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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여름 휴가에 담긴 '절기'의 지혜

by 북드라망 2015. 7. 20.


여름휴가, 어떻게 가야 

 잘 갔다고 소문이 나려나...




여름이다. 나는 더위를 많이 타고, 특히 내가 만나본 누구보다 많은 땀을 흘리기 때문에 여름은 나에게 정말 괴로운 계절이다. 그래도 몇 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여름에야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것이기에, 늘 땀 때문에 머리가 젖어 있어도 여름이 지긋지긋하지만은 않을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피서’(避暑) 같은 것도 그중 하나다.



여름에 낯선 사람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 "밖에 비와요?" 혹은 "세수하셨나 봐요?"



20대 중반까지 피서는 나에게 즐거운 행사였다. 가급적이면 꼭 바다로 갔다. 여름바다는 여름이 괜찮게 느껴지는 몇 가지 중 하나였다. 친구들과도 가고, 효도 삼아 가족들과도 갔다. 어쩌다보면 이 친구들과도 가고 저 친구들과도 가기도 했다. 여름 한철에만 두세 번쯤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바다를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옛날 일이다. 요즘 들어서는 여름휴가가 즐겁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누구와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서 뭘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함께 여름을 보내던 친구들은 대부분 (사전적 의미의^^) 일가를 이뤘다. 가족을 이룬 지 얼마 안 되다 보니 일 년에 한번 뿐인 여름휴가는 친구보다는 자기 가족과 함께 움직이게들 되었고, 그런 사정들을 감안하며 일정을 짜는 것부터가 난관의 시작이었다. 이쪽저쪽으로 서로의 사정을 조율해야 하는 것이 몇 번 되풀이 되다 보니 일정을 짜고, 회비를 걷고 숙소를 예약하는 것도 다 귀찮은 일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꼭 같이 가야 하나 싶었다. 그리고 친구들도 다 적당히 나이를 먹어서인지 바닷가에 가서도 좀처럼 몸을 쓰지 않는다. 바다를 보고 모래사장을 밟고 돌아오는 정도. 발을 담가도 발목이나 무릎 정도가 전부다. 그렇게 바닷가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듣고 바닷바람을 쐬다가 횟집이나 전전하다 돌아오게 된다. 역시 이런 것도 그렇게까지 즐겁지가 않다. 그런데도 여름휴가 일정은 돌아온다. 어쨌거나 ‘여름’휴가는 일 년에 한 번뿐인데 뭐라도 해야지 싶다. “여름휴가는 다녀오셨어요? 어디 갔다 왔어요?” 라는 질문에 그럴싸한 대답거리를 만들어놔야 하나 싶은 거다.(아이고 의미 없다) 그렇게 여름휴가가 즐거운 이벤트가 아니라 숙제처럼 되어 버렸다. 이러다보니 여름휴가를 왜 떠나야 하는지, 꼭 ‘피서’라는 걸 가야 하는지 스스로 묻고 싶었다.



이런 마음으로 놀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한의학에서는 습의 특성을 중탁(重濁)하다고 말한다. 무겁고 탁한 기운이란 뜻이다. 습이 상하면 몸이 무겁고 피곤해서 축 처진다. 끈적끈적한 습기로 괴로워하는 이들은 사지가 나른하고 머리는 싸맨 듯하며, 한밤중에도 일어났다 잠들기를 반복한다. 또한 습은 점체(粘體)의 성질이 있다. …… 아무리 샤워를 해도 고작 몇 분 못 가 금세 끈적이는 것은, 한번 들러붙으면 잘 떼어지지 않는 습의 습성 때문이다. …… 하나에 매달려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면 그것은 집착이지 집중이 아니다. 집착하는 마음이 바로 습사(習邪)다. 온통 거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 머리가 무겁고, 인간관계도 끈적끈적, 산뜻할 수가 없다. 그렇게 관계하면 서로를 망친다. 반면 떠나보내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생명의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그때 관계 역시, 습지에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것처럼 풍부해진다.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는지 온전히 볼 수 있을 때 집중할 수 있다.

- 김동철·송혜경 지음 『절기서당』, 북드라망, 2013. 142-145쪽


피서란 어쩌면 ‘습’을 떠나보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여름의 더위와 끈적끈적한 습기를 피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 대개 사람들이 휴가를 가는 7월말 8월 초는 일 년의 하반기가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잠시 멈춰서 정신없이 달리던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온전히 바라보기 좋은 시간이다.



