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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징그러운 벌레 or 예쁜 벌레?!

by 북드라망 2015. 3. 18.



덜 고통받는 삶의 조건




날개가 있어 날 수 있는 것들은 근본을 따져보면 꿈틀거리지 않는 것이 없다. 날개가 없어 날지 못할 때는 모양이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며, 뿔이 있기도 하고 털이 있기도 하고, 푸르기도 하얗기도 붉기도 알록달록 하기도 하다. 혹은 나무 사이에서, 혹은 풀 사이에서 꾸물거리고 꼬물거리는데, 뜰을 지나가며 그것들을 보는 이마다 침을 뱉어 더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다.

― 이옥 지음, 채운 풀어 읽음, 『낭송 이옥』, 126~127쪽


벌레는 참 징그럽습니다. 다리가 엄청 많고 더듬이가 길쭉한 이른바 ‘돈벌레’라는 것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벌레를 전혀 징그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걸 보면 ‘귀엽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징그러움’은 ‘돈벌레’에게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징그러움’이 벌레에게 있는 것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징그럽다고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벌레를 대하는 '보통 반응' ^^;;



등에는 잔 점들이 있는데, 때가 되어 변화하면 형체가 바뀌고 달라지니, 날개가 없는 것은 날개가 생기고, 날지 못했던 것은 날 수 있게 된다. 분을 바르고, 눈썹을 붉게 그리고, 비단옷을 입고, 여기에다 비취로 머리에 장식한 것은 구슬처럼 영롱하고, 망사처럼 반짝거리니, 너울거리는 우아한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화려하다.

― 같은책, 127쪽


‘징그러운’ 벌레들 중에는 자라서 성충이 되는 벌레들이 많습니다. 이것들도 누군가에게는 너무 예쁘고 우아한 것으로 보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금 덜 징그러운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아름다움’은 그것 안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옥은 앞의 징그러운 벌레와 뒤의 예쁜 벌레를 대조시키면서 앞의 것을 ‘박대하면서’, 뒤의 것을 ‘사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아마 반어법이겠지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며 누군가를 비난하신 적들 다들 있으실 겁니다. 저도 그랬고요. 이옥의 저 문장들을 보면서 생각해 봤습니다. 특정한 누군가가 그런 게 아니라 원래 인간들 모두가 다 그런 것 아닌가 하고요. 징그럽게 보이는 것이나 예쁘게 보이는 것이나 보고 있는 대상에 징그러움과 예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결국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경계’인 것이고 그 ‘경계’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하는 마음의 회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이런 저런 글들을 읽을수록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의 공통점이랄까요? 참 상투적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경계’가 희박합니다. 그리고 ‘위대’해 지기까지 그들은 그 경계를 허물며 살아왔다는 걸 느끼고요. 예수님의 사랑에 차별이 없고, 부처의 자비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의 진짜 뜻도 그러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러한 경계없음의 경지가 ‘위대함’의 조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공부나 수행의 초점도 경계를 허무는 데에 맞춰져야겠군요.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징그러움’과 ‘혐오스러움’에 고통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 오늘도 공부해야겠습니다. 어떻습니까? ^^


달팽이는 모두에게 귀엽겠지요? 아마도^^;;

낭송 이옥 - 10점
고미숙 기획, 이옥 지음, 채운 옮김/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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