강한지 3년이 흘러서야 겨우 정벌한다. 이제 오랑캐와 소인들이 득세하는 시대가 도래 했다. 그러니 소인들을 삼가고 삼가는 수밖에 없다.


六四는 繻에 有衣袽코 終日戒니라.

육사   유    유의여    종일계

육사는 새는데, 걸레를 갖고 종일토록 경계함이니라.


수화기제는 두 개의 소성괘로 이루어져 있다. 이허중 불괘(☲)와 감중련 물괘(☵). 감중련 물괘가 시작되는 육사는 완성의 시대가 찰나같이 지나고 혼란의 시대가 시작되는 첫 단계다. 주역에선 이 상황을 물 위에 떠 있는 구멍 난 배로 비유한다. 구멍으로 바닷물이 새어 들어온다. 어떻게 해야 하나? 살려면 한시도 빠짐없이 죽기 살기로 물을 배 밖으로 내보내는 수밖에 없다. 한데 쓸 만한 물건이라곤 걸레조각 뿐이다. 어쩌겠는가, 이 걸레조각에 목숨이 달린 것을. 죽지 않으려면 쉬지 말고 살펴서 움직여야 한다.



물 위에 떠 있는 구멍 난 배에서 살아남으려면 죽기 살기로 물을 배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九五는 東隣殺牛–不如西隣之禴祭–實受其福이리라.

구오    동인살우-불여서인지약제-실수기복

구오는 동쪽 이웃에서 소를 잡음이 서쪽 이웃에서 간략한 제사로 실제로 복을 받음만 못하니라.


구오는 양이 양자리에 바르게(正) 있고(위의 표 참고), 외괘에서 가운데 자리(中)에 자리 잡고 있다. 주역 용어로 중정(中正)한 구오! 다른 괘였다면 분명 좋게 여겼겠지만, 기제에서는 다르다. 혼란의 중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으니 오히려 흉하다. 때가 이러한데 정성들여 제사를 지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역에서는 구오를 설명하기 위해 은나라 주왕과 (주나라 건국의 초석을 다진) 문왕의 이야기를 끌어온다. 동쪽의 이웃 주왕은 큰 소를 잡고 온갖 진귀한 음식을 마련해 제사를 지내도 하늘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미 천명이 주왕을 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서쪽의 이웃이자 천명을 담지한 문왕은 소박한 제사만으로도 하늘을 감동하게 한다.    


上六 은 濡其首라 厲하니라.

상육    유기수    

그 머리를 적시니 위태하리라.


슬프지만, 여느 괘와 마찬가지로 수화기제의 상육도 흉하다. 이미 혼란의 물결에 머리까지 잠겨버린 상태라 위태하고 위태하다.





보다시피, 완성의 기쁨을 누리는 시기는 짧고도 짧다. 완성의 찰나가 지나면 혼란이 시작된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진실. 이 진실을 말한 게 어디 주역뿐인가. 고대 맹자의 일치일란(一治一亂)부터 비교적 최근의 엔트로피 법칙까지 말하는 바는 수화기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성공, 완성, 끝의 실체를 알고 나니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그럼 우리는 도대체 왜 성공, 완성, 끝이라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걸까? 결과에 도달하기도 험난하고 막상 도달해도 이렇듯 허무한데 말이다.


정화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결과’는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도, 알 수도 없는 ‘미지의 단계’라고 한다. 고로 내가 최선을 다해서 행해도 좋은 결과가 안 나올 수가 있고, 설렁설렁 게으름을 부리면서 마지못해 해도 뜻밖의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게다가 설령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해도 반드시 나에게 좋게 작용하는 게 아니고, 나쁜 결과가 반드시 나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란다. 내 식대로 해석하자면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아닐까. 이렇듯 불확실한 결과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일(사건)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라고.


우리는 종종 결과를 고정 불변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아니 바란다. 하지만 사실 ‘결과’라는 것도 우리가 겪는 사건의 일부분일 뿐이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고 결과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불러온다. 그게 지금껏 우리가 공부한 주역의 법칙 아닌가. 고로 결과에 안주하려는 습속을 버리고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자. 수화기제에서 완성의 시기가 그토록 짧은 이유도 어쩌면 잠깐 땀 닦고, 한숨 돌리고 어서 길을 나서라는 의미가 아닐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니까.(끝)



글_곰진(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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