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믿음은 비움에서 나온다 - 풍택중부


믿음 비움에서 나온다




이번에 살펴볼 괘는 풍택중부(風澤中孚)다. 풍택중부는 ‘믿음’을 말하는 괘로 수택절의 뒤에 위치한다. 수택절에서 때에 맞게 절도를 가지고 행동하니 풍택중부에서 믿을 수 있다. 풍택중부는 주역 64괘 가운데 61번째 괘로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이제 3개만 더 가면 하나의 스텝이 완성되는 중요한 시기다. 한데 도(道)가 높으면 마(魔)도 높다고 마무리를 방해하는 갖가지 장애가 발생한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게 믿음이 아닐까. 주역 64괘를 온전히 끝마치겠다는 믿음! 그래서 61번째 자리에 풍택중부가 있는지도 모른다.


풍택중부를 공부하면서 나는 언제 누군가를(혹은 무엇을) 믿는지 생각해보았다. 국가, 종교, 가족, 친구, 스마트폰 등등 정말 많은 믿음이 내 안에 있었다. 한데 그 믿음은 대부분 나의 목적을 이루거나, 이익을 얻거나, 편의를 누리기 위해서만 행해지고 있었다. ‘이걸 믿으면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겠지.’라는 식으로. 나의 믿음이란 보상이 있을 때만 작동하는 기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삶이 어디 내가 바라는 대로 되는가. 나의 믿음(기대)은 언제든 배신당할 수 있다. 그러니 무언가를 믿으면서 동시에 불신하는 양면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저게 내게 이런 보상을 주겠지.’, ‘만약 저게 내가 바라는 보상을 주지 못하면 어쩌지!’라고. 그러니 믿음이 커질수록 불신은 더 커진다. 누군가는 믿음 없는 세상이 잔혹하다고 했지만, 나의 방식대로 믿음을 행하는 것도 잔혹하긴 마찬가지다.



믿음 안에 담긴 보상과 기대에 의문을 제기하다.



풍택중부는 이런 ‘사이비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건 사사로운 이익에 끌려다니는 흉한 짓이고 결국엔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말이다. 헐! 주역이 내 뒤통수를 후려갈긴 기분이다. 흉하고 망한다니 정신이 번쩍 든다. 이 위급한 상황에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주역에서 말하는 ‘진짜 믿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진짜 믿음이란 무엇인가?


‘진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먼저 풍택중부의 중심문장이 괘사(卦辭)를 보도록 하자.  


中孚는 豚魚면 吉하니 利涉大川하고 利貞하니라.

중부는 돈어면 길하니 이섭대천하고 길정하니라.

중부는 돼지와 물고기까지 하면(믿게 만들면) 길하니, 큰 내를 건넘이 이롭고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라.


괘사에서는 진짜 믿음이란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돼지와 물고기 같은 미물까지 믿게 할 수 있어야 한단다. 그렇게 믿음이 지극할 때 거대한 강(대천)을 건너는 것처럼 크고 중한 일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믿음이 사람을 넘어 돼지와 물고기 같은 미물에게까지 미치다니 참 좋은 말이긴 한데 너무 추상적이다. '저게 가능해?' 과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주역은 명색이 고전인데 허튼소리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괘사에 대한 해설인 단전을 보면서 좀 더 기다려보자.


彖曰 中孚는 柔在內而得中할새니,

단왈 중부는 유재내이강득중할새니

단전에 이르길, 중부는 유가 안에 있고 강한 것이 중을 얻었기 때문이니


說而巽할새 孚 乃化邦也니라.

열이손할새 부 내화방야니라.

기뻐하고 겸손할새 믿음이 이에 나라를 화하게 하느니라.


豚魚吉은 信及豚魚也오 利涉大川은 乘木고 舟虛也오.

돈어길은 신급돈어야오 이섭대천은 승목고 주허야오.

돈어길은 믿음이 돼지나 물고기까지 미침이요, 이섭대천은 나무를 타고 배가 비어 있음이요.


中孚코 以利貞이면 乃應乎天也리라.

중부코 이이정이면 내응호천야리라. 

중부하고 이정으로써 이에 하늘이 응하리라.

중부하고 이정으로써 하면 이에 하늘이 응하리라.





