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새해 벽두에 읽는 운명의 조짐 - 중택태


중택태 

- 새해 벽두에 읽는 운명의 조짐



병신년 새해가 밝았다. (아직 절기력으로는 을미년이지만) 무엇이든 ‘새것’은 설렘과 함께 두려움을 동반한다. 새해에는 또 어떤 화복(禍福)이 나를 웃고 울게 만들지 벌써 기대 반, 설렘 반이다. 어디 나만 그렇겠는가. 미래에 대한 호기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법. 이맘때가 되면 한해의 운세를 점쳐보려는 사람들로 그쪽 업계가 활황이라고 한다.


한데 꼭 전문가(?)의 입을 빌려서 내 운명을 짐작할 필요가 있을까? 전문가들도 결국은 천지변화의 조짐을 읽고 그것을 우리에게 해석해줄 뿐이다. 천지변화의 조짐을 읽는다는 게 특별해 보이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주역>은 세상만사의 이치를 담고 있지만 그걸 설명하는 언어는 작고 소박하다. 누런 치마, 우물, 솥처럼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로 거대한 우주의 운행을 설명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운명의 조짐도 작고 사소한 것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고로 내게 주어진 것들만 주의 깊게 봐도 내 운명을 충분히 예측하고 꾸려나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중택태’가 병신년의 첫 번째 괘로 선택된 것도 하나의 조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현재’라는 시공간이 중택태를 끌어당긴 것이니까. 자 그럼 이제 사설은 접어두고 본격적으로 중택태라는 운명의 조짐을 풀어보자.


병신년의 첫 번째 괘로 선택된 중택태



기쁨의 괘, 중택태


주역 64괘는 모두 나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중택태의 의미는 ‘기쁨’이다. 이름하여 ‘기쁨의 괘 중택태’ 이름답게 점을 쳐서 중택태가 나오면 길하다고 한다. 고로 올 한해 우리들의 운세도 길하고 형통하다. 와! 출발이 좋다! 중택태의 중심문장인 괘사를 보자.  

 

兌는 亨하니 利貞하니라.

(태는 형하니 이정하니라)

태는 형통하니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라.


물론 형통하다고 해서 끝은 아니다. 복을 누리려면 먼저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심신이 빚어내는 내 삶이 엉망이라면 굴러오는 복도 차버리게 된다. 중택태의 여섯 효를 통해서 좀 더 자세히 보자. 



기뻐하되 탐닉하지 말라 


初九는 和兌니 吉하니라.

(초구는 화태니 길하니라)

초구는 화해서 기뻐함이니 길하니라


초구는 양효이고 중택태에서 첫머리에 있는 효로 길하다. 


九二는 孚兌니 吉코 悔亡하니라. 

(구이는 부태니 길코 회망하니라.)

구이는 미더워해서 기뻐함이니 길하고 뉘우침이 없느니라. 


구이는 여섯 효 중에서 두 번째 효이다. <주역>에서는 두 번째 효와 다섯 번째 효를 중(中)의 자리라고 부른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중의 자리라 보통의 괘에서는 길하다고 한다. 하지만 중택태에서는 좀 다르다. 강건한 양효(+) 구이 위에 치명적인 매력의 음효(-) 육삼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구이가 육삼에게 홀려서 지나친 기쁨을 탐닉한다면 흉하다. 하지만 구이가 자신을 잘 지켜서 행동을 미덥게 한다면 후회가 없고 길하다.  


六三은 來兌니 凶하니라.

(육삼은 래태니 흉하니라.)

육삼은 와서 기뻐함이니 흉하니라.


육삼은 양효라면 가리지 않고 기쁨을 탐하기에 흉하다.



기쁨을 탐닉하지 말며 자신을 잘 지켜서 행동을 미덥게 하라.



九四는 商兌未寧이니 介疾이면 有喜리라.

(구사는 상태미녕이니 개질이면 유희리라.)

구사는 기쁨을 헤아려서 편안치 아니하니, 분별해서 미워하면 (병을 분별하면) 기쁨이 있으리라. 


구사는 육삼과 주군(主君) 구오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다. 둘 다 갖고 싶은 욕심에 속으로 재고 따지고 계산을 하느라 마음이 불편하다. 물론 올바른 계산법은 육삼을 버리고 구오를 선택하는 것이다.


九五는 孚于剝이면 有厲리라.

(구오는 부우박이면 유려리라.)

구오는 깎는 데 믿으면 위태함이 있으리라. 


구오도 중의 자리지만 위태롭기는 구이와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구이보다 훨씬 위태롭다. 이유는 노련한 음효 상육이 바로 위에 있기 때문이다. 상육은 육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하다. 양(+)의 킬러이자, 팜므파탈. 고로 구오는 자칫하면 상육에게 휘둘려서 자신의 존재를 갉아먹는 위태한 지경에 빠질 수도 있다.


