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 중
- 화산려 -
한 노인이 양로원 1층의 자기 방 창문을 열고 화단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자신의 백 회 생일 파티를 피해 도망치는 중이다. 밤색 재킷과 바지 차림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길을 나선 것이다. 이 희귀한 노인의 이름은 알란 칼손. 지독한 역마살의 소유자다. 알란의 이력 한번 들어 보면 내 말이 이해되시리라.
스웨덴 플렌 시의 소읍 윅스훌트에서 출생. 24세가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헬레포르스네스 주물 공장에서 일함. 스페인 사회주의자 에스테반을 만나 스페인으로 떠남. 미국으로 건너가 핵폭탄 개발이 한창이던 로스앨러모스의 국립 연구소에서 웨이터로 일함. 쑹메이링의 국민당을 돕기 위해 중국으로 떠남. 이란 테헤란의 비밀경찰 감옥에 갇힘. 러시아 과학자 포포프를 따라 모스크바로 감. 블라디보스토크 수용소 탈출. 김일성과 김정일을 만남. 발리에서 지내다 파리 주재 인도네시아 대사관에서 통역으로 일함. 모스크바에서 스파이 활동. 77세에 고향으로 돌아옴.
50여 년을 떠돌다 고향에서 인생 말년을 보내던 알란은 백 세가 되는 날 또다시 길 위로 나섰다. 참 대단하지 않은가. 알란의 이력에 감탄만 하고 있자니 슬그머니 이런 생각이 일어난다. ‘인생은 나그넷길이고 여행 중’이라는 사실. 알란은 시공간의 잦은 이동으로 우리가 잊고 있던 진실을 일깨울 뿐이라고. 하지만 또 다른 생각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렇다면 너는 알란처럼 자신이 서 있는 시공간을 온전히 누리고 즐기되 시절이 바뀌면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느냐고? 알란의 이력이 저리도 파란만장한 것은 그의 머묾과 떠남이 가벼웠다는 얘길 터. 그 어떤 중력장에도 이끌리지 않고 고정되지 않는 신체성의 소유자라는 것. 하여 그의 삶은 유동하고 그의 신체 또한 유목한다. 한데 너는 어떠냐고? 나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만다. 그리곤 다시 그를 부러워하고야 만다.
창문을 넘어 양로원을 탈출하는 100세 노인!!!
사실 알란 칼손은 실존인물이 아니라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주인공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니까 그럴 수 있지 않느냐고? 주지하듯, 이야기는 언제나 삶에서 피어난다. 삶이 있으므로 이야기가 있다. 한데 이야기의 원조인 삶조차 진실을 뒤쫓기 일쑤이니, 삶이 소설인지 소설이 삶인지 헷갈리긴 매한가지다. 그러므로 소설을 단지 허구로만 볼 수 없다.
알란의 삶이 여행 중이었듯이 주역에서도 여행 중인 괘가 있다. 그것은 바로 ‘화산려(火山旅)’다. 화산려는 아래에 산이 있고 그 위에 불이 있는 괘다. 산의 형상은 아래 골짜기로부터 봉우리를 짓고 있으므로 육중하게 그쳐 있는 상태이고, 불은 이리저리 흩어지는 형상이다. 즉, 내괘인 집은 산으로 가만히 있고, 외괘인 사람은 밖으로 흩어져서 떠돌아다닌다. 천생 바람따라 구름따라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꼴이다. 하여 화산려는 나그네 괘다. 객지를 떠돌고 있는 나그네, 화산려는 여행 중이다. 그러니 화산려 괘를 통해 여행 중인 삶의 노하우를 배워보면 어떨까? 지금 출발해 보자.
화산려 괘사
旅 小亨 旅貞 吉(여 소형 여정 길)
여는 조금 형통하고 나그네가 바르게 해서 길하니라.