첫 번째 문장은 풍택중부괘의 모양을 설명한다. 풍택중부는 유/음(柔/陰)이 안에 있고 강/양(彊/陽)이 중을 얻었다. 여기서 유가 안에 있다는 건 육삼과 육사를 말하고, 강이 중을 얻었다는 것은 구이와 구오를 말한다. 이건 효사에서 한 번 더 복습하자.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은 앞서 괘사의 아리송한 이야기를 보충해준다. 풍택중부의 내괘(內卦)는 연못을 형상화한 택괘인데 기뻐(說)한다는 의미가 있고, 외괘(外卦)는 바람을 형상화한 손괘로 공손(巽)하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 사람도 풍택중부의 형상대로 안으로는 기쁜 마음을 가지고 밖으로 공손하게 하면 믿음이 온 나라 사람은 물론 돼지나 물고기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이렇게 서로가 믿음으로 충만하니 어떤 큰일(이섭대천)도 해쳐나갈 수 있다.


한데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으니. 어떤 욕심이나 목적을 버리고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텅 빈 배가 유연하게 험한 강을 통과하듯 사람도 믿음을 가지고 험한 일을 헤쳐나갈 수 있다. 그렇게 텅 비어 있는 중심에서 솟아오르는 믿음은 바르고 이로우니 하늘도 이에 응한다.


이어서 풍택중부의 형상을 설명하는 상전을 마저 보자.


象曰 澤上有風이 中孚니 君子 以하야 議獄하면 緩死하나니라.

상왈 택상유풍이 중부니 군자 이하여 의옥하면 완사하나니라.

상전에 이르길 못 위에 바람이 있는 것이 중부니, 군자가 이로써 옥을 의논하며 죽임을 누그러뜨리느라.


앞서 보았듯 풍택중부는 연못 위로 바람이 부는 모양새다. 군자는 이 광경을 보고 자신의 정치를 반성한다. 정치하는 데 있어 가장 많은 말썽과 원한이 생기는 곳은 처벌의 현장이다. 잘못된 처벌과 살상은 군자에 대한 백성의 믿음을 상하게 하므로 군자는 이것을 살뜰히 챙겨야 한다. 죄 없는 사람은 함부로 가두지 말며, 죄인에게 벌을 줄 때도 오랜 시간 심사숙고한 끝에 판단을 내려야 한다.

  

자 이제 진짜 믿음이란 무엇인지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어떤 욕심이나 보상심리를 버리고 자신을 비울 때 진짜 믿음을 행할 수 있다. 한데 산 넘어 산이라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을 비울 수 있는가? 이 방법은 풍택중부의 여섯 효를 설명하는 효사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비워야 한다.




어떻게 자신을 비울 수 있는가? 


初九는 虞하면 吉하니 有他면 不燕하리라.

초구는 우하면 길하니 유타면 불연하리라. 

초구는 헤아리면 길하니, 다름이 있으면 편안하지 못하리라.


초구는 백성의 자리로 인군인 구오를 믿어야 한다. 한데 초구와 짝인 육사와 음양의 조화가 찰떡궁합이다. 하여 초구는 고민한다. 인군 구오를 믿어야 하나 사사로이 마음이 가는 육사를 믿어야 하나. 이때는 인군 구오를 믿어야 길하고, 사사로이 육사와 마음을 나누었다가는 편안하지 못하다.


象曰 初九虞吉은 支未變也일새라.

상왈 초구우길은 지미변야일새라.

상전에 이르길 초구우길은 뜻이 변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초구가 길하다는 것은 구오 인군을 믿는 마음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九二는 鳴鶴이 在陰이어늘 其子和之로다.

구이는 명학이 재음이어늘 기자화지로다.

구이는 우는 학이 그늘에 있거늘, 그 자식이 화답하도다.


我有好爵하야 吾與爾靡之하노라.

아유호작하야 오여이미지하노라.

나에게 좋은 벼슬이 있어서 내가 너와 더불어 얽히노라.


온갖 만물을 예시로 끌어오는 주역답게 구이에서는 어미학과 새끼학의 우는 소리로 믿음을 설명한다. 어미학이 우는데 새끼학이 화답하니 이런 앙상블은 어미와 새끼 사이에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사에 대입하면, 인군이 신하에게 벼슬을 내려주니 신하가 그것을 받들어 자리에 오른다. 그리곤 바른 정치를 행하여 인군에게 보답하니 이것이 서로 믿고 의지하며 더불어 화답하는 것이다.



어미새가 울면 새끼새가 화답하듯, 인군과 신하 사이에도 서로 믿고 의지하며 더불어 화답한다.



象曰 其子和之는 中心願也라.

상왈 기자화지는 중심원야라.

상전에 이르길 기자화지는 중심으로 원함이라. 


구이에서 믿음과 화답의 노래가 울러 퍼지는 건 구이의 자리가 내괘에서 중(中)을 얻었기 때문이다. 


六三은 得敵하야 或鼓或罷或泣或歌로다.