上六은 引兌라.

상육은 이끌어서 기뻐함이라.


팜므파탈 상육은 제 자리에 앉아서도 양(+)들을 파멸시킨다. 상육이야 말로 지나친 기쁨을 탐닉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양(陽)의 킬러이자, 팜므파탈인 상육!



중택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단전(彖傳)으로 전체적인 정리를 해보자.  

 

彖曰 兌는 說也니 剛中而柔外하야 說以利貞이라.

(단왈 태는 열야니 강중이유외하야 열이이정이라)

단전에 이르길 태는 기뻐하는 것이니, 강이 가운데 하고 유가 바깥에서, 기뻐하는 마음으로써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라.


是以順乎天而應乎人하야 說以先民하면 民忘其勞하고 

(시이순호천이응호인하야 열이선민하면 민망기로하고)

이로써 하늘에 순하고 사람에게 응해서, 기뻐함으로써 백성에게 먼저 하면 백성이 그 수고로움을 잊고


說以犯難하면 民忘其死하나니 說之大 民勸矣哉라.

(열이범난하면 민망기사하나니 열지대 민권의재라)

기뻐함으로써 어려운 데 범하면 백성이 그 죽음마저 잊나니, 기뻐함의 큰 것이 백성이 권하느니라(권장할 만한 일이 되느니라)


주지하듯 중택태는 기쁨의 괘다. 중택태는 강(剛)한 것이 중(中)을 얻고 유(柔)한 것이 바깥(外)에 자리한다. 여기서 강한 것이 중을 얻었다는 것은 구이와 구오를, 유한 것이 바깥에 있다는 것은 육삼과 상육을 말한다. 이어서 강중한 양효들이 지켜야 할 사항이 나온다. 지나친 기쁨을 탐닉하지 말라고.


그럼 기쁨을 어떻게 활용해야 자신에게 이로운 것일까? 단전에 나오는 방법은 이러하다. 자신보다 백성들을 먼저 기쁘게 하면 백성이 그 수고로움을 잊고(열이선민 민망기노), 자신이 어려운 일을 앞서 하면 백성이 그 죽음마저 잊는다(열이범난 민망기사). 하여 백성을 기쁘게 하는 것이 도리어 나를 이롭게 하는 일이다(열지대 민권의재).


<주역>은 과거 천하를 다스리는 군자나 성인의 지침서로도 쓰였기에 위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렇다고 우리 시대와 무관한 얘기는 아니다. 얼마든지 우리 시대에 맞게 변용할 수 있다. ‘백성’이라는 낯선 단어를 ‘타인’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그럼 ‘나의 기쁨을 탐닉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라', '다른 사람과 기쁨을 나누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적용해보라.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수많은 기쁨의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내 일상을 돌아보게 되고 운명의 조짐도 살펴볼 수 있다.



다른 사람과 기쁨을 나누는 해가 되시길~*



글_곰진(감이당)


설정

트랙백

댓글

  • 애독자 2016.01.14 08:42 답글 | 수정/삭제 | ADDR

    새해를 기쁨의 괘로 맞이하다니 기분이 좋아요. 그런데 “기뻐함이 흉하다”니, 심지어 “분별해서 미워하면 기쁨이 있으리라”라니... 이거이 무슨 소린가. 지나친 기쁨이란 천재나 미녀처럼 커다란 재앙이다. 과도한 것, 특별한 건 안 좋아. 그건 내 힘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이룬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일시적으로 주어진 특혜이므로. 그것에 의존하고 집착하게 되어 나를 무능하게 만들고 파멸시킨다. 로또 당첨 돼서 잘 풀린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지요. 그건 벼락 맞는 거랑 똑같은 것 같아요. 중택태 괘사를 재미나게 풀어주는 이 글에서,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바라지 않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작은 기쁨도 서로 나누는(작은 기쁨을 크게 기뻐하는) 지혜를 배웁니다.

    • 북드라망 2016.01.14 10:00 신고 수정/삭제

      저도 애독자님 덕분에 오늘도 하나 배웠습니다^^

  • 학인 2016.01.17 15:28 답글 | 수정/삭제 | ADDR

    저 윗분처럼 애독자이지만 애독자2로 이름내려니 민망하여 그저 학인, 평범한 사람으로 저를 드러냅니다. 풀어주신 주역서당의 글들을 꼼꼼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고마운 말씀, 너무나 진하여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새해, 새해일지라도 언제든 새해 아니었던 때 있었던지요. 때를 살피고 있을 곳을 가려서 가고, 머물고, 앉고, 드디어는 일개 학인으로 어딘가 묻혀 사라지겠지요? 살아있는 것처럼 살다가 드디어는 골목길 돌아, 사라지는 것일테지요? 나누어 받은 기쁨을 이 글들과 함께 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합니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