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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명분'이라는 흉기 - "그곳에 가면 너는 죽게될 것이다"

by 북드라망 2015. 4. 27.



인간사에 끌려다니면 거짓을 저지르기 쉽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면 거짓을 저지르기 어렵다





안회가 공자에게 길을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어디로 가려느냐?”
“위나라로 가려 합니다.”
“그곳에 가서 무엇을 하려느냐?”
“지금 위나라의 왕은 나이가 어려 혈기방장한 데다 독선적이어서 전횡을 일삼습니다. 제멋대로 나라를 다스리면서도 자신의 허물을 되돌아볼 줄 모릅니다. 함부로 백성들을 전쟁으로 내몰아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합니다. 논밭과 늪지가 초토화되어 백성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궁지에 빠졌습니다.
그 동안 스승님은 ‘잘 다스려지는 나라를 떠나 어지러운 나라로 가야 한다. 의원의 집에는 병자가 많은 법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그 말씀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위나라가 다시 나아지지 않을까요?”
공자가 말했습니다.
“아! 그곳에 가면 너는 죽게 될 것이다.”

- 장자 지음, 이희경 풀어 읽음, 『낭송 장자』, 42쪽


여기까지. 이 뒤로 공자님의 말씀이 이어지지만, 여기까지 읽었을 때 저는 문득 며칠 전에 보았던 웹툰의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바로 이 장면입니다.


삼촌, <이런 영웅은 싫어> 175회 '보통이 아냐' 중



내용을 아주 조금만 설명을 드리자면, (아래 컷의) 진주 목걸이를 한 여성(이름은 '영정'입니다)은 이 웹툰에서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가장 강한 ‘히어로’입니다. 영정은 ‘스푼’이라는 일종의 히어로 경찰조직을 만들었고 ‘스푼’은 담벼락에 갇힌 고양이를 꺼내는 시시콜콜한 일부터(^^;;) 세계 최강의 악당조직인 ‘나이프’와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합니다. ‘시가전’ 같은 것도 벌어지고 사람도 죽고 그럽니다;;; 영정과 마주 서 있는 ‘나기’라는 소년은 현재 가장 강한 히어로입니다. 나기는 스푼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게 뭔가 사명감 때문이라기보다는.. 봉사점수도 딸 수 있는 데다(나기는 고등학생입니다!) 월급도 꽤 많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기를 영정은 설득하고 있는 거지요. ‘나의 뒤를 이어 최강의 히어로 자리에서 나이프(악의 조직)를 제어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하도록 하라. 그리고 은퇴하기 전까지 후계자를 찾으’라구요. 뭐 이것까지는 조금은 흔한 이야기라고 치고 그 다음 나기의 대답에 저는 조금 놀라고 말았던 것이지요...


아... 영정의 깊은 고뇌(라고 쓰고 빡침이라고 느끼는...)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지요;;; (같은 회)



나기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강한 히어로입니다. 나기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이 만화 속 세계에는 없습니다. 나기도 그 사실을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그래서 영정은 기꺼이 세계를 수호하던 자신의 자리를 나기에게 물려주려고 하는데 나기는 저렇게 속 편한 소리나 하고 있는 겁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스파이더맨>의 격언(^^)에 딱 위배가 되는 말이죠. 그리고 안회는 공자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일이라 믿고 위나라로 위세를 하러 가려는데 공자는 ‘가면 너 죽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가지 말라는 말과 다를 바 없지요.


저는 안회의 포부에 찬물을 끼얹는 공자를 보면서, 영정의 원대한 계획에 찬물을 끼얹는 나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여러모로 보아도 안회의 태도가 옳은 것 같은데 공자는 아니라고 하고, 세계를 구하라고 하는 영정이 옳은 것 같은데 나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옳다고 여겨지는 일에 내가 연루되어 있을 때 아니라고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거기에 ‘대의’가 얽힌 일이라면 더더욱 그럴 겁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으니까요.


그 곳에 가면 너는 결국 죽게 될 것이다. 도道란 번잡한 것이 아니다. 번잡하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여러 갈래로 나뉘면 흔들리고, 흔들리면 불안해지고, 불안해지면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없다. 옛날 지인至人은 자기 안에 도를 갖춘 후 다른 사람도 갖추게 했다. 자기 안에 도를 갖추지도 못한 채 어느 겨를에 난폭한 자를 바로잡을 수 있겠느냐? 더구나 너는 타고난 덕이 어떻게 사라지고 분별하는 지식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아느냐? 타고난 덕은 명분 때문에 사라지고 분별하는 지식은 다툼 때문에 생겨난다. 즉 명분은 서로 다투는 것이고, 지식은 그것을 위한 무기일 뿐이다. 둘 다 흉기이니 사람이 닦아야 할 것이 아니다.

