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도의 줄타기,
아차하면 넘어간다
이상에 착목하면 현실이 증발되어 버리고, 반대로 현장을 틀어쥐고자 하면 시야가 한없이 협소해진다. 결국, 통찰이란 원리와 현장, 이상과 현실 사이의 매끄러운 흐름을 의미한다. 원리를 현실에 활용하고, 현장의 역동성이 원칙을 유연하게 흔들어 주는 식으로. 물론 이것은 고도의 줄타기다.
- 고미숙, 『고미숙의 로드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 178 ~ 179쪽
인생이란 '고도의 줄타기'이다. 6시가 되면 퇴근해서 집에 도착,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 앉아 화기애애한 저녁 식사를 한다. 식사 후에는 거실에 둘러 앉아 오늘 하루 있었던 일, 내일의 계획 등을 주고 받으며 호호하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시간은 벌써 10시, 아이들은 각자 방으로 돌아가 간단한 '복습'을 하고, 부부는 거실에서 드라마를 본다. 아, 그거 참 즐겁겠다. 이런 가족이 있을까? 진짜로 있을까? 있을 수도 있다. 우리 가족도 20년 전 쯤에 몇 번 저랬다. 새털처럼 많은 날들 중에 단 며칠만 저랬다. 그러다 보니, 솔직히 저런 날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저런 풍경이 '이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꿈꾸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게다. 반대로 저렇게 밖에 표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어쨌거나, 문제는 저런 '이상'은 제대로 실현될 수가 없다. 설혹 실현된다고 한들 기쁠까?
좀 더 현실적인 풍경은 이렇다. 맞벌이 부부는 퇴근을 한다. 한 쪽이 야근을 하거나, 양쪽 다 야근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집에 언제 들어올지 서로 잘 모른다. 자식들은? 그 시간에 아마 학원에 가 있거나,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있을 것이다. 이런 가족이 가까스로 모였다. 식탁에 앉아 침묵의 식사를 한다. 서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면 꼭 둘째 딸이나 아들이 방으로 기어들어 간다. 어쩐지 모두 모여 있어야 '화목한' 가정에 합당할 것 같은데 꼬옥 그렇게 이탈을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마땅히 나눌 이야기가 없다. 첫째는 공부하러 들어가고 부부는 거실과 안방을 차지하고 각자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정말 화목하지 않은 가정의 풍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진짜 그럴까? 오히려 문제는 이런 풍경을 '화목하지 않음'과 곧장 연결하고야 마는 우리 인류의 습관에 달려있는 게 아닐까?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 재미있어 하는 일을 하는 것도 충분히 좋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풍경이 '화목하지 않음'으로 규정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앞서 말한 '화목함'에 대한 고정된 표상(이상)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고 '가정'이 충분히 유지될 수 있다. 우리 대부분이 이와 같은 '화목한 가정'을 영위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도 진짜 화목하지 않은 가정도 있을 수 있다.
어쨌든,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상적 풍경'과 다르게 살면서도 우리는 나름대로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줄타기의 명수'인 셈. 혹시 지금 인생이 삐끄덕 거린다면, 다른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자신이 꿈꾸고 그리고 있는 '이상'이 어떤 것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게 너무 상투적이어서 도무지 현실에서는 구현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또는 (그럴리는 없겠지만) 막장 드라마와 같은 삶을 동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이상' 점검하다 보면 내가 지금 인생이라는 줄 위에서 어느 한쪽으로 잔뜩 기울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알 수 있다. 다만 문제는, 다들 너무 오랫동안(그러니까 살아온 만큼) 줄타기를 하다보니 '줄타기'가 너무 쉬워져서 지금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한쪽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게 된 것이다. '통찰'을 못하게 된 셈이다. 다시 한번 명심하자. '인생은 고도의 줄타기'다. 아차 하면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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