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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고난과 장애는 만나라고 있는 것!(응?)

by 북드라망 2015. 6. 22.



수행하는 데

(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일주일에 세 번, 인욕정진(忍辱精進)을 하게 되었다. 월수금, 세 번으로 정해져는 있으나 두 번이 될 때도 있고 하…한 번이 될 때도 있다(흠흠). 원래 하려던 것은 인욕정진이 아니고, 스쿼시였는데 내가 하다 보니 인욕정진이 되어 버렸다. 해…해서 본의 아니게 구도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고나 할까;;; 아, 뭐랄까, 지금의 내 심정은…, 절밥 얻어먹으러 갔다가 머리 깎인 기분?(흑)


까, 깎으라면 깎겠어요ㅠㅜ



문제는 뱃살이었다. 사지비만자로만 살 때에는 두꺼운 팔다리가 보기에 거시기해서 그렇지 사는 데 별 불편함은 없었다. 그러나 배가 나오자 문제가 달라졌다. 맞는 옷이 거의 없고, 책상 앞에 앉아만 있는데도 숨쉬기가 거북했다(윗배가 아랫배를 누를 때의 그 압박감이란;;;). 차라리 출산과 같은 사건이라도 있었다면 스스로도 덜 민망했을 텐데, 내게는 그런 일조차 없었다. 게다가 불어나는 살과 달리 점점 바닥을 치는 체력에 비추어볼 때 삼십대 중반은 한방에 훅 가기에 딱 좋은 나이였다. ‘이미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욱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였지만 이젠 뭐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나름 고심고심하여 고른 종목이 스쿼시였다. 헬스는 그 운동기구들에 별로 정이 가지 않았고, 집에서도 잘 씻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씻을 수밖에 없는 수영은 애초부터 제쳐 두었고(그래서 난 스쿼시 끝나고도 집에 가서 씻는다. 저…정말이다;;), 요가는 도저히 그 동작들을 따라할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배드민턴 치는 건 재밌어 하니까, 스쿼시도 재밌어 하겠지?, 벽에다 공 튀겨서 받아치기만 하면 되는 건데 뭐……라며 나름 마인드컨트롤을 한 뒤 우선 스쿼시 한 달을 등록한 것이 한 세 주 전쯤의 일이었다.


그리고 첫날(뚜둥!), 공 맞지 말고, 넘어지지 말고 잘하고 오라는 남편의 당부를 가볍게 흘려들으며 첫 강습에 들어갔다. 하지만 남편의 염려는 예언이 되었고, 그 예언은 정확히 적중했다. 누가 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머리에 공을 맞았고(별로 아프진 않았다. 맞은 순간 그저 ‘우와! 정말 맞았네!’ 했다), 선생님이 튕겨주는 공을 치고 뛰어서 제자리로 들어오다가 바닥에 널린 공 하나를 밟고 한 일자로 넘어지고 말았다(이번엔 진짜 아팠다. 아팠지만 또 생각했다. ‘우와! 진짜 넘어졌다!’). 별로 창피하진 않았다. 나이가 드니 아픈 게 더 먼저다(흑, 나의 고관절ㅠㅠ). 아무튼 한 예닐곱 명쯤이 함께 강습을 받으며 차례로 공을 받아치는데 이 공이 내 공인지 아닌지도 헷갈리고, 선생님이 뭐라고 뭐라고 하는 얘기는 잘 들리지 않아서 그냥 ‘네, 네’ 하기만 하고, 공을 치고 난 다음에는 바로 다음 사람 뒤로 가는지, 뒤로 돌아서 가는지 난 모르겠고, 계속 돌고 도는 가운데 어쩐지 멀미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어쨌든 이건 아니야, 이렇게 격렬하고 적극적이어야 하는 운동은 내 길이 아니야……. 하지만 난 결제를 하였고(ㅠㅠ). 자꾸 움츠러드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말을 시키지 않으면 입을 절대 떼지 않는 쭈구리가 되고, 말을 시켜도 어버버. 강습이 끝나고 수강생들끼리의 연습에서는 슬쩍 나와 도망이나 가고. 하지만 난 결제를 하였고(ㅠㅠ)


스쿼시도 내 운동이, 내 길이 아닌 걸까...



버티려면 기대치를 확 낮추어야 했다. 그래, 스쿼시를 배워서 잘하려고 온 게 아니야.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몸을 움직이면서 땀도 좀 내고 그러려고 온 거지, 그냥 공을 받아치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자. 그…그런데 가만 보니까 내 공만 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간혹은 내가 친 공을 다른 사람이 쳐야 하기에 일단 내가 ‘잘’ 쳐야 했다. ‘잘하는’ 건 정말 못하는데, 아, 또 가기 싫다…라는 마음과 ‘그래도 가야지’ 하는 두 마음이 월/수/금요일마다 싸웠다. 그러다 마침내 내린 결론! 그래, ‘인욕정진’이라고 생각하자! 마침 을미년의 을목은 내게는 정관. 나의 정관을 스쿼시, 너로 정했다! ‘을목’처럼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도 “말없이 그 벽을 오”를 테다! 


수행과 마장(魔障)은 함께 간다. 번뇌가 보리(菩提)라는 말도 이런 의미일 터, 이것이야말로 불교적 대역설이다. 우리는 보통 수행을 할수록 만사형통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장애를 만나면 곧바로 멈추려고 한다. 이 길은 나와 맞지 않아, 라고 하면서. 그러면서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건 ‘갈 지之’ 자 행보, 곧 좌우로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길을 간다는 것, 구도자가 된다는 건 지금보다 더 ‘강도 높은’ 장애를 만나기 위함이다.

- 고미숙, 『고미숙의 로드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 북드라망, 2015, 118쪽


아, 내가 찾은 것이 ‘글’인가, ‘길’인가! 편집 중에도 몇 번이나 본 구절이지만 이제야 내 눈앞에 ‘뿅’하고 나타난 기분이다(인욕정진의 결실인가?^^). 그간 별 ‘장애’랄 것도 없는 것들을 스스로 장애라 여기며 멈추고 또 멈추고를 얼마나 많이 반복했을까(이런 급정거 인생;;;). 하지만 구법의 달인들인 ‘삼장법사와 아이들’ 또한 처음에는 그랬다고 하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 이들도 “처음엔 오직 앞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요괴들을 피하기도 하고 건너뛰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봤자 요괴들은 다시 도래했다. ‘건너뛴 삶’이 ‘무서운 괴물’이 되어 다시 돌아오듯이.” 그래, ‘스쿼시 포기자(抛棄者)’라는 요괴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선 멈추지는 말아야겠다. 다른 길을 찾지도 말아야겠다. “보다 더 ‘강도 높은’ 장애를 만나기” 위해 스쿼시 코트로 가겠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바로 이곳이다. 내 장애의 무대, 아니 아니 인욕정진의 도량(道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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