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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것의 어려움 - 상식의 역설

by 북드라망 2015. 3. 3.



상식의 역설



저에게는 말한다는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말하기를 망설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는 말이 유창하고 거침없이 이어지면 화려할 뿐 알맹이가 없어 보입니다. 말이 착실하고 정중하며 빈틈없고 강직하면 도리어 서투르고 산만해 보입니다. 인용을 자주 들면 말이 길어지고, 비슷한 사례들을 열거하여 비교하면 속이 비고 쓸모없어 보입니다.

― 한비자 지음, 구윤숙 풀어 읽음, 『낭송 한비자』, 20쪽


‘법가’는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종결시킨 진나라가 채택한 이념이었습니다. ‘제자백가’라고 하여 난세를 종식시킬 수많은 생각들이 쏟아져 나왔던 시기에 법가는 가장 먼저 큰 성공을 거둔 사상인 셈이었죠. 한비자는 그러한 법가 사상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이론가였습니다. 더불어 한비자는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 문장은 그런 자신의 단점을 변호하는 말입니다. 그 말 속에 상식을 뒤집은 역설이 있습니다.


‘유창하고 거침없는 말’, ‘착실하고 정중하며 빈틈없고 강직한 말’, ‘풍부한 인용이 섞여 있는 말’ 등은 우리가, 이른바 말을 잘한다고 할 때 꼽는 덕목들입니다. 한비자는 이런 훌륭한 덕목들 속에 숨은 약점들을 집어냅니다. 그런 말들이 사실은 화려하고 알맹이가 없으며, 서투르고 산만해 보이고, 속이 비어 쓸모없는 말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한비자의 그러한 평가가 진실인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 말은 한비자의 개인적인 단점이자 그가 주장하는 법가 사상의 전체적인 구도 속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신의 단점과 대조되는 장점들이 가진 약점을 지적함으로써 각 군주들을 찾아가 ‘말’로써 자신을 펼쳐 보인 유세가들의 허황됨을 공격하고, 일관성을 결여한 군주의 말들로서 통치하는 당대의 정치 시스템을 공격하는 것이죠. 한비자의 생각에 국가의 성공적 통치는 군주의 의지도, 똑똑한 신하의 임기응변으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법’으로 명명되는, 누가 통치하더라도, 어떤 신하가 정책을 펼치더라도 변하지 않는 ‘시스템’이 확립되어야만 통치가 제대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따라서 말 잘하고 똑똑한 개개인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관적인 시스템을 관철해 나가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한비자가 설계한 저런 형태의 사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법치사회와 다른 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법가 사상을 채택한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후세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하는 점을 의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자신의 단점을 뒤집어서 사회를 ‘시스템’으로 올려놓아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가는 이 대목이 정말 감동적입니다. 대개의 경우 자신의 ‘타고난 단점’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앞에서 우리는 ‘절망’을 목격하곤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고치려고 하거나, 피하려고 하거나 하는 식으로 해결을 하려고 하고요. 한비자는 그런 단점의 의미를 뒤집어서 재구성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인문학의 힘입니다. 상식적인 것을 뒤집어서 다른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죠. 한비자의 발상은 ‘인문학의 힘’을 보여 주는 가장 적절한 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뜬금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적 발상과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은 책, 영화, 그림, 음악, 게임 등 어떤 형식의 작품이든 삶의 양분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막 공부가 하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


낭송 한비자 - 10점
고미숙 기획, 한비 지음, 구윤숙 옮김/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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