육삼은 득적하야 혹고혹파혹읍혹가로다.

육삼은 적을 얻어서 혹 두드리고 혹 파하고 혹 울고 혹 노래하도다.


육삼은 음괘가 양괘의 자리에 앉아 자리가 부당하고, 내괘의 끝에 있어서 중(中)도 얻지 못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자리가 불안하니 사람 또한 불안하고 믿음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공연히 남을 의심하고 공격하여 적을 만들고 북을 치고, 북을 던지고, 울고, 노래하는 엉뚱한 행동을 일삼는다.


象曰 或鼓或罷는 位不當也일새라. 

상왈 혹고혹파는 위붕당야일새라.

상전에 이르길 혹고혹파는 위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라.


육삼이 불안하고 믿음이 없는 이유는 자리가 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六四는 月幾望이니 馬匹이 亡하면 无咎리라.

육사는 월기망이니 마필이 망하면 무구리라.

육사는 달이 거의 보름이니 말의 짝이 없어지면 허물이 없으리라. 


육사는 신하의 자리다. 육사는 인군을 믿음으로 모셔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아직 덜 찬 달처럼 자기를 비우고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자신의 짝인 초구와의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지 말고 구오를 믿어야 허물이 없다. 말의 짝이란 다름 아닌 육사의 짝인 초구를 말하는 것이다.



신하가 인군을 모시기 위해선 아직 덜 찬 달처럼 자기를 비우고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象曰馬匹亡은 絶類하야 上也라.

상왈마필망은 절류하야 상야라.

상전에 이르길 마필망은 유를 끊어서 올라감이라.


말의 짝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삿된 짝인 초구를 끊어버리고 구오한테 올라가는 것이다.


九五는 有孚如며 无咎리라.

구오는 유부연여면 무구리라.

구오는 믿음을 두는 것이 당기는 것같이 하면 허물이 없으리라.


구오는 양이 양의 자리에 있고, 외괘에서 중을 얻었다. 바로 괘사에서 말한 사람은 물론 돼지나 물고기에게까지 믿음을 얻는 인군인 것이다.


象曰 有孚攣如는 位正當也일새라

상왈 유부연여는 위정당야일새라

상전에 이르길 유부연여는 위가 정당하기 때문이라.


구오가 모두에게 믿음을 전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바른 자리에 있어 삿된 것에 흔들리지 않으니 믿을 수밖에.


上九는 翰音이 登于天이니 貞하야 凶토다.

상구는 한음이 등우천이니 정하야 흉토다.

상구는 나는(날개 치는) 소리가 하늘에 오름이니 고집해서 흉하도다. 


상구는 믿음이 지나친 단계다. 상구가 위치한 바람괘(손괘)는 동물로 닭에 해당하는데 알다시피 닭은 멀리 날 수 없는 동물이다. 한데 상구가 엉뚱한 믿음을 지나치게 고집하는 탓에 정작 날아오르지는 못하면서 나는 소리만 하늘에 닿을 지경이다. 요란하고, 꼴사납고 그러니 흉하다.



믿음이 지나치면 정작 날아오르지는 못하면서 소리만 요란한 닭처럼 꼴사납고 흉하다.



象曰翰音登于天이니 何可長也리오.

상왈한음등우천이니 하가장야리오.

상전에 이르길 한음등우천이니 어찌 오래가리오.


소리만 요란하고 날아오르지 못하니 이 헛된 믿음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제 효사를 살펴보기 전에 던졌던 질문에 답해보자. 어떻게 자신을 비울 수 있는가? 말로 하면 그 대답은 실로 간단하다. 초구나 육사와 같이 사사로운 욕심에 흔들리지 않고 바름을 지키는 것. 한데 이게 실천하려면 만만치 않다. 뻔히 욕심인 줄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때가 있고, 이게 욕심인지 아닌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한 때도 있다. 이런 욕심은 대체 어찌 비워야 하나?


‘믿음의 화신’인 구오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구오는 정중한 자리에서 중심을 잡고 앉아 삿된 욕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킨다. 대개 우리가 욕심을 부릴 때는 몸과 마음이 힘들다. 나의 현재 상태와 욕심으로 그려놓은 이상적인 상태 사이에 간극이 심신을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는 자신의 심신을 잘 살펴서 마음이 중심을 잡는 게 중요하다. 사람에게 욕심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니 욕심이 만들어내는 징후를 잘 살피고 휩쓸리지 않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게 조금씩 욕심을 비워나갈 때 작은 미물까지도 공감할 ‘진짜 믿음’이 솟아오른다.



글_곰진(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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