彖曰 旅小亨 柔 得中乎外而順乎剛 止而麗乎明(단왈 여소형 유 득중호외이순호강 지이리호명)
단전에 이르길 ‘여소형’은 유가 밖에서 중을 얻어 강에 순하고, 그치고 밝은 데 걸림이라.
是以小亨旅貞吉也 旅之時義 大矣哉(시이소형여정길야 여지시의 대의재)
이로써 ‘소형여정길야’니, 여의 때와 의가 크도다.
주역에서는 양은 크고 음은 작은, 양대음소(陽大陰小)의 이치를 따른다. 화산려는 내괘와 외괘의 중을 얻은 육이와 육오가 모두 음효(陰爻)다. 따라서 화산려는 조금 형통한 소형(小亨) 괘이다.
단전에서는 화산려가 소형한 까닭을 이 괘가 천지비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천지비괘의 육삼 음이 오효자리로 올라가고, 구오 양이 삼효자리로 내려왔다. 즉, 음이 올라가 육오가 되고 양이 내려와서 구삼이 된 것. 이러한 자리바꿈이 소형한 것은 비괘의 부드러운 육삼 음이 밖으로 나가 중을 얻었고 상하에 있는 강한 양들에게 순종하기 때문이다. 유순한 음은 강한 양에게 순종하여야 도리에 맞고 형통하다. 육오가 위에 있는 상구에게도 순하고 아래 있는 구사에게도 순하므로, 그것이 조금 형통하다는 것.
그렇다면 그치고 밝은 데 걸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화산려의 산괘는 그치는 것이다. 그 위에 있는 화(火)는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이다. 불은 밝고 그 운동성은 감추지 못하고 밖으로 표출된다. 이렇게 밖으로 밝게 드러나는 것을 ‘걸린다(麗)’고 한 것이다.
화산려 괘
象曰 山上有火 旅 君子 以(상왈 산상유화 여 군자 이)
상전에 이르길 산 위에 불이 있는 것이 여니, 군자가 이로써
明愼用刑 而不留獄(명신용형 이불류옥)
형벌 쓰는 것을 밝게 삼가며 옥에 계속 가둬둠이 없게끔 하느니라.
상전에는 화산려를 다른 식으로 풀이했다. 외괘의 불괘로 시비선악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곧 형벌을 삼가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 형벌 쓰는 것을 밝게 하고 삼가면, 잘못된 판결로 사람을 옥에 가두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 화산려는 나그네 괘다. 나그네는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다. 천지만물이 한시도 머무름 없이 변화하여 생성하듯이 삶도 그러하다. 하여 삶은 길 위에 있다. 머무름 없이 흘러가는 나그넷길, 그것이 인생이다.
화산려 효사
初六 旅 斯其所取災(초육 여쇄쇄 사기소취재)
초육은 나그네가 가늘고 가느니, 그 재앙을 취함이라.
象曰 旅 志窮 災也(상왈 여쇄쇄 지궁 재야)
상전에 이르길 ‘여쇄쇄’는 뜻이 궁해서 재앙이라.
초육은 맨 아랫자리에 있어서 어리다. 자리가 가운데 있지 않아 중(中)하지 않고, 양의 자리에 음이 왔으니 정(正)하지 않다. 이것은 이제 처음으로 나그네 신세가 된 초육이 자질구레한 보따리를 싸들고서 방향 없이 길을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떠나니 스스로 재앙을 초래하고 힘든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여쇄쇄’는 나그네가 된 그 뜻이 활달하지 못하고 궁할대로 궁해서 재앙만 된다는 뜻이다. 처음 길을 나선 자는 미숙하기 마련이다. 그런 그가 방향도 없이 길을 나섰으니 그 길이 참으로 고되지 않겠는가.
六二 旅卽次 懷其資 得童僕貞(육이 여즉차 회기자 득동복정)
육이는 나그네가 여관에 들어가서, 그 노자를 품고, 어린 종의 바름을 얻도다.
