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구도 또한 ‘원초적 본능’이다!”
이때 혼찌검이 난 탓에 성욕은 좀 잦아들었으나 식욕만은 도무지 제어가 안 되어 가는 곳마다 물의를 일으킨다. 게다가 그걸 채우기 위해 쉬지 않고 ‘잔머리’를 굴린다. 그 과정에서 손오공과 삼장법사를 이간질하는 게 다반사다. 또 번번이 깨지면서도 틈만 나면 손오공한테 대들고 개긴다. 심지어 요괴와 대적할 적에도 자기가 공을 세우려고 손오공을 함정에 빠뜨리기도 한다. 식탐에다 여색을 밝히는 건 기본이고, 게으르고 비열하고 덜떨어지고……, 저팔계의 악덕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래서 몹시 의아했다. 어떻게 이런 인물이 구법의 길을 갈 수 있는가 하고. 하지만 문득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저것이 바로 중생의 실상이 아닌가. 이런 중생도 구할 수 있어야 비로소 대승이라 할 수 있을 터, 저팔계도 갈 수 있다면 대체 누군들 가지 못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울컥!’ 하고 감동이 밀려왔다. 온갖 추태를 저지르고 갖은 망신을 다 겪으면서도 꿋꿋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라. 탐욕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구도 또한 ‘원초적 본능’이다!
고미숙, 『고미숙의 로드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 북드라망, 2015, 103~104쪽
나도 ‘울컥’ 했다. 이렇게 탐욕스럽고 덜떨어진 저팔계도 구도의 길을 갈 수 있다면, 누군들 못 가겠는가, 라는 그 말이 곧장 이렇게 들려왔던 것이다. “너도 구도의 길을 갈 수 있다!”
저팔계도 구도의 길을 갈 수 있다면, 누군들 못 가겠는가!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 번뇌의 근원인 ‘탐진치’(貪嗔痴: 욕심, 성냄, 어리석음) 가운데 ‘탐’을 맡고 있는 저팔계(맡고 있다니까 흡사 아이돌 그룹에서 “랩을 맡고 있는 누구입니다”를 연상시키는데… 정확한 표현은 탐욕의 화신이랄까…;;;). 그럼 성냄, 분노의 화신은 누굴까? 자기 성미나 판단에 거슬리면 가차없이 여의봉을 휘둘러 깨부수는 손오공이다. 어리석음은 사오정. 이런 특성을 기가 막히게 파악해 우리 삶과 연관시켜낸 책, 『고미숙의 로드클래식』에서는 『서유기』의 이 인물들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손오공 - 분노와 정념의 화신 / 저팔계 - 탐욕은 나의 운명! / 사오정 - ‘본투비’ 매니저!
어떤 버전의 『서유기』를 접했든(만화든, 1권으로 축약된 소설본이든, 애니메이션이든, 영화든) 세 제자 가운데 “싫다”는 감정을 가장 많이 불러일으키는 인물이 저팔계가 아닐까? 툭 하면 먹는 것과 여자를 밝히기에 여념이 없는 욕심쟁이 주책바가지를 보고 호감을 가지기는 어렵지 않을까. 손오공이야 워낙 멋진 도구(무기?)와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어떤 버전에서든 호감을 가지기 쉽고, 사오정은 원 소설에서는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캐릭터가 아니라 오히려 버전마다 색깔을 부여하기 쉬워서 급호감 캐릭터가 되기도 하는데, 저팔계는… 뭐… 다들 아는 바와 같다.
그래도 가장 귀여운 편에 속하는 저팔계:D
그런데 “탐심에 살고 탐심에 죽는” 저팔계야말로 우리 자신과 가장 닮은 캐릭터가 아닐까?(그래서 보기 싫었던 건가… 쩝!) 식욕과 성욕을 기본으로 한 온갖 욕심은 기본으로 장착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함께 길을 가는 동료 간의 이간질도 서슴지 않고, 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친구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에도 머뭇거림이 없는… 사실 이 모습은 저팔계나 어느 드라마의 악역만이 아니라, 사실 평범한 사람인 우리 모두가 얼마씩 나누어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먹을 것을 향한 저 눈. 음식 앞에선 내 눈이 왠지 저럴듯 ㅜㅠ
하지만 이런 저팔계도 목적지인 서천에 다다랐다. 스승과 사우들과 함께 끝내 불경을 받으러 십만 팔천 리를 온갖 유혹과 고행을 겪으며 걸어간 저팔계는 우리에게 알려 준다. “온갖 추태를 저지르고 갖은 망신을 다 겪으면서도 꿋꿋이 나아가는” 것이 곧 삶의 길이며 구도의 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말한다. 나도 걸었는데, 네가 못 걷겠냐고. 지금 당장 일어나서 한 발 걷는 그만큼이 서천(구도)에 한 발 더 가까워진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끝으로 고미숙 샘의 말씀!
“[저팔계는] 정말 외모가… 누구도 호감을 가질 수 없는 외모이다 보니 아무도 유혹을 안 해요. 자기는 늘 유혹을 받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데 정말 단 한 명의 여성도 유혹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냥 성욕은 저절로 잦아들었고, 그 다음에 식욕은, 계속 움직여야 되니까. 더 먹고 싶은데 손오공하고 삼장법사가 빨리 가자고 하니까, 이 스승과 사형을 따라가야 되니까 덜 먹고 가고, 덜 먹고 가고. 이러면서 자기 욕망을 제어하는 과정이 특별하지도 않고 신비롭지도 않고 너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인 거죠. 우리가 우리 자신의 탐욕이나 우리 자신의 충동을 보면 너무 한심하고, 이건 도저히 가능성이 없어 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나는 구도, 구법 이런 거하고는 거리가 멀어, 그냥 틀렸어, 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저팔계를 본다면 아, 누구든 갈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욕망과 충동을 부정하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이, 계속 움직이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어서 정말 저의 롤모델로 삼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인터뷰에서 영상과 음성으로 함께 보셔요~ 위 부분부터 재생됩니다:D)
『고미숙의 로드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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