- 같은 책, 43쪽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기는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자기는 희생할 수 없다는 것을요. 세상을 구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자신의 가족을 희생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말이죠. 자기는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잠 잘 자고 다치지 않고 자기 가족에게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좋을 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세계라니요,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입니다. 나기는 대의나 명분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기는 ‘타고난 덕’을 잘 발휘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제가 나기에게 부러운 것은 엄청난 능력이 아닙니다. 자기를 알고 있는 것이고, 가장 덜 후회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선택하고 그걸 말할 수 있다는 거지요. 저는 그걸 잘 못하거든요. 어려서는 특히 더 했지만, 저는 명분이나 대의가 제 자신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작은 것(저 하나)을 희생해서 대의를 얻게 된다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왔지요. 그래서 명분이나 대의가 앞세워지면, 그것이 다수가 옳다고 말하면 종종 제가 원하는 일에 반해도, 제가 좀 희생을 해도 입을 다물어왔었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는 참 저 자신에게 자신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의나 명분이 나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내가 입을 다물면서 따르고 지켜야 하는 가치가 뭔지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정말 칼 같이 명쾌한 대답입니다. 암요, 그런건 세상에 없어요!

김보통, <내 멋대로 고민상담> 3화 중



저는 아무리 봐도 초능력은 없습니다.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조금의 잔기술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전면에 내세우기는 좀 부족하지요. 그리고 성격적으로는 좀 옹졸한 편이지요. 다행히 금세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마음에 쌓아두지 못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외모도...(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저는 그냥 대한민국의 또 하나의 ‘평균 이하’입니다. 이런 제가 무슨 대의고 명분입니까. 이건 자기비하라기보다는 정확하게 보자는 겁니다. 전 그냥 저의 안위와 행복이나 살피며, 근처에 살거나 스쳐가는 이웃들께 피해 주지 않고 조용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래요, 무엇보다 저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어리광을 가장한 패악질을 부리며 그들의 사랑을 시험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습니다! 대의나 명분을 따라 살기보다 저를 살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이지요.


공자는 그래서 안회에게 마음의 재계[心齋]를 실천하라고 이릅니다. 재계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하는 것’을 말하지요. 먼저 스스로 흔들리지 않게 된다면 그때가 되어서야 남을 도울 수 있다고 하면서요. 저는 갈 길이 아주 멉니다. 텅 비우는 건 고사하고, 아직 마음을 하나로 합치지도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직 몇 년째 이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렇지만 괜찮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니까요^^ 급한 일 아니니까요.


그리하여 언제인지 모르지만 스스로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마음의 재계를 통해 나를 비우는 것에 대한 공자님의 말씀을 덧붙입니다. 참고로 이것은 『장자』에 나오는 공자님이시니 익히 알고 계시는 공자님과는 다를 것이라는 말을 이제야 드리면서 말입니다^^;;


위나라 울타리에 들어가 놀더라도 명분 따위에 흔들리지 말아라. 들어주거든 말하고 들어 주지 않거든 그쳐라. 문을 세우지도 말고 담을 쌓지도 말며, 마음을 한결같게 하여 그냥 그대로의 흐름에 맡겨라. 이게 최선이다.
걷지 않기란 쉽지만 걸으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기란 어렵다. 인간사에 끌려다니면 거짓을 저지르기 쉽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면 거짓을 저지르기 어렵다. 날개가 있어 난다는 말은 들었겠지만, 날개 없이 난다는 말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지각작용이 있어 안다는 말은 들어보았겠지만 지각작용이 없이 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 빈 것을 보아라. 텅 빈 방이 홀연히 빛나고 상서로움이 고요함 속에 깃든다. 그러나 고요함이 깨지면 ‘앉아서도 내달린다’. 보고 듣되 마음으로 통하게 하고, 나아가 마음의 분별심에서도 벗어나라. 그러면 귀신도 들어와 머문다. 하물며 사람이 찾아오는 일쯤이야. 이것이 만물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다.

- 같은 책, 50-51


낭송 장자 - 10점
장자 지음, 이희경 풀어 읽음/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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