象曰 得童僕貞 終无尤也(상왈 득동복정 종무우야)
상전에 이르길 ‘득동복정’은 마침내 허물이 없으리라.
육이는 음이 음자리에 있고 내괘에 중을 얻어서 나그네 괘에서는 최고로 좋은 자리이다. 나그네 괘에서 최고로 좋다는 것은 뭘까? 여행 중인 나그네에게 편안한 잠자리가 제공된다면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육이는 내괘이니 집안이 되고, 음이 음 자리에 있으니 여관을 찾아들어 부드럽고 편한 잠자리를 취하고 품에 노자도 많이 품었다. 또 육이는 양으로, 강한 구삼을 충실하게 받든다. 이는 마치 심부름하는 어린 종이 충직하게 나그네를 받드는 것과 같다. 육이 나그네는 강한 구삼을 받듦으로써 정도(正道)를 지켰으니 여관도 잘 찾아갔고 노자를 많이 지닌 부자로 있으며 부리는 종이 충직해서 한평생을 사는 데 죄짓지 않고 살 수 있다. 그러니 허물이 없다.
나그네의 길에는 항상 부침이 있다.
九三 旅焚其次 喪其童僕貞 厲(구삼 여분기차 상기동복정 여)
구삼은 나그네가 그 여관을 불사르고, 그 동복의 바름을 잃으니 위태하니라.
象曰 旅焚其次 亦以傷矣 以旅與下 其義 喪也(상왈 여분기차 역이상의 이려여하 기의 상야)
상전에 이르길 ‘여분기차’ 하니 또한 상하고, 나그네로써 아래와 더불으니 그 의리가 상함이라.
구삼은 양이 강한 데다 세 번째 자리가 양이기 때문에 더욱더 강하다. 구삼이 육이와는 달리 중을 못 얻고, 강하기만 하므로 중도에 벗어나 거칠게 행동한다. 그러다 보니 외괘의 불을 붙여와 여관마저 불태우는 꼴이 됐다. 게다가 부리는 종들도 그 바름을 잃어서 모두 도망쳐버렸으니 위태롭다. 구삼은 자신의 강한 것만 믿고 아래에 있는 육이나 초육의 동복을 강하게만 대하였으니, 의리를 상해서 동복을 잃어버린 것이다.
九四 旅于處 得其資斧 我心 不快(구사 여우처 득기자부 아심 불쾌)
구사는 나그네가 처하게 되고 그 노자와 도끼를 얻으나, 내 마음은 불쾌하도다.
象曰 旅于處 未得位也 得其資斧 心未快也(상왈 여우처 미득위야 득기자부 심미쾌야)
상전에 이르길 ‘여우처’는 위를 얻지 못함이니, ‘득기자부’ 하나 마음이 유쾌하지 못함이라.
구사는 음의 자리에 양이 왔다. 이는 정도에 어긋난 실정(失正)이고, 그 위치가 중에 있지 않으니 부중(不中)하다. 허나 구사는 외괘의 가장 아래에 위치하여 태도가 겸손하므로 노자와 도끼를 얻는다. 나그네에게 노자가 풍부하다는 것은 부자로 사는 것이고, 도끼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권좌에 앉아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나그네가 노자와 권력까지 갖게 되었으니 희희낙락해야 할 터인데 웬일인지 마음이 좋지 않다. 왜냐하면 구사의 자리가 제자리가 아니므로 거처하는 곳이나 가지고 있는 금권력이 모두 구사 자신에게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그네에게도 권력이?
六五 射雉一矢亡 終以譽命(육오 석치일시망 종이예명)
육오는 꿩을 쏘아서 한 화살을 없애느니라(한 화살로 꿩들을 다 잡느니라). 마침내 명예와 복록으로써 함이라.
象曰 終以譽命 上逮也(상왈 종이예명 상체야)
상전에 이르길 마침내 명예와 명으로써 한다는 것은 위에 미치기 때문이라.