그러고 보니 작년 여름 휴가 기간에 나는 오대산에 있었다(재작년엔 집에 있었다. 아마 그 전에도 집에 있었던 것 같다). 친구가 그 근처에서 취직을 하게 되어 겸사겸사 놀러간 것이다. 평일이었으니 친구는 출근을 했고, 나는 빈둥대다가 점심시간에 맞춰 일어나 월정사 절밥을 얻어먹고, 걸어서 상원사나 갈까 하고 길을 나섰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가는 길을 ‘선재길’이라고 해서 걸을 수 있게 해 놓았다는 말을 친구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선재길에서 설레는 한때-_-;; 저게 먹구름이라는 것도 모르고...


지도상 거리는 약 9km였다. 보통 사람이 걷는 속도를 시속 4km라고 한다고 했으니 두 시간 좀 넘겠다, 뭐 괜찮겠다 싶었다. 여차하면 가다가 버스를 잡아타고 올라가든지 내려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산길은 제법 잘 닦여 있었고, 정취도 있었다. 이정표도 잘 세워져 있어서 중간 중간 길을 잃을 일도 없었다. (물론 중간에 길을 잃었나 의심이 가던 구간이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3km를 지나서였나, 내가 챙겨온 물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 산책으로 시작한 등산은 살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온 것 같았다. 산길을 버티기에 내 운동화 밑창은 너무 얄팍한 것도 같았다. 계속 가기에는 너무 덥고, 목이 말랐다. 차라리 찻길로 나가서 버스를 타자 싶었지만, 아무리 걸어도 찻길은 나오지 않았다. 풍경이 눈에 들어올 리도 없었고, 그저 기계처럼 뚜벅뚜벅 걷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망상을 버려보자 싶어 노래도 부르고, 욕도 하며(^^;) 걸었다. 그랬는데 앞서 가시다 앉아서 쉬고 계셨던 등산객 분이(계셨는지도 몰랐다) 나에게 복숭아를 두어 조각 쥐어주셨다. 내가 부른 노래도, 내가 한 욕도 다 들으셨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거의 절을 하다시피 인사를 하곤 넙죽 받아먹었다. 해갈이 되자 마음이 편안해져서 조금 더 걸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지만 머릿속으로는 벌써 “좋은 마음으로 버스를 탈 수 있겠군”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찻길 바로 앞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해가 쨍쨍한데 굵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자 기분이 한결 즐거워졌다. 비는 금방 그쳤다. 뭐 될 대로 되라지, 라는 심정으로 ‘다음 정류장까지’ 하며 걷다 보니 상원사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가는 길에 선물 받은 복숭아. 이 복숭아 덕에 3km쯤 더 걸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고마워요!!


나는 상당히 더디게 걸었고, 갑자기 너무 많이 걷는 바람에 골반이 뻐근하게 아팠다. 도착해서 보니 거의 4시간을 걸은 다음이었다. 상원사 주차장 앞 매점에서 물 한 통과 아이스크림을 사다 먹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상원사에 갈까, 적멸보궁에 갈까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버스 한 대가 와서 섰다. 시간을 보니 5분도 안 있다 떠날 버스였다.

나는 결국 그날 상원사도 가지 않았고, 적멸보궁도 가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버스를 타고 진부로 들어가서, 친구 집을 청소를 하고 친구가 퇴근할 때까지 신나게 잠을 잤다. 상원사는 다음날 버스를 타고 친구와 함께 올라가 보았고, 적멸보궁은 내년(그러니까 이번 해)에 가야겠다고 남겨두었다. 아무 데도 ‘찍고’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날 선재길을 걸은 것은 상당히 괜찮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혼자 한 여행 중에서 단연코 가장 정말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어릴 적에야 시간을 맞춰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노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지긋지긋한 여름에 바다에 몸을 담그고 먹고 마시는 일이 없다면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제는 그렇게 노는 게 옛날만큼 즐겁지가 않다. 오히려 잠깐 일상을 멈추고 벗어나서 지금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가을과 하반기를 맞이해야 하는 입장에서도 적절한 타이밍이다. 작년에 나는 본의 아니게 그런 시간을 가졌지만, 내가 한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오기만 했다. 아직 친구는 진부에서 일하고 있고, 이번 해에도 숙박비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이번 해에는 조금 더 걷기 좋은 신발을 신고, 좀 더 많은 물을 갖고 다녀와야지 싶다.  


절기서당 - 10점
김동철.송혜경 지음/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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