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질병과 공범이 될 수도 있어요”
사람들은 병들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개인적으로는 책임감을 느끼고 싶어요. 사생활에서 곤경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면, 예를 들어 잘못된 사람과 얽혔다든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 되면―누구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일들 있잖아요―나는 항상 상대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책임을 지는 쪽을 선호합니다. 나 자신을 희생자로 보는 게 정말 싫어요. 차라리 뭐랄까, 내가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를 선택했는데 알고 보니 개새끼였어, 이렇게 말하는 게 나아요. 그런 ‘내가 한’ 선택이었으니까요. 더욱이 다른 사람을 탓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남을 바꾸기보다는 나 자신을 바꾸는 게 훨씬 쉽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책임을 짊어지기 싫어서는 아니고요, 제가 보기에는, 병이 들어서 치명적인 질환을 앓는 건 마치 자동차에 치이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앓아눕게 됐나 걱정해봤자 별로 의미가 없다는 거죠.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면, 최대한 합리적으로 올바른 치료를 모색하고 진심으로 살고자 원하는 것입니다.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질병과 공범이 될 수도 있어요.
- 수전 손택, 『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김선형 옮김, 마음산책, 2015, 34쪽
최근에 우연히 1년여 전에 방송한 KBS 인간극장 ‘아홉 살 현정이’편을 보았다(그러니까 지금 현정이는 열 살이겠다). 제주도에서 농아인 엄마와 아빠,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사는 현정이는, 놀랍게도 두 살 무렵부터 혼자 엄마·아빠가 대화를 나누는 수화를 보고, 따라했다고 한다. 방송에는 엄마와 시장이나 병원 등을 다니며 엄마의 수화 통역을 하는 현정이 모습이 담겼다. 또래 아이들처럼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하지만, 또 수화 통역으로 엄마와 아빠를 돕는 걸 귀찮아하지 않는, 똑똑하고 활기찬 아름다운 아이였다.
현정이 동생 현미와 엄마
처음엔 현정이에게 반해서 방송을 보다가, 점점 현정이의 엄마 설경희 씨에게 눈길이 갔다. 태어날 때는 들을 수 있었으나 세 살 무렵 앓은 열병으로 청각을 잃고 농아가 된 경희 씨. 그런데 그녀는 처음 현정이네 학교 선생님이 그녀의 장애를 알 수 없었을 만큼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보통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면 사람들 속에서 움츠러들게 마련이다. 소극적으로 대하거나 아예 만남 자체를 피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경희 씨는 현정이네 반 다른 학부모님들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이고, 한 레스토랑에서 주말 아르바이트 근무를 하다가 직원으로 채용될 정도로 일에도 열성적이다.
물론 농아 아닌 내가 직접적으로 이 적극과 열성에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 실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주 조금이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면 내 가까운 친구가 점점 귀가 안 들리게 되어 가면서 그의 성격이 얼마나 소극적으로 변해 갔는지를 직접 보아왔기 때문이다. 내 친구는 참, 밝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웃으면 반달모양이 되는 눈과 높은 웃음소리, 활기찬 말투를 지녔으며 그리고 연극 무대에 서고 싶다는 꿈을 가졌고, 또 가끔 그가 학교에서 작은 무대에 설 일이 있으면 그 자리가 참 잘 어울렸던 그런 청년이었다.
그러나 선천적인 어떤 병의 문제로 점점 청력이 나빠져 가자, 그는 주위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을 드문드문 만날 뿐이었다. 어머니의 식당 일을 도우면서 살던 그는 자신이 잘 안 들린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사람들 반응에 주눅 들었고, 그의 웃음에는 어두움과 쓸쓸함이 묻어나게 되었다.
어느 날, 그의 부동산 일 처리를 도와주러 동행한 나는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했다. 계약 당사자는 친구인데, 부동산 중개인은 나를 보고 얘기하고, 나는 친구와 미리 맞추어 놓은 계약 조건들을 이야기한다. 당사자인 친구는 멍하니 있게 되고, 나와 중개인은 서로를 보며 얘기하다가도 순간 친구를 보며 움찔하게 되었다. 친구는 아주 큰 소리로 말하면 들을 수 있고, 말도 정확하게 할 수 있는데도 그런데, 아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건청인과 소통하는 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리라.
현정이 엄마 경희 씨의 주변에는 경희 씨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현정이와 같은 반 친구들의 엄마들은 경희 씨에게 수화도 배우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만들어 낸 것이 바로 경희 씨의 용기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익숙지 않은 상황이나 모습을 맞닥뜨리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당황한 이후의 행동이다. 먼저 다가와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그것도 그가 주변에 함께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매몰차게 행동할 사람은 거의 없다(고 나는 믿는다). 어찌 보면 당황한 건청인에게도 약간의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덜 당황하기 위해서 어쩌면 먼저 다가가기 위해서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한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일은 벌어졌고, 병에 걸렸으며, 나의 조건은 달라졌다. 나는 이제 여기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어갈지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은 수전 손택과 달리 병에 걸린 자신에 대한 자책과 낙담에 빠지기가 더 쉽다. 그러나 병(혹은 최악이다 싶은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사유를 펼쳐가는 것은 손택 같은 사람에게나 가능한 걸까. 답이 ‘그렇지 않다’임을 우리는 알 것이다. 그녀의 말처럼, “진심으로 살고자 원하는 것”, 그냥 살아지게 두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 바로 거기에서부터 우리의 삶은 진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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