나그네 괘에서 오효자리는 인군으로 보지 못한다. 인군의 자리이긴 하지만, 앉아서 정치해야 할 군주가 떠돌아다닌다면 그 나라엔 정치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다만 외괘에서 중을 얻었기 때문에 ‘한 번 쏜 화살에 모든 꿩이 다 잡혔다’고 말하는 것이다. 꿩은 밝은 데서 나온다. 육오가 불괘에서 나오는 꿩을 쏘는데 화살 한 대로 거기 있는 꿩을 다 맞춰서 모두 잡아버렸으니, 그 능력이 출중하다. 마침내 육오의 명예는 치솟고 인군의 귀에까지 들려 그의 명을 받게 되었다.
上九 鳥焚其巢 旅人 先笑後號眺(상구 조분기소 여인 선소후호조)
상구는 새가 그 집을 태우니, 나그네가 먼저는 웃고 뒤에는 부르짖음이라.
喪牛于易 凶(상우우이 흉)
소를 쉽게 잃으니 흉하니라.
象曰 以旅在上 其義焚也 喪牛于易 終莫之聞也(상왈 이려재상 기의분야 상우우이 종막지문야)
상전에 이르길 나그네로써 위에 있으니, 그 의리가 불사르는 것이요, ‘상우우이’는 마침내 들음이 없음이라.
살다 보면 나그네 또한 끝장을 보는 때가 온다. 외괘는 불괘이므로 남방주작의 새가 나온다. 새가 그 둥지를 불태우니, 사람으로 치면 살고 있는 제집을 불태우는 것이다. 사람이 제집을 짓고 살다가 집이 허물어지면 다른 데로 가 또 집을 짓는데, 사람의 육체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의 육체는 영혼의 집이므로 육체가 허물어지면 다른 데로 가서 태어나 또 육체가 생긴다.
나그네 또한 세상에 태어났으니 좋아서 웃다가, 뒤에는 늙고 병들어 죽게 된다. 이것은 사람이 죽음을 스스로 초래하고 스스로 멸망한 것이다. 이것을 두고 소를 쉽게 잃었다고 한 것이다. 사람이 나그네로 살려면 소와 같은 순한 본성을 지키고 살았어야 하는데, 그 본성을 아무렇게나 굴리고 사니 모두 다 상실해버렸다. 이것이 둥지를 불태운 거나 마찬가지이고, 처음에 태어날 때는 좋았다가 잘못 살다 보니 뒤에 죽게 되어 호소하며 울게 된다.
불태운 것으로 구삼과 상구를 비교해보면, 구삼은 여관을 불태웠으니 임시로 머무는 곳을 불태운 것이다. 또 자신이 타고 가는 소는 남아 있고 마부만 잃어버렸을 뿐이다. 이에 비해 상구는 둥지를 불태웠으니 완전히 죽은 것이다. 여기에 소까지 잃어버렸으니 완전히 끝난 것이다.
모든 것을 다 태우고 떠나다.
삶은 여행과 같다고 한다. 여행은 불안정한 상태의 연속이다. 상이한 힘들이 교차하고 서로 다른 윤리들이 좌충우돌한다. 여기에 고정된 가치나 절대적인 척도는 없다. 그러니 인생길은 유목일 수밖에 없다. 화산려의 초육이 힘든 여행일 수밖에 없는 것은 처음 가보는 길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길은 처음 가보는 길이다. 다만 어디로 갈 것인지 정해지면 쉼 없이 갈 뿐이다. 왜냐하면 삶은 생생불식(生生不息)하며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여 화산려의 정도(正道)는 이 우주적 길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러니 초행길이라 두려워 말고 길을 나서라. 그 길에서 창문 넘어 도망친 백 세 노인을 만나게 된다면 참으로 든든할 것 같다.
글_이영희(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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