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에게서 온 편지
슬픔이 몰려올 땐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하기만 하다. 땅을 뚫고 들어가고만 싶을 뿐 한 치도 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럴 때 내게 두 눈이 있어 글자를 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손에 한 권의 책을 들고 찬찬히 읽다 보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내 눈이 다섯 가지 색깔만 구분할 뿐 글자에는 캄캄했다면, 마음을 어떻게 다스렸을지.
― 이덕무 지음, 길진숙 · 오창희 풀어읽음, 『낭송 18세기 소품문』, 128쪽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을 읽어보셨을 겁니다. 도적떼와 무인도로 들어간 허생이 무인도에서 나오면서 당부를 합니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지 말아라’라고요. 약간 이상했습니다. 왜 글을 가르치지 말라고 했을까요. ‘글줄 깨나 읽은 사람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민초들의 삶을 돌보지 않는 조선사회에 대한 환멸’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을 거라고 하셨던 중2 때 국어 선생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때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지금 생각하면 허생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저도 가끔 아예 글자를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으니까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글자들이 쏟아집니다. 그게 가끔 너무 피곤할 때가 있어요. 무슨 사건이 일어나고, 글자를 아는 사람 모두가 거기에 한 마디씩 ‘댓글’을 답니다. 그러다 보면 굳이 내가 몰라도 되는 것들까지 알게 되고 순간 열도 받고, 서글프기도 하고……. 그러니까 점점 ‘덤덤하게’ 보내는 시간이 사라지는 걸 느끼는 거죠. 노력하지 않으면 ‘덤덤’하기도 힘든 세상…, 하… 피곤합니다.
이덕무는 연암의 절친 중 한사람입니다. 별명이 ‘책만 읽는 바보’, 줄여서 ‘간서치’라고 불렸던 열혈 독자였죠. 찢어지게 가난한 관계로 덮고 잘 이불이 없어 『논어』를 덮고, 『한서』를 병풍 삼아 잤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책이 온 사방에 넘쳐나지만 당시에는 귀한 물건 중에 하나였습니다. 중국에서 막 들어온 책 등을 찢어지게 가난한 선비가 그때그때 구입하여 읽을 수는 없는 노릇, 하여 이덕무는 친구들에게 책을 빌려서 베껴 쓰고, 그 책을 소매에 넣고 다니면 틈나는 대로 읽을 정도의 열혈 독서가였습니다. ‘덕후’ 중의 ‘덕후’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이름도 묘하게 비슷합니다. 덕무와 덕후. 후훗) 찢어지는 경제상황과 서얼 출신이라는 사회적 배경, 아마 이덕무는 살아가는 그 자체가 ‘극한직업’ 같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덕후라면 당연하게도) ‘덕질’이겠죠. 그래서 오늘의 씨앗문장 같은 글을 남긴 것일 테고요.
책덕후라면 응당 씨앗문장을 써야죠!
세상에 둘도 없는 독서광 이덕무와 글자를 가르치지 말라고 당부한 허생은 몹시 대조적이네요.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실 ‘허생’도 엄청난 ‘덕후’였다는 사실입니다. 「허생전」의 첫장면은 ‘찢어지게 가난한’ 허생의 집에서 출발합니다. 10년 글읽기로 마음먹고 방구석에서 책만 읽는(덕질에 몰두해 있는) 허생에게 그의 부인이 과거를 보든지, 돈을 벌어오든가 하라고 구박을 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저는 ‘허생’의 모델이 이덕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합니다만, 아무 근거는 없습니다. 어쨌든 말입니다. 처음부터 글을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알아버린 이상 까먹을 수도 없고, 써먹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참 신기한 것이 ‘글’ 때문에 온갖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잘 쓴 ‘글’만큼 위안이 되는 것도 없죠. 특히나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진짜로 글만 한 것이 없습니다. 또, 그중에서도 옛날 사람들이 마음을 다스리면서 쓴 글을 진짜 효과만점이죠.(마치 오늘의 나를 위해 과거에서 누군가 편지를 써준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요즘도 이덕무를 모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요. 차태현이 이덕무로 분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아무리봐도 이덕무가 모델인 드라마스페셜 <간서치열전>입니다.
이덕무도 아마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서얼이어서 뜻을 화끈하게 펼칠 길은 막혀 있지, 책 읽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집은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하지, ‘차라리 글을 모르는 무지렁이였다면 마음이라도 편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그런 심정을 담은 옛글을 찾아보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독서’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 곧 삶의 목적이 되고,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이 정말 다행이구나 하면서 저 글을 썼을 겁니다. 혹시 연암 박지원은 ‘에이 그냥 다 글 읽을 줄 몰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거야’란 한탄을 글로 풀어 「허생전」을 지었던 건 아닐까요?(아...아님 말구요..하하..;;;)
멋도 있고요, 책 읽기 좋아하고 글쓰기 좋아하시는 분들이니 여기까지 오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게 된 것들 때문에 가끔 느끼지 않아도 될 번뇌도 많으시리라 생각되고요. 정말로 세상에 글자가 없어서 시험도 없고, 책도 없고, 화폐마저도 생기지 않았다면 모를까 기왕에 생겼고 알게 된 글자라면 이덕무나 박지원처럼 적극적으로, 인생의 성분 자체를 바꿔 버릴 만큼 강렬하게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글은 우리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달래주는 ‘편지’ 같